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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Nov 30. 2021

고통의 순간,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  

자존감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 

스스로를 잃어간다 생각될 때 


 

 ‘나 정도의 인간이’, ‘나 같은 게 ’라는 속엣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코로나의 여파로 오랫동안 아이와 집 안에 머물러 있던 시기였다. 살짝 버튼만 눌리면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 머릿속에서 자동반사로 튀어나오곤 했다.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원래부터 자존감 높은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말은 마음속으로 뇌까려 본 적 없는 나였다.     


 인간의 자존감이라는 건 가변성이 엄청난 놈일지도 모른다. 해외살이를 하며 1년 반을 아이와 집 안에서 주로 생활하다 보니,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인지 왜곡까지 시작되었다. 사소한 일에도 ‘나 같은 게’라는 네 음절 말이 튀어나왔다. ‘나 같은 게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 같은 게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니’식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사회적인 고립이 심해질수록 '나 같은 게'라는 말의 적용 범위는 점차 확장되어 갔다. ‘나 같은 인간이 과연 사람들이랑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을까.’ , ‘나 같은 게 밖에 홀로 외출해 돌아다닐 수 있는 인간이었던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은 이제 아무 곳에나 따라붙었다. 

    

 자존감 손상이 가장 심각하게 일어난 영역은 '말하기'였다. 나름대로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이라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던 옛 시절도 있었다. 일을 할 때만큼은 머릿속 생각을 상세하게 말로 표현할 수 있던 나였다. 반면 일상생활에서 내 감정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는 서투른 편이었다. 특히 가족들 앞에서 그런 경향이 짙었기에, 가정생활이 주를 이루던 해외살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집에서 ‘말을 조리 있게 못하는 사람’. ‘맥락 없이 말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자주 받았다. 상대는 별다른 악의나 비난의 의도를 담지 않고 건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극도로 제한된 인간관계만 맺고 있는 상태였다. 타인의 사소한 지적이 거대한 의미로 다가오던 시기였다. 

 

  비슷한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듣다 보니 실제 입으로 내뱉는 말이 어눌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을 못 하게 된다는 건 가장 큰 공포였다. 이렇든 저렇든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을 했으니, 나는 말하는 일로 밥벌이를 해결하던 사람이다. 이 상태로 날 표현할 언어를 영영 잃어버린 사람이 된다면? 다수의 인원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불가할 정도로 내 말솜씨가 형편없어진다면? 한때 자부심을 느끼던 '말하는 행위'에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나를 알던 지인들이라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예전의 내가 더 이상 아니라는 생각으로 몇 달을 보내는 중이었다. 


 한 번은 책을 출간한 뒤, 편집자분의 메일을 받았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책 출간 기념으로 짧은 강연이라도 할 텐데 아쉽다는 이야기를 건넨 메일이었다. 그 메일을 읽자마자 강연을 하지 않아 되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몇 년 전의 나였다면 남 앞에서 한 번 더 말하는 기회를 얻고 싶어 욕심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누구 앞에서도 말할 자신이 없었다. 발표나 수업 같은 건 '나 같은 인간에게'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내 언어를 잃어간다는 생각이 들어갈 때, 마음속으로 수 백번 의미 없는 질문을 이어갔다. 차라리 나를 일부분 내려놓고 포기한 채 버티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예전에 하던 일에 대한 자부심,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고 세상의 기대치에 맞는 아내 또는 엄마의 모습으로 지내면 되는데. 왜 나는 그게 안될까.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끊임없이 던졌다. '나를 더 내려놓아야 한다', '더 참고 버텨야 한다'는 말을 되뇌며 자책의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다. 



그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켰을까, 모로의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보다 한 세대 앞의 티탄(Titan)족의 일원으로 뛰어난 예언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이름 역시 ‘먼저 생각하는 사람’, ‘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지 능력을 갖춘 그는 티탄족과 올림포스 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티탄족의 패배를 예감하고 올림포스 신들에게 투항했다. 이후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드는 임무가 주어진다. 


불을 훔치는 프로메테우스(얀 코시에르, 1630)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숨겨놓은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어준 신으로도 유명하다(알려져 있듯 불의 발견은 인류의 발전 및 문명의 발달에 밑바탕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단단히 화가 난다. - 복수를 위해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여성을 프로메테우스에게 보냈고, 그녀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된다. 결혼 후 판도라는 이른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인류의 불행을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프로메테우스는 다시 한번 제우스의 장래에 관한 비밀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아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지독한 형벌을 내린다.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의 바위에 쇠사슬에 묶은 다음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고통을 겪게 만든 것이다. 문제는 형벌의 고통이 무한 반복된다는 사실이었다. 밤이 되면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다시 회복되었고, 다음 날이면 또다시 독수리가 그의 내장을 쪼아댔다.  


 19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 <프로메테우스>는 이 고통스러운 형벌의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의 중심에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에 묶여 있다(그를 옭아맨 발의 사슬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것이다). 왼쪽에는 커다란 독수리가 그의 살점을 쪼아대는 중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오른쪽에 위치한 바위산은 그의 험난한 운명을 상징한다. 회색빛의 스산해 보이는 하늘 역시 어두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프로메테우스(귀스타브 모로, 1868) @wikiart


 그러나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보다 눈에 띄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자세와 표정이다. 크나큰 고통의 순간에 놓여 있음에도 이 남성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밝은 눈은 흔들림 없이 먼 곳을 응시하는 중이다. 결연한 표정 역시 인상적이다. 


 모로의 그림 속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은 다른 화가들이 그린 프로메테우스의 모습과 대조된다. 프로메테우스가 당하는 날카로운 고통에 주목한 루벤스의 작품에 비해 모로의 그림은 프로메테우스의 단단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루벤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좌)와 모로의 <프로메테우스>(우)


모로의 작품 속 프로메테우스를 다시 바라보자. 그의 눈빛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뜻을 비추는 동시에,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는 다짐을 보여준다.  프로메테우스의 머리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작은 불꽃 또한 결연한 의지를 상징한다. 이 강인한 티탄족은 천하의 신 제우스가 꺼뜨리지 못할 종류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픔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였다.      



가장 먼저, 나를 지켜야 할 때 



 모로의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는 어떤 것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내 언어를 잃어간다 느끼던 초기의 나는 스스로를 비난하는 방안을 택했다. 내 약한 멘탈을 제일 먼저 탓했고, 허약한 적응력을 비난했으며,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을 끄집어내 두들겨 팼다. 스스로를 탓하는 것에도 진력이 날 때쯤, 내가 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찾아낸 방안은 결국 글쓰기였다.  - 다행히 말이 줄어든 만큼 글 속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어떤 종류의 고민도 활자로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그 행위 속에서 나를 지켜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고통과 외로움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은 꽤나 강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를 잃어가는 상황 속에서 글쓰기는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는 무기였다.  


  나의 경우에는 글쓰기였으나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내 존재가 휘발되어 간다 느끼는 순간, 스스로가 무너져 내린다고 생각되는 시기, 나를 지킬만한 작은 행위라도 찾아내는 게 좋다. 타인의 상황과 비교하며 허약한 내 의지력을 탓하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존감을 키우자 입으로만 다짐하는 것 역시 그다지 소용이 없다. 크고 작은 행위가 쌓여야 자존감도 자리 잡는다. 책을 벗 삼아 일정한 양의 활자를 읽어 내려가거나, 정해진 거리를 하루하루 조금씩 달리는 행동, 일정한 시간만큼 악기를 연주하는 행위 등 나를 지킬만한 사소한 행동을 찾는 편이 좋다. 경험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쌓이는 만큼 고통을 버텨낼 내력도 자라나기 때문이다.  


  나를 형편없게 만드는 상황이나 사람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도 적당한 방법이다. 최소한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상황까지 버텨내는 게 능사는 아니다. 나를 무너뜨리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걸 '도망'이나 '도피'로 취급하지 말자. 어떤 경우에는 과감히 발을 빼는 게 도리어 스스로를 지키는 방도일 수 있다. 


 사회가 내게 얹어주는 책임감을 지고 가는 것, 타인의 비난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게 중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세상의 수많은 임무보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 그것이 우선순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번 주에도 이웃분들의 글을 내일 이후에나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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