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이라 해도 우리가 이 드라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11회까지 방영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매주 목요일마다 재미와 행복을 선사하는 드라마다. 이 프로그램은 크게 자극적인 사건이나 갈등 없이도 드라마가 어떻게 시청자들에게 흡인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드라마를 시청하며 알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드라마 속 99학번 다섯 친구들은 실력을 인정받는 유능한 의사이며 인간미도 넘친다 -가장 냉정하다고 평가되는 흉부외과 김준완 선생조차 알고 보면 무척이나 다정한 의사다-. 일 때문에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다섯 친구들은 각자 자신의 취미생활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의 속마음을 가감 없이 터놓을 대학 친구들이 있다. 심지어 이 20년 지기 다섯 친구들은 함께 모여 밴드 연습까지 하며 일상의 크고 작은 재미를 찾아간다.
아무리 기준점을 달리해 생각해봐도 이 친구들과 내가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다. 비슷한 마흔 살 언저리인데 이렇게 삶이 다르다니! 사회생활과는 몇 년째 담쌓은 채, 중동에서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하루 종일 아이가 흘린 것을 열심히 닦아 내고 가족의 끼니를 챙기고 있는 내가 일순간 초라하게 느껴진다.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가진다는 양석형(김대명 분)조차 중동에서의 나보다 친구가 많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드라마의 인물들과 현실 속 나와의 괴리감이 지나치게 커서 탄식이 나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내 머릿속 생각을 거두어들인다. "이 드라마는 판타지야! 40세의 판타지!" 그렇다. 이 드라마는 판타지다. 이렇게 멋지게 사회생활, 취미생활 다 누려가며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는 40대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남들의 현실 속 인생도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기를 바라는 나만의 가련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인간 세계에 대한 판타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우연히 유튜브 채널을 돌리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이 드라마의 연출가인 신원호 PD가 출연한 장면을 본 적 있다. 신원호 PD는 '메디컬 드라마라고 하면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항상 그렇듯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건넸다.
어쩐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의 <응답하라> 시리즈와 전작인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떠올려보면 항상 이들은 '사람 사는 따뜻한 이야기'를 담담히 해내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평범하고 소박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들의 중심에 있었다. 비록 그 사람들이 감옥생활이라는 특수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역시 의사들의 훈훈하고 소박한 일상을 그려낸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것이 그리고 있는 배경의 측면에서 <응답하라> 시리즈와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
개인적으로 신원호-이우정 콤비의 '사람 사는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응답하라 1988>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1988년도에 존재했던, 그러나 21세기에는 존재하기 다소 힘든 이웃사촌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진주 엄마가 어린 진주를 옆집 친한 총각인 정봉이한테 잠깐 맡기는 일이 여러모로 거의 불가능하다. 생활공간이 분리된 아파트라는 주거방식이 흔하지 않았고, 세상이 덜 각박하며 이웃 간의 친밀한 정이 존재했던 1988년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어쨌든 <응답하라 1988>과 <슬기로운 의사생활>, 두 드라마의 배경은 차이가 있다.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은 이웃사촌이라는 '지역사회'인 반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병원'이라는 관료제적 집단을 배경으로 한다.
사회학자 페르디난드 퇴니스(1855~1936)는 사회집단을 결합 의지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눈 바 있다. 하나는 공동사회(Gemeinschaft, 게마인샤프트)라고 하여 본능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집단이다. 또래집단이나 가족, 이웃 등이 그 예인데 이 집단들은 친밀감, 인간미에 기초한 전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은 정서적으로 깊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다. <응답하라 1988>이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전형적인 공동사회에 해당한다.
퇴니스가 나눈 사회집단의 두 번째 부류는 이익 사회(Gesellschaft. 게젤샤프트)다. 이익 사회는 특정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집단으로 보통 전인격적인 관계보다는 이해타산적인 인간관계를 가진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모인 정당이나 학교, 회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병원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익 사회에 해당한다.
그런데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는 다분히 정서적인 결합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99학번 친구들이야 20년 지기 친구들이니 엄청난 친밀감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99즈의 관계 뿐 아니라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병원 식구들이 (천명태 교수나 명은원 선생 같은 몇몇 인물들 빼고는) 매우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의사들 간의 관계, 의사-간호사의 관계, 심지어 의사와 환자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늘 따뜻한 조언을 건네며 진심으로 환자를 걱정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다. 병원이라는 '환자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곳에서 만났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해타산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서로를 걱정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외과 조교수인 이익준(조정석 분)과 외과의 유일한 레지던트인 장 겨울(신현빈 분)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둘은 '일로 만난 사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친밀한 사이다. 장 겨울의 연애 상담은 물론이요, 반찬 나눠주기까지 두 사람은 흡사 아버지와 딸처럼 표현된다. 장 겨울이라는 레지던트가 아무리 귀한(?)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실제 대형병원의 조교수와 레지던트가 이렇게 전인격적인 인간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은 노릇일 것이다.
<응답하라 1988>와 같은 드라마는 이웃사촌이 함께 사는 동네를 배경으로 삼았기에 이런 정서적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다루고 있는 직장은 다르다. 많은 이들이 겪어 보았겠지만 현실에서는 '직장 동료들에게는 함부로 속을 내어주거나 내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조언이 난무한다.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는 협동이나 공감이라는 과정도 존재하지만, 많은 경우 험담이나 험담, 경쟁, 갈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래집단이나 가족처럼 전인격적 관계를 맺기에는 물리적 시간이나 여유가 부족하기도 하고, 그런 관계를 꿈꾸다가 오히려 '일하는 사이'마저 틀어지는 부작용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다루고 있는 병원에서, 그것도 서로 협업하고 분업하여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관료제적 집단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이 훈훈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전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인간적인 세계'에 대한 판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사랑받는 이유도 이 지점에 존재한다고 본다. '이익 사회'나 '관료제' 체계 속에서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전인격적 관계 맺기. 이것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만나는 직장동료에게 진심이 담긴 격려와 공감을 받고, 병원에서 의사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는 일. 실제로는 이런 관계 맺기가 참으로 쉽지 않기에, 우리는 이 드라마의 판타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