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미루기의 달인'이 되는 이유

소소하게 망할 권리 찾기

by 유랑선생


내 게으름의 생성 과정


새벽 5시에 울면서 시험공부를 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다. 당장 다음 날 아침 9시부터 영어 독해 시험이 시작이었다. 공부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시점은 정확히 전날 밤 9시였다. 그 시점까지 교과서를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분명 시험 열흘 전부터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교과서도 한 번 훑지 못한 상태로 시험 전날을 맞이했다.


게으른 나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교과서를 읽기 시작하는데, 갑작스러운 졸음이 밀려왔다. 머릿속에 작은 아이디어가 스쳤다. 네 시간 정도 잠을 잔 후, 시험까지 남은 일고여덟 시간 정도에 집중과 몰입을 쏟아부으면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다는 발상.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논리지만, 당시로서는 꽤나 합리적인 생각으로 느껴졌다.


결국 이 비합리적인 생각을 믿으며 잠이 들었다. 꿈나라에서 현실로 돌아온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창밖으로 해가 환히 떠오르고 있었다. 교과서를 들추며 막막함에 울음을 터트렸다. 대책 없이 잠들어버린 나에게 욕설을 쏟아부었음은 물론이다



미루기의 달인



특별한 일화는 아니다. 인생의 구간마다 게으름과 벼락치기의 순간이 있었다. 이 순간은 늘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된다. 처음에는 내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끝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에 그득했다. 과업 수행에 대한 목표치도 높았다.


보고서를 써야 한다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치밀하고 논리 정연한 리포트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시험공부의 시작 시점에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워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를 상상했다. 비현실적인 상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가능할 것만 같은 몹쓸 기대감이 샘솟았다.


한달음에 완벽한 목표를 달성하고픈 욕구가 샘솟았다. 문제는 갈 길이 한없이 멀었다는 사실이다. 일단 목표를 수행하려면 허술한 보고서 초안을 적는 단계를 견뎌야 하며, 머릿속이 백지인 채 교과서 첫 장을 읽는 나를 참고 봐줘야 했다. 목표치에 비해 현실 속 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초라한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부딪히고 깨지며 실패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도 마음 한 켠 있었다.



'미루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 나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아트인사이트


상상과 현실의 간극이 지나칠 정도로 크다 느껴지면 내면의 대화마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한다고 과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런 걸 하는 게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지?’ 회의감이 샘솟았다.


소크라테스급 문답법을 홀로 주고받다 보면 회피 욕구가 고개를 쳐드는 순간이 온다. 괴로운 현실 대신 가상의 세계가 두 팔 벌려 환영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었다. 게임, TV 시청, SNS 훑기 등 도망갈 수 있는 낙원이라면 끝도 없이 많았다.


한창 가상의 세계로 도피해 있어도 결국 현실의 스위치가 켜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허겁지겁 현실로 돌아오면 마감을 앞둔 일이 게으름을 피운 시간만큼 켜켜이 쌓여 있었다. 보고서 마감이 하루 이틀 정도 남아 있거나, 시험이 3시간 정도 남아 있는 시점에는 다급한 마음과 동시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다시 살아났다. 미루기의 악순환은 반복되었고, 그 속에서 나는 죄책감과 괴로움의 몸부림을 반복했다. 대략 30년 이상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살았다. 어느새 미루기와 벼락치기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불완전한 나를 용서해주기



미루기를 극복할 방법의 힌트를 얻은 건 토크쇼였다. 전 국가대표 박지성 선수가 <대화의 희열>에서 자신의 슬럼프 극복 방법을 털어놓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프리미어 리거는 가장 힘든 순간 자신을 칭찬하는 너그러움을 언급했다. 슬럼프 당시에는 5미터 앞으로 공을 차서 패스한 정도라도 스스로에게 "잘했어! 거봐 할 수 있잖아 “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소한 성공에도 스스로를 격려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는 이야기에 알 수 없는 뭉클함이 밀려왔다. 나름의 깨달음도 얻었다.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한 말을 쏟아부었기에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로 머물러 있었다.



@대화의 희열 캡처본



마음속 이상향이 늘 높았던 나였다. 특정한 목표에 도달해야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했고, 큰 걸음으로 성공을 이루어야 스스로를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라 여겼다. 고지에 이르지 못할 것 같으면 자기 비난을 반복하며 아무것도 못한 나를 탓하는 일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다. 작고 사소한 단계를 밟은 나를 칭찬해준 기억은 없다. 한 달음에 성공을 이룰만한 완벽한 상태와 타이밍만 찾다가 아예 시작도 못한 날이 많았다.


깨달음을 얻은 후 일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하면 초안을 대충이라도 써보자 마음먹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초안'이나 '보고서 작성' 따위가 아니다. ‘대충’이라는 단어다. 형편없는 초안을 작성해도, 그것이라도 해낸 나를 칭찬한다. 불완전해도 무엇이라도 해낸 나를 기특하게 여겨준다.


시작의 단계를 거친 후 한 번만 더 수정을 해보자고 스스로에게 권유한다. 한 번 해내면 또다시 칭찬해준다. 이렇게 ‘작은 과업 수행 – 스스로 칭찬 – 작은 과업 수행 – 스스로 칭찬’의 단계를 밟아갔다. 나 자신을 칭찬하고 달래 가며 한 걸음씩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보고서 완성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극단적인 생각 버리기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버려야 할 것은 머릿속 엄격함이다. 벼락치기의 달인이었던 시절, 나는 일을 할 때 한 번에, 끝내주게 멋진 상태로 과업을 수행해야 제대로 일을 한 것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 원칙의 밑바탕에는 ‘완벽한 상태로 멋지게 과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나는 실패한 인간’이라는 생각도 숨어 있었다.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한 상태에서 ’흥興 – 망亡이라는 극단적 생각을 거듭했기에, 아예 시작도 못 한 경우가 많았다.


사고회로.png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사고 회로. 극단적인 생각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대학내일

<나우>라는 책을 쓴 미국의 자기 계발 트레이너 닐 피오레 Neil Fiore에 따르면 실행력이 뛰어난 이들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 거나 ‘이 일은 너무 크고 중요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완벽해야 한다’ 식의 내면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 대신 “언제 시작할까?”, “나는 실수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나씩 차근차근하면 된다” 정도의 말로 스스로를 달랜다는 것이다. 극단적이고 엄격한 마음속 말을 줄이면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쉬워진다.


나는 1년 넘게 브런치라는 온라인 콘텐츠에 매주 한 번 글을 올리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어떻게 글을 규칙적으로 발행할 수 있는지 묻는다.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글쓰기의 시작 단계, 아무런 활자도 적지 못한 흰색 공백을 마주할 때 “좋은 글을 써야 해” "일정 수준 이상의 멋진 글이 나와야 해"라는 식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절대 건네지 않는다. 나는 글쓰기 딥러닝을 마친 인공지능도 아니고 헤밍웨이급의 천재 작가도 아니다(심지어 헤밍웨이도 초안은 쓰레기라고 말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매주 훌륭한 글을 써서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오은영 선생님.jpg 오은영 선생님의 뼈 때리는 말씀. 무의식에 깔려 있는 이런 원칙을 조금 내다 버리면 새로운 일을 감행하기 쉬워진다. @대화의 희열 캡처본

엄격한 원칙과 기준을 버리고 무조건 시작부터 한다. 매주 글을 온라인에 발행하기만 하면 스스로에게 칭찬 세례를 퍼붓는다. 뭐라도 해낸 나를 기특하게 여겨주어야 응원을 받은 자아가 힘을 받아 다음 단계를 밟아갈 수 있다


우리는 가끔 거창한 목표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소소하게 망할 권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거창한 결과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 내가 맡은 과업을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일'로 과대 포장하는 습관, 나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커다란 좌절을 불러올 수 있다.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작은 행위로 잘게 쪼개자.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면 칭찬을 좀 퍼부어 주어도 괜찮다. 기준치의 절반만 성공했더라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작은 실패 정도는 괜찮다고 말해주자. 소소하게 망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제 여덟 번째 책 <어느 날 유리멘탈 개복치로 판정받았다> (부제 : 예민한 나를 위한 섬세한 대화 처방전)이 출간되었어요. 제목이 다소 특이하죠 : ) 위 내용은 책의 추가 분량 중 한 꼭지인 '소소하게 망해도 괜찮아'라는 꼭지의 글입니다. 제 브런치북 중 '예민한 당신을 위한 대화생활백서'를 기반으로 한 에세이이고 추가 분량을 절반 이상 새롭게 써서 원고를 완성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유형의 분들께 이 책을 권해 드립니다.


1. 대화 도중 쉽게 지치는 민감한 성격을 가진 분들

2. 완벽주의와 높은 기대치로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느끼는 분들

3. 무례한 대화에 사이다 킥을 날리고 싶으나 대신 이불킥을 날리는 분들

4. 나 자신과 하는 내면의 대화 때문에 도리어 무기력해지고 마음이 괴로워지는 분들


저와 성향이 비슷한 분들께 (공감과 위로 + 덜 피로한 대화를 위한 작은 tip)을 건네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온라인 서점 상에는 책이 나와 있는 상태 같아서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책의 온라인 서점 링크입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9213506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7784248&orderClick=LOA&Kc=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4268325


내일(화요일) 저녁엔 원래대로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에 글을 한 편 올리거나, 위 책의 내용 중 인간관계를 다룬 글을 한 편 올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