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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Sep 27. 2022

우주의 조그만 존재라는 위안

마음이 힘들 때  극약처방

우주의 먼지라는 위안      



  몇 달 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었다. 이웃 작가님과 단 둘이서 한 독서모임 덕분이었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완독을 이룬 뒤 느낄 뿌듯함과 새로운 지식을 채울 거라는 기대감. 거들먹거리는 상상도 조금 해봤다. 가령 지인들이 일상 대화를 나누다 태연한 얼굴로 “나 최근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읽었는데 말이야...”라고 내뱉는 상상. 사실상 현실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 일은 거의 없을 테지만 (심지어 일상 대화 나눌 만큼 사람을 자주 만나지도 않는다). 아무튼 시시껄렁한 상상을 하면서 혼자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책을 읽어보니 칼 세이건은 우주 덕후이자 훌륭한 이야기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독서의 중간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예상보다 기초 과학 지식이 부족한 인간이었다. 학창 시절에 과학 중에서도 지구과학 파트를 좋아하지 않던 기억도 떠올랐다. 책의 몇몇 부분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완독은 했지만, 아는 체와 잘난 척하는 상상은 조용히 거두어들였다.   


이해 못한 구석이 많지만 열심히 읽긴 함

 

그런데 이 700쪽이 넘는 이 과학책을 읽으며 의외의 수확을 얻었다. 마음의 위안이었다. 책 속 한 문장이 마음에 들어왔다.  "모든 인간사는, 우주적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요하기는커녕 지극히 하찮고 자질구레하기 까지 하다."는 길지 않은 글귀였다.      


  당시는 크고 작은 고민에 휩싸여 길을 헤매던 때였다. 이따금 마음속 고민과 괴로움이 걷잡을 수 없이 부피를 늘려, 압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창백한 푸른 점(지구) 속 작디작은 나'를 떠올려 보니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고민의 역사도 우주의 시간, 인류사의 흐름에 비하면 짧디 짧은 컷 -아니 한 컷의 몇 천만 분의 일도 안 될 분량이겠지-에 불과한 것 아닌가. 우주라는 거대한 존재 앞의 한 점 먼지가 되자, 의외의 위안이 찾아왔다.          

    


점으로 이루어진 질서와 균형의 세계, 김환기의 <우주 05-IV-71 #200>  


   

 한국 현대 미술의 중추적인 인물이며 추상 미술의 선구자라 불리는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 1913년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라는 섬에서 태어나 자랐다. 청년 시절 일본 도쿄의 니혼 미술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며 그림 공부를 하였다. 유학 당시 미술단체인 자유 미술과 협회와 ’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참여하며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김환기 화백과 그의 아내 김향안 여사 



 이후 귀국하여 1946년~1949년 사이에는 서울대학교 미대에서, 1952년에는 홍익대학교 미대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56년에는 마흔네 살의 나이로 파리로 향해 3년 간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1959년 한국에 돌아온 이후 홍익대 미대 학장의 자리를 역임했고, 미술협회 이사장 등의 자리를 맡아 한국 미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보인다. 추상미술의 특성을 보이던 동경 유학 시절에 비해, 해방 이후에는 산과 달, 항아리, 매화, 학 등의 우리 고유의 정서를 담은 소재를 활용해 작품 세계를 펼쳐나갔다. 한국의 자연적 정서를 담아낸 게 특징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서양의 관념과 달리, 자연에 귀의하는 동양인의 사상을 서양의 논리와 접합하며 새로운 세계를 구현해내기도 했다.  



해방 이후 작품인 '항아리'(김환기, 1959)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한국 예술계의 중심으로 활약하던 화가는 1964년, 돌연 미국으로 향한다. 그 직전인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참여해 '세계 미술'의 존재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김환기는 현대 예술의 중심지였던 뉴욕에 자리 잡고, 초심으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던 화가는 본질에 더 접근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구도는 갈수록 간결해졌고, 구체적인 형상보다 점과 선, 면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부터, 화면 전면을 점으로 채운 '전면 점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역시 이러한 전면 점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1970년)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단순히 점을 찍은 게 아니라 점 형태를 그리고 채우는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김환기의 친구이자 시인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라는 시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 시의 마지막 구절인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고향과 벗에 대한 그리움으로 화면에 점을 하나씩 채워갔던 화가의 열정과 애틋한 마음을 상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음 그림은 2019년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최고가로 거래되어 화제가 되었던 작품 <우주 (05-IV-71 #200)>(1971년작) 다. 김환기가 뉴욕 시절 제작한 작품으로, 규모가 큰 두 폭짜리 그림이기도 하다.       


<우주(05-IV-71 #200)>(김환기, 1971)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254cm × 254cm의 거대한 화면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품 속에는 푸른 점이 가득한데, 수많은 점들은 동그란 궤도를 따라 동심원을 만들고 있다. 어찌 보면 그 형태와 질서가 은하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네모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고, 그 안에는 서예용 붓으로 찍은 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동양의 수묵화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보통 수묵화에서 한지나 천에 점을 찍으면 그 점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번지는 효과가 난다. 김환기 역시 이러한 효과를 통해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해냈다. 

    

<우주>를 미디어 아트로 구현한 모습 @한경


작품 속 푸른 색도 눈에 띈다. 신비로우면서도 담백한 색. '환기 블루'라고도 불린다. 우주의 색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바닷가에서 자란 화가에게 있어 그리운 고향의 빛깔이기도 했다. 화가는 1957년 프랑스에서 개인전을 할 당시 방송국의 인터뷰에서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뿐 아니라, 동해 바다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1971년 제작된 이 작품은 오랜 지인이었던 재미동포 의사 김마태 씨가 사들여 40여 년 간 소장했다. 이후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0억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면서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실제 한국 근현대 미술품 경매가 순위를 보면 10점 중 9점이 김환기의 작품일만큼 그의 그림은 높은 가격을 기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놀라운 가격을 차치하고서라도, 점의 무수한 반복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세계는 감상자를 사로잡는다. 그림 속 점은 삼라만상의 우주 속 빛나는 별이 될 수도, 고향 바다의 잔잔한 쪽빛 물결이 될 수도, 그리운 고국에 있는 벗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석과 조화는 다양할 수 있으나, 제목 '우주'처럼 작품은 신비함과 서정성을 담고 있다. 미술사학자 김현숙은 김환기의 작품에 대해 "그림을 들여다보는 관객이 자신이 우주의 한 점으로 수렴되는 느낌"을 가지게 하며 감상자를 흡인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머릿속 상념을 덜어내는 하나의 점  



김환기는 작품을 제작할 때 "외로움도, 오만 상념도 점 하나에 찍어 보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뉴욕이라는 낯선 곳에서, 덜어내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무수한 점만 남았다는 그의 이야기. 더불어 생각해 본다. 내 머릿속 상념과 번잡스러운 고민도 덜어내고 지우며 하나의 점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걷잡을 수 없는 고민에 휩싸일 때,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불안이 비대해져 나를 집어삼킬 때, 웬만한 노력으로는 마음이 도무지 다스려지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 그 순간마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거대한 우주 속, 작디작은 하나의 점일 뿐이야.  마음 안정을 위한 일종의 극약 처방인 셈인데, 놀랍게도 이 주문에는 묘한 힘이 있다. 내 머릿속을 잠식하던 불안도, 헛된 기대도, 상처나 외로움도 아주 미세하고 작은 점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그렇게 덜어내고 지워내고 잘게 쪼개다 보면 미워하던 것,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하던 것들이 점차 사라진다. 나와 내 곁의 정다운 사람들, 그들과의 그리운 추억만 남는다. 작지만 특별하고 다정한 기억만이 자리 잡는다. 


 마음속과 머릿속에 거대한 혼란과 고통이 일렁거릴 때가 온다. 고민이 걷잡을 수 없이 덩치를 불리는 순간도 있다. 그때마다 마음의 극약 처방이자, 명명백백한 사실을 주문처럼 되뇌어 보는 건 어떨까. 나는 거대한 우주 속 질서를 이루는 작디작은 점 하나일 뿐이라고. '창백한 푸른 점'에 자리한, 작고 미세한 점이라고.   



-참고 자료-  


김현숙, 「수화 김환기의 종이작업(1967-73)」, 『Works on Paper: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갤러 리현대, 2013)

김현숙, 「색으로 본 김환기의 작품 세계」, 『미술이론과 현장(JATP)』, vol.0, no.3, pp. 155-172 (한국미술이론학회, 2005)

「김환기 ‘우주’ 132억 낙찰…한국미술품 최고가 ‘새 역사’」, 2019.11.23, 한겨레일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환기」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112




1. 다음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은 10월 11일(화)에 발행합니다. 

2. 이웃분들 글도 찾아가 읽고 싶은데(어제 오랜만에 이웃 작가님들 글 찾아가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네요;;;)오늘은 학교 강연 가는 일정이 있어서 내일 이후에 답댓글 달기도, 브런치글 읽기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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