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Jan 25. 2022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 왜 가끔 위험해질까

영화 <다크 나이트>와 '공정한 세상 가설'

오늘은 이것저것 일이 있어서ㅠㅠ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에 글을 싣지 못하고 <아무거나 3분 교양>에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에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조커의 게임은 왜 위험한가  



배 두 척이 있다. 일반 시민들이 타고 있는 배 한 척과 죄수들로 가득 찬 배 한 척. 양쪽 배에 타 이들에게 버튼이 주어진다. 상대편 배를 폭파시킬 수 있는 기폭 장치의 버튼이다. 자정이 되기 전에 상대편 배를 먼저 폭파하는 쪽만 살 수 있다는 규칙이 전달된다. 12시가 될 때까지 어느 쪽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다면, 배 두 척이 모두 폭파될 예정이다. 이 잔인한 사회 실험을 설계한 이는 다름 아닌 조커다.   


 이게 대체 슈퍼히어로 영화 맞나. 2008년 <다크 나이트>를 관람한 뒤 중얼거린 말이다. 고(故)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존재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는 단순히 나쁜 놈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번번이 극단적 선택의 상황을 쥐어주는 게 영화 속 조커의 게임 방식이다. 잔인한 게임의 룰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것. 혼란과 혼돈이 세상의 유일한 규칙으로 남는 것. 이것이 조커가 원하는 바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 속 조커의 모습  @ <다크 나이트>  



 조커가 만들어낸 수많은 갈등 상황 속에서도 배 위의 선택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장면을 접하자마자 단숨에 영화 속으로 끌려 들어간 건 물론이다. 만약 내가 두 배 중 한 곳에 타고 있다면? 그러하다면 나는 일반 시민에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은 거 아닐까. 상대편 배에는 범죄자들이 타고 있다.  잘못을 저질러 감옥에 간 이들이잖아. 범죄자들은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인데, 벌을 받는 게 어느 정도 온당한 일 아닌가.


영화 속 배에 탄 일부 시민들도 비슷한 생각을 이야기한다 @<다크 나이트> 속 캡처 사진


상상을 이어가던 중 문득 소름이 돋았다. 아니, 이건 너무 위험한 생각 아닐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반문도 이어졌다. 아니야. 그래도 둘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머릿속 물음표가 폭주하는 걸 느꼈다. 영화는 단 몇 분 만에 내 머릿속에 거대한 의문과 혼란을 뿌려 놓았다.

  

 그 몇 분, 혼란의 상황이 찝찝하고 불편했다. 언젠가부터 권선징악이 선명한 이야기만 쫓아다니던 나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명확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선한 쪽이 악한 쪽을 업어치기해 단숨에 무너뜨리는 이야기를 선호한다. <베테랑> 같은 영화의 결말이 마음에 든다. 얼마나 통쾌하고 후련한지. 현실이 간결하고 명쾌한 논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 이후로, 결말이 통쾌하지 않은 이야기는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다크 나이트>의 내용은 마음 한 구석 찝찝함을 넘어서 어딘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영화 속 정의로운 검사였던 하비 덴트가 악역으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정의로운 영웅에서 악역 투페이스로 변하는 하비 덴트   @<다크 나이트> 캡처 사진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동료들의 배신을 겪은 후, 하비 덴트는 양면의 얼굴을 가진 악역 투페이스로 변신한다. 정의를 믿던 사내는 한순간에 복불복을 믿는 악의 화신이 되었다. 선과 악이 불분명하다 못해 자리를 뒤바꾸는 이야기는, 불안감과 찝찝함을 불러왔다. 나는 왜 이런 이야기 방식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문득 의문이 생겼다.


 

권선징악과 공정한 세상의 법칙, 늘 유효할까  


       

  196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가 이야기한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이라는 이론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어느 정도 선하고 공평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기를 원하고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원하는 마음. 당연한 이치다. 모든 동물은 통제력을 가지지 못할 때 불안감을 느낀다.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가면 언젠가 복이 돌아온다’는 믿음은 세상을 통제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안겨준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불안감으로 점철되기 쉬우니.


 인류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이러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다. 착한 자가 복 받고 나쁜 자가 벌을 받는 결말은 안정감을 안겨 준다. 악인이 벌을 받고 망신까지 당하는 <베테랑>의 결말에서 내가 통쾌함을 느꼈듯.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권선징악, 자업자득, 인과응보의 상황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선량한 이들도, 성실하게 노력해 온 이들도 때때로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건을 마주한다.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문제는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불행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이어질 때 생긴다.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원칙은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해석할 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불행한 사건을 맞거나 범죄의 피해자가 된 누군가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의문을 품는다. 세상은 어느 정도 공정하게 돌아가는데, 설마 아무 일도 없이 저런 불행을 맞았겠어? 어떤 원인이 있겠지. 저 사람에게 그런 일을 당할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강력 범죄 사건에 대한 기사를 접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이유가 단순한 불운이나 랜덤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음속 불안감이 극대화된다. 운이 나쁘다면, 이 모든 것이 복불복의 결과라면, 나 역시 언젠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생각의 방향은 이내 다른 곳으로 흐른다. 불행의 원인을 피해자의 과실이나 잘못, 특성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밤늦게 돌아다녔다거나 평소의 행실이 나빴다는 등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아내고 이를 지적하며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불행한 사건을 다룬 기사 밑에서 피해 당사자의 잘못을 은근히 지적하는 댓글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의 한 구간에서 실패를 맛본 이들, 혐오의 피해자가 된 이들에게 ‘자업자득’ ‘인과응보’식의 잔인한 말을 날리는 사람들도 있다. 의외로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2차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비슷한 심리에서 나와 다른 이들에게 선을 그어놓고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행위도 벌어진다. 불행을 맞이한 이들을 나와는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몰아넣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이다. 정의롭고 선량한 사람이라 자처하는 이들 , 선과 악을 명확히 규정할 수 있다 생각하는 이들이 가해자로 변모하는 건 한순간이다.         

 


<다크 나이트>가 남기는 질문들  



<다크 나이트> 속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배에서의 선택 장면이 으스스하게 다가온 건 이런 지점 때문이었다. 영화 속 선량한 시민들은 내가 몇 분간 상상한 바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명백해. 저들은 범죄자니까’라는 정당화는 간편하고 쉬운 논리다. 상대편 배의 폭파 버튼을 눌러 버려도 죄책감이 덜어진다. 상대방을 ‘그런 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나쁜 존재로 규정하면 모든 일이 쉬워지니까.


 다행히도 영화 속 인간은 최악의 상황을 택하지 않는다. 두 편의 배에 탄 사람들 모두 기폭장치를 누르지 않았고 양쪽 배 모두 폭파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커가 만들어놓은 게임의 법칙, 선과 악을 단숨에 가르는 잔인한 게임의 법칙을 벗어난다. 예상 밖 사람들의 선택에 영화 속 조커는 분노했지만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 속 조커와 배트맨의 모습 @<다크 나이트> 네이버 영화 클립

 

그러나 영화는 정의로움의 상징이었던 하비 덴트를 타락시키며, 감상자의 머릿속에 의문을 남긴다. 내가 행하는 것을 ‘완전한 정의’라 규정하는 건 얼마나 위험한가.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가를 수 있는 건가.


 권선징악의 법칙은 아름답다. 선한 의지는 칭찬받을 만하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분법으로 선과 악을 의심 없이 가르는 순간,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이 정의라고 섣불리 규정하는 순간,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찰나일 가능성이 높다. 공정함과 정의로움은 ‘섣부른 확신’보다 ‘끊임없는 의심’을 요구하는 것일지 모른다.   



1. 다음 주 화요일(2월 1일)은 설날인 관계로 한 주 쉬고, 그다음 주(2월 8일)에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에 글을 싣겠습니다.


2. 이웃분들의 글을 훑다가(시간 관계상 아직 제대로 읽지는 못했어요ㅠ 죄송해요) 우연히 블루애틱 작가님의 사연을 접했습니다. 가족분이 암투병 중이셔서 혈소판 성분헌혈을 부탁하는 글을 올리셨더라고요. 글을 읽자마자 작가님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서 공유합니다. 여건이 되시는 분들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https://brunch.co.kr/@blueattic/56


매거진의 이전글 맥도날드간판, 왜 낯선 여행지에서 보면 반가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