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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Dec 07. 2021

부캐는 만능일까

자아 정체감 혼란이 올 때

     

부캐가 생겼다    


   

 브런치에 가입해 글을 쓴 지 몇 달 안 된 시점, '유랑 선생'으로 닉네임을 바꿨다. ‘유랑’은 십여 년 전 직장인 동호회에서 사용하던 닉네임 중 하나였다. 내 본업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한 자락 있었는지 ‘선생’이라는 말도 붙였다. 연령대도 성별도 모호한 느낌을 지닌 이름이었지만 뭐, 이름을 붙이고 보니 나름 재미있었다. 당시 몸도 마음도 부자유한 상태였으니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나에게도 그렇게 처음으로 부캐가 생겼다.(브런치의 많은 작가분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부캐를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몇 개월간 부캐가 주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유랑선생은 약간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풀어낸 글을 자주 올렸다. 꾸준히 글을 발행하는 성실함도 갖추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부캐는 생활인으로서의 나와 괴리감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괴리감이 도리어 자유로 느껴졌다. ‘까꿍! 나는 실은 이런 인간이지!’라고 속으로 외치며 나만 날 아는 듯한 묘한 쾌감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부캐와 나와의 간극이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가끔씩 욕도 찰지게 내뱉는 사람이지만, ‘선생’이라는 말이 붙으니 뭔가 바람직하고 반듯해야 할 것 같았다. 타고난 기질상 근면성이 떨어지는데(어제 심리검사 결과 해석에서 이 말을 들었는데, 처음 들을 때는 충격을 받았지만 곧 수긍했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듯도 싶었다. 위로에 관한 이야기를 올리다 보니 내 외로움과 불안도 잘 다스려야 할 것 같았지만, 다스림은커녕 나에게 닥친 자존감 하락의 문제도 해결이 어려웠다. 과거에 내가 쓴 댓글을 보면서 ‘너 성인군자야 뭐야, 왜 이렇게 경건하고 어른스러운 척하는 거지 속으로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물론 내 생의 역사 속에서도 자아정체성 혼란의 장면이 존재했다. ‘해맑아 보이는 외모 (죄송, 과거의 이야기다)에 해맑지 않은 마인드의 소유자’라는 말은 꽤 들어 보았다. 안정적이고 틀에 박힌 삶의 행로를 따라 걸어왔지만 가끔 사고방식이 30도 정도로 비뚤어지고는 했다. 이처럼 정체감 혼란의 장면을 여러 번 마주해 왔으나 온라인 공간에서만큼 나와 또 다른 나와의 간극을 크게 느낀 적은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가입하자 더 큰 혼란이 왔다. 나는 약간의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고 이 SNS의 세계에 발을 들였는데(자세한 이야기는 이 글), 이 공간에서 부캐의 시대가 활짝 열려있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부캐를 가지고 열심히 활동 중이었다. 최신 트렌드에 나름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잠시 품었지만 그보다 나를 압도한 감정은 막연한 초조함과 불안감이었다. 빠른 속도로 피드가 올라가는 흐름에 동참해 부캐를 키워야 할 듯한 착각도 느꼈다. 한편으로 '유명인이나 연예인도 아닌 내가 굳이 부차적인 캐릭터 만들기에 발 담가야 하나'라는 의문도 자주 품었다.


 ‘나는 대체 뭔가’라는 근본적이고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도 늘어났다.  사춘기에도 가지지 않던 자아정체감 혼란이 마흔이 다 돼가는 나이에 오자 헛웃음이 났다. 온라인 세상의 부캐가 내 인생에 강력한 힘을 발휘할 거라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늘 그렇듯 ‘남들은 내게 큰 관심 없어!’를 시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혼란이 사라지지 않았다.     

   


현실과 환상의 혼란, 르네 마그리트의 <데칼코마니>


     

 르네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1898~1967)는 벨기에의 레신에서 양장점을 하는 아버지와 모자 가게를 하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1916년 미술학교에 입학해 그림을 배워나갔으며 학교를 끝낸 뒤 처음에는 의류 광고나 벽지,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일을 했다. 이후 파리로 건너가 살바도르 달리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예술 세계를 세워 나간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론의 영향을 받은 화풍으로 192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사랑받았다. 이 화풍에 속한 화가들은 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무의식 속 비이성적이고 괴상한 장면을 예술로 표현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모습

 

 르네 마그리트는 익숙하고 낯익은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화폭에 옮기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사람의 얼굴을 흰 천, 새나 사과 등으로 가린 작품들이 유명하다. 어릴 적 그의 어머니가 강물에 투신해 자살했는데, 흰 천에 얼굴을 가려 건져 올린 어머니의 모습을 마그리트가 목격한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얼굴을 가린 그림을 자주 그렸을 거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아들'(1964)와 '연인들'(1927-1928)


 마그리트는 특히 일상적이고 낯익은 관계에서 사물을 떼어내 이질적인 환경에 놓아두는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예술적 기법을 ‘고향, 또는 고국으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하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 부른다. 그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이용해 관습성과 합리성을 배제한 초월적인 장면을 표현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1953). 팝아트, 영화 '매트릭스' 등에 두루 인용된 작품이다.



다음 그림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데칼코마니(Decalcomania, 1966)다.

데칼코마니(르네 마그리트, 1966)


데칼코마니는 동일한 형태를 찍어내어 똑같은 이미지를 대칭으로 나타낸 그림을 말한다. 마그리트의 작품 속에서 제목대로 중절모를 쓴 남자의 이미지 두 개가 나란히 대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 대칭의 이미지는 각기 다른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의 왼편에는 남자의 이미지가 그대로 그려져 있으나 오른편에는 커튼 가운데 남자의 모습대로 빈 공간이 보인다. 빈 공간 안에는 하늘과 바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 풍경이 유독 선명하다.


 작품을 살펴보는 관람자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찬다. 캔버스 속 남자는 현실 속 인물인 걸까? 대칭으로 나타난 두 모습 중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일까? 르네 마그리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 해석이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기에 의문은 더욱 커져간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자아 정체감' 문제를 자주 떠올린다.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모호한 상태, 나의 실재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 자아정체감 혼란은 사춘기부터 시작되는 인생 고민이지만, 다양한 사회적 가면을 써야 하는 현대인에게 특히 해결이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가상공간에서 개인이 각자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커졌다.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개인은 새로운 정체감을 갖기도 하지만, 이는 도리어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때때로 내가 누구인지 나조차 헷갈리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를 건너는 방법       



  <데칼코마니>를 비롯한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묘한 느낌을 관람자에게 선사한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모습은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때로는 혼란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제 유명인이 아니라 해도 본업과 취향을 나누어 '멀티 페르소나'를 가질 수 있는 시대다. 직장인이 음악가로 활동하고, 주부가 온라인 공간 속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 이런 시대에 부캐는 자아의 영역을 확장하는 자유와 희열을 선사한다. 인간은 입체적인 존재인 만큼 다양한 자아를 가지고 있고, 이를 밖으로 꺼내 보이며 일상의 답답함을 벗어날 수 있다. 표출하지 못하던 개성을 드러내는 분출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가상 공간 속 가면은 현실 속 모습과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적절히 이룰 때 즐거움을 준다. 현실 속 자아정체감이 부재한 상태로 멀티 페르소나를 가질 경우 자아 간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카카오톡에서 각기 다른 자아를 보여주다 스스로 혼란에 빠지는 이들도 있다. SNS에서 자신에게 손뼉 쳐 줄 관객만 집요하게 찾다 무리수를 두는 이들도 있다. 나에게 없는 특성을 부각하며 부캐를 유지한다면 디지털 허언증에 걸려 거짓된 가면을 쓰는 것에 다름없다. 실제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누군가와 온라인 속 관계를 유지하다 심리적 고립감이 커질 가능성도 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건 현실에 두 발 딛고 선 내가 아닐까. 핸드폰이나 컴퓨터 속 조그맣고 네모난 창에서 시선을 돌려 본캐를 잘 돌보아야 부캐도 오랫동안 유지된다.    


  부캐에 대한 환상을 버릴 필요도 있다. SNS의 세계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해가는 이들은 대다수 성실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초조와 불안감을 내뿜는 이들이 존재했다. 분명 부캐는 다양한 자아를 자유롭게 표출하는데 큰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자아의 다양성을 위해 만든 부캐조차 ‘N잡러가 되는 지름길’로 획일화되는 경향이 존재한다(한 이웃 작가님과 이 현상에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평생 직업의 개념이 사라지고 제2의 대안을 찾아 각자도생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경우 개인의 '부캐 키우기'가 자유보다는 압박감으로 다가올 가능성도 크다.

  

 멀티 페르소나의 즐거움을 즐기면서 부업을 발굴하고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대안으로만 대한다면, 멀티 페르소나도 조급하고 버거운 짐이 될 수 있다. 부캐 키우기 때문에 무한 자기 계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가능성도 존재한다. ‘부캐 놀이’가 심리적 부담을 질 만큼 의미 있는 것인지 한 번쯤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  

      

 혼란을 겪었던 나의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이제 유랑선생과 '나'라는 사람의 간극을 약간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정해진 형식의 글만 올려야 한다는 쓸데없는 부담감도 좀 내려놓기로 결심했다.(나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 걸 혼자 임무로 만들어버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퇴고에 힘쓴 글보다 자연스러운 나를 비추는 글도 가끔 내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현실에 두 발 딛고 서 있기 위해 핸드폰 보는 시간을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스마트폰의 시대에 실행이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어떠한 가면을 쓰든 버거울 정도까지 이어갈 필요는 없다. 유희와 즐거움의 선을 넘어 압박감과 혼란이 존재한다면, 부캐의 시간은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 부캐는 만능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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