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미니멀리즘, 가능할까

쿨하고 초연한 인간이 되고 싶을 때

by 유랑선생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다 혼란이 올 때



20대 시절, 한 친구가 자신의 핸드폰 목록을 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나 여기에서 불필요한 친구 목록을 싹 정리할 거야.” 나 역시 정리대상일까 마음 한 편 궁금증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친구가 부러웠다. 인간관계에 '정리‘라는 대담한 표현을 쓸 수 있다니. 관계를 의도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발상은 당시의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미 20년 전에 인간관계의 미니멀리스트였던 친구는 시대와 유행을 앞서 갔던 셈이다.


바야흐로 미니멀리즘, 정리의 시대다. 인생에 필요하고 긴요한 것을 남기고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자는 흐름이 대두했다. 불필요하고 복잡다단한 것에 둘러싸여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릴 때부터 ’깔끔‘이나 ’ 정리‘라는 단어에 취약한 나였음에도 미니멀리즘의 정신에는 매혹됐다. 특히 연락하지 않는 전화번호부와 몇십 개 넘는 카톡 대화창을 바라보며 인간관계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지나치는 말에 상처받아 섀도우 복싱하듯 나 홀로 미니멀리즘을 선언한 순간도 있었다. “나 걔랑은 이제 연락을 하지 않을 거야” 홀로 중얼거렸으나, 얼마 후 그 친구에게 카톡이 오면 답을 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였다.


Automat(Edward Hopper, 1927) @wikiart


쿨하고 단호한 미니멀리스트의 선두주자가 되고 싶었으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막상 정리를 시도하니 지금까지 맺은 인간관계를 (손절/ 유지)의 두 칸에 분류해 넣기 힘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 기를 앗아가는 에너지 뱀파이어는 단호하게 손절 칸에 집어넣을 수 있었지만, 분류가 불가능한 관계가 훨씬 많았다. 한때 절친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연락이 뜸해진 친구, 간간이 내 속을 뒤집는 헛소리를 날리지만, 그를 상쇄할 만한 따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지인까지,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인터넷 게시판에서 ‘정리해야 할 인간관계’ 목록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목록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1. 필요할 때만 나에게 연락하는 사람

2. 종교나 정치 신념을 나에게 강요하는 사람

3. 내 고민은 가볍게 여기거나 나와의 약속을 너무 쉽게 어기는 사람

4. 만나면 우울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

5.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

- 1부터 5에 해당하는 사람은 정리한다.


활자로 표현된 인간관계의 정리는 간단하고 명확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쿨하지 못한 감정이 바깥으로 슬금슬금 새어 나왔다. 불필요한 관계없이 산뜻하게 살고픈 욕구를 채우기가, 왜 이토록 힘들까. '쿨하고 초연한 인간'이 되는 길은 멀고도 멀어 보였다.




완벽한 인간관계에 대한 환상


쿨한 인간상 이전에 전인격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발단은 <프렌즈>였다. 영어 공부를 위한 주요 학습자료가 된 드라마지만, 사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속마음을 전부 내보이며 가끔 아웅다웅하나 곧 화해하는 사이좋은 친구들.


경쾌한 오프닝 음악만큼 드라마 속 인간관계도 경쾌하고 산뜻했다. 드라마를 보며 성인이 된 후의 나에게도 저런 관계가 생길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품고는 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하는 평생 친구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


미드 '프렌즈' 속 한 장면. 어릴 때는 이런 관계가 당연히 주변에 넘쳐날 거라 생각했다 @Flickr


머리가 굵어지고 인간관계 경험이 늘어났다. 드라마 속 세계가 어느 정도는 환상임을 깨달았다. 물론 어떤 시점까지 나는 인복이 넘치는, 꽤 운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 공감대가 맞아떨어지고 마음씨까지 따뜻한 여러 친구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친구들 역시 각자의 가정을 꾸리게 되니 물리적 거리가 생겼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나니 육아로 바빠 만남 자체를 성사시키기 어려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연락이 뜸해진 관계도 생겼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더없이 좋은 이들을 만났으나 마음을 전부 털어놓으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힘들었다.


<프렌즈>와 달리,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현실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애매한 관계와 쿨하지 않은 감정으로 들어차 있었다.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관계, 질척대는 마음이 넘쳐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변치 않는 우정과 친구에 대한 정의는 아름답지만 지극히 이상적인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 환상 속 관계를 나는 당연히 이루어야 할 무언가로 착각하고 있었다.


현실 속 인간관계는 TV 속 세상보다 변화무쌍하며 입체적이다. 우리의 우정은 변치 않고 영원하다는 성립하기 어려운 명제였다. 친하던 이들 역시 강물이 흘러가듯 때에 따라 합류도 하고 다시 갈라지기도 하며 시간은 흘러갔다. 현실은 마무리 OST로 즐겁고 경쾌하게 끝나는 드라마가 아니었다.




쿨하고 단호한 인간의 이상형



완벽한 인간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처럼 ‘쿨하고 단호하며 상처받지 않고 자존감까지 높은 인간형’ 역시 하나의 환상에 가까웠다. 인간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판단하며 혼자 있는 시간도 잘 견뎌내고 한결같이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사람. SNS나 매체에는 가득했으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 같은 게 아니었을까.


물론 관계에 지나치게 얽매여 자신의 자유를 찾기 어려운 사람에게 SNS가 제시하는 관계의 지침은 도움이 된다. 특히 에너지 뱀파이어나 가스라이팅 가해자에 끌려다니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다. 그러나 쿨한 어른이 되지 못하는 내 머리를 쥐어박는 중이라면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에 한해서는 누구나 조금씩 바보 같고 서투르다. 사람 간에 오가는 내밀한 감정은, 흘끔흘끔 뒷장을 살펴보면 답이 나오는 수학 문제집 같은 존재가 아니니까.

Room in New York(Edward Hopper, 1940) @wikiart


상처를 주고받을 만한 인간관계를 다 끊고 피한다고 해서 외로움과 고통이 0이 될 리도 만무하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다. 타인과의 상호작용 없이 고고하게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갈 사람도 많지 않다. 행복도가 높은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관계를 잘 맺고 있는 사람이라는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이런 면에서 꽤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뒤집어 말하자면 인간관계는 삶의 중요한 과제면서, 최대의 고민거리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렇다.


그러니 자존감 높고 인간관계에 쿨한 어른에 대한 환상이나 고정관념은 살짝 내려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홀로 살아가지 않는 한 누구나 상처받고 상처 입히는 관계를 지속한다. 오늘도 누군가는 관계를 정리하고 누군가에게 정리당하며 살아간다. 미니멀리즘은 바람직하지만 인간관계에 완벽한 미니멀리즘은 존재하기 어렵다. 억지로 쿨하고 초연한 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질척대고 부대끼며 살아간다.




오늘은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 대신, 이번에 나온 신간 속 글 한 꼭지를 올립니다. <어느 날 유리멘탈 개복치로 판정받았다> (부제 : 예민한 나를 위한 섬세한 대화 처방전)이라는 책이에요. 위 내용은 책의 추가 분량 중 한 꼭지인 '인간관계의 미니멀리즘'이라는 꼭지의 글입니다. 어제도 신간에 실린 글을 하나 올렸었어요 : )


다음 유형의 분들(아마도 저와 비슷한 유형인 분들)께 이 책을 권해 드립니다.


1. 대화 도중 쉽게 지치는 민감한 성격을 가진 분들

2. 완벽주의와 높은 기대치로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느끼는 분들

3. 무례한 대화에 사이다 킥을 날리고 싶으나 대신 이불킥을 날리는 분들

4. 나 자신과 하는 내면의 대화 때문에 도리어 무기력해지고 마음이 괴로워지는 분들


이런 분들께 (공감과 위로 + 덜 피로한 대화를 위한 작은 tip)을 건네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실 제가 어떤 시점 이후로는 청소년 책을 집필해 세상에 나와도, 이 공간에는 출간 소식을 올리지 않고 있어요(책 소식을 너무 자주 전하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이곳에 쓰는 글이랑 카테고리가 너무 달라서 구독하시는 분들께 괜히 민폐인 것 같아서요;;;) 그렇지만 이번 책은 에세이니까 알림 글을 꿋꿋이 올려 봅니다. 이웃분들이나 구독자분들 출간 축하 댓글도 굳이 막 달지 않으셔도 됩니다. (책이 자주 나오니까 솔직히 이것도 좀 민폐 같기도 해요;;;)

책의 온라인 서점 링크입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9213506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7784248&orderClick=LOA&Kc=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4268325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을 일부러 읽으러 오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오늘은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다다음주(5월 24일)에는 늘 그렇듯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에 글을 올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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