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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Oct 11. 2022

인간사, 어차피 쪽팔림의 역사

쪽팔리면 좀 어때서?


인간사가 원래 쪽팔림의 역사야.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속 한 장면 @jtbc 캡처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보는데 대사 하나가 마음에 꽂혔다. 묘한 위로를 안겨주는 말이었다. 수치심과 싸우거나, 수치심에 지는 게 모든 인간의 역사 아닐까.


 내 쪽팔림의 역사도 꽤 깊고 오래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량 큰 내 목소리가 남의 귀를 거슬리게 한다는 게 창피했다(시끄럽다고 지적받은 경험이 몇 번 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작은 음성으로 말하려 노력했다. 극성스럽거나 눈치 없어 보이는 것도 부끄러워 말을 아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노력하다 실패한 사람으로 보이면 창피할 것 같았다. 게으른 천재 코스프레를 곧잘 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척을 하다가 집에 가서는 밤을 새우는 식으로. 직장 생활에서도 실수하는 사람,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 고군분투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창피한 일을 피하기 위해 눈치를 꽤 봤다. 바가지를 써서 억울한 일을 당한 걸 숨기려 했고, 어떤 때는 버스 하차 벨을 잘못 눌러도 기사님에게 타박받지 않으려고 잘못된 하차 지점에서 내리고는 했다.


부끄러움을 피하려 행동하니, 인생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할 때 문제가 드러났다. 되도록 아는 길, 편안한 길로 가야 창피할 일이 줄어드니 낯선 길은 가려하지 않는 성향이 자리 잡은 것이다. 실패할 것 같은 시험에는 애당초 도전하지 않았고, 잘 못할 거라 예상되는 운전이나 운동 종목은 손도 대지 않았다. 상대에게 거절당할까 봐 오랜 짝사랑도 고백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쪽팔리지 않으려고 창피함을 피하는 길을 따라 살다 보니 애초에 시도조차 못 해본 일이 많았다는 걸. 실패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다 내 인생이 지루하게 끝날 수도 있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쾌락과 미덕 사이에 서다,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 최고의 영웅인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다. 제우스가 영웅 미케네의 왕족 알크메네에게 몰래 찾아가 결합해 탄생한 인물로, 신(神)과 영웅의 후손답게 용맹과 지혜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헤라클레스가 남편 제우스의 아들임을 알게 된 본처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죽이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뱀을 목 졸라 죽이는 어린 헤라클레스>(조슈아 레이놀즈, 1786~1788)(좌)와 <헤라클레스와 히드라>(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15세기말)(우)



고대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크세노폰(Xenophon)의『회고록』에는 헤라클레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키타이론 산으로 보내져 양을 치며 지내던 헤라클레스는 18세 되던 해 아름다운 님프 두 명의 방문을 받게 된다. 두 님프는 각각 ‘쾌락(pleasure)’ ‘미덕(virtu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인생의 커다란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다.


쾌락은 헤라클레스에게 즐겁고 안락한 삶을 제시한다. 자신을 선택한다면 즐거움과 유흥으로 가득 찬 삶이 따라올 것임을 보장한다. 반면 미덕은 그에게 영웅으로서 불멸의 삶을 선택하기를 종용한다. 자신을 택할 경우 고난의 여정이 따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헤라클레스의 선택> (안니발레 카라치, 1596)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등 수많은 화가들이 인생의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18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폼페오 지롤라모 바토니(Pompeo Girolamo Batoni, 1708-1787)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가는 비교적 작은 규격의 캔버스 안에 영웅의 일화를 담아냈다.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 (폼페오 지롤라모 바토니, 1748)



 이제 갓 18세가 된, 소년과 청년 사이의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망설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무 그늘에 앉은 그의 왼쪽에는 욕망의 붉은 옷을 입은 ‘쾌락’이 자리 잡고 앉아 있다. 쾌락이 왼손에 들고 있는 가면은 기만에 찬 삶을, 오른손에 쥐고 있는 장미는 욕망을 따르는 인생을 의미한다. 그녀의 발치에 흩어져 있는 악보는 곧 터져 나올 스캔들을 뜻한다. 


쾌락을 선택할 경우 헤라클레스는 안온하지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삶을 누릴 것이다. 그림 속 헤라클레스의 마음은 이미 쾌락에 열려 있는 듯하다. 한쪽 팔을 그녀에게 기댄 걸 보면.


장미와 가면을 든 쾌락의 모습(좌)


헤라클레스 앞에 서 있는 인물은 ‘미덕’이다. 미덕은 지혜를 의미하는 여신 미네르바처럼 코린토스식 투구를 쓴 채 단호한 자세로 헤라클레스를 설득 중이다. 덕목의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먼 곳의 바위산이다. 이는 영웅의 길에 따르는 고난과 시련을 의미한다. 미덕의 길을 택한다면 험준한 산등성이처럼 시련으로 가득 찬 길이 헤라클레스를 기다릴 것이 분명하다.



미덕의 모습(좌)과 그가 가리키고 있는 바위산(우). 영웅 앞의 험난한 여정을 의미한다


젊은이에게 이득이 있는 선택지일까? 미덕을 택해 인생의 정면 승부를 거듭할 경우, 그는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며 불멸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다. 헤라클레스가 마주한 선택의 순간은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신화 속 영웅뿐 아니라 인간 역시 크고 작은 선택을 거듭하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극작가이자 할리우드 스토리텔링 이론의 권위자인 크리스토퍼 보글러(Christopher Vogler)‘영웅의 여정 12단계 이론’을 내놓은 적이 있다.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의 저자이자 폭스와 디즈니 등의 시나리오 컨설턴트인 크리스토퍼 보글러(좌)와 그가 이야기한 '영웅의 여정 12단계 이론(우)


대다수의 이야기에서 영웅이 될 인물은 평범한 생활을 하다 안락한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맞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웅은 소명 의식을 품은 채 기나긴 여정에 나선다. 이후 수많은 난관을 거듭하며 성장하고 새로운 인물로 거듭난다. 그리고 험난한 길의 끝에 마침내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다. 귀환하여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후, 영웅은 진정한 스승으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우리에게 익숙한 「반지의 제왕」이나 「어벤저스」와 같은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들이 이러한 영웅 서사의 패턴을 따르며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신화 속 전형적 패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단계가 첫 번째 과정이다. 안락한 안전지대에 살던 영웅은 처음에는 소명을 거부하나, 여정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계의 관문으로 출발한다. 출발의 과정이 없다면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불가능한 셈이다.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도 마찬가지다. 시련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전, 고뇌에 빠진 영웅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정에 나선 그는 네메아의 사자나 물뱀 히드라와 같은 괴물을 물리치고, 세상의 끝에 있는 황금 사과를 가져오는 등의 과업을 수행했다.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모험은 길고 지난하며 고독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헤라클레스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품은 인물이 되었고, 용맹과 지혜를 지닌 영웅으로 거듭났다.




인간사, 어차피 쪽팔림의 역사다



영웅의 인생은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와 접점이 없을까.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는 인간의 삶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때때로 인생의 평범한 안전지대를 택할 것인지, 새로운 길을 택하여 나아가며 편안한 일상과 분리되는 길을 택할 것인지 갈림길에 선다. 가보지 않았던 장소로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자격증에 도전하는, 얼핏 사소해 보이는 결정도 이 갈림길에서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시험이나 공모전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는 것, 창업을 한다거나 직업을 바꾸기로 마음먹는 것 역시 일정량의 용기가 필요하다. 갖가지 난관과 시련이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음에도 성장을 위해 안온한 길을 박차고 떠나는 것이므로. 인생의 스토리텔링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시도를 할 때 필요한 태도 중 하나는 ‘창피함을 견뎌내는 자세’다.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시도를 하며 서투르고 창피한 내 모습을 마주한다. 부끄러운 순간의 나를 견뎌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피함을 피하려 무언가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 예전의 나처럼.


서툰 내 모습, 실패한 자아가 남에게 드러날까 두려워 샛길로 피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창피함을 무릅쓰고 새로운 시도를 하며 깨질 때마다 얻게 된 것들이 있었다. 내 창피한 역사가 다른 이들에게 별거 아닌, 흘러가는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결과와 상관없이 내 시도 자체를 응원해주는 이들도 존재했다.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내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할 수 있는 데이터를 수집하게 된다. 나의 한계를 알게 되는 건 반드시 슬픈 일만은 아니다. 부족한 구석을 아는 만큼 다음에 어떤 방식으로 문을 두드려야 할지 깨닫게 되니까. 실패해도 그다지 큰일이 아님을 깨달으면 다음 시도도 쉬워진다. 나를 벗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수월해진다.


안전한 삶의 궤도를 벗어나 크고 작은 시도를 해보면 인생 여정이 지루하지 않다. 창피해질까 두려워 인생의 정면 승부를 피하고 싶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려도 좋다. 인간사, 어차피 쪽팔림의 역사다. 



 1. 요즘 강의 관련해 급한 일정이 있어서 새로운 글을 쓸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ㅠㅠ 그래서 신간 <그림의 말들>에 담긴 추가 분량의 글, 한 꼭지를 담아 발행합니다. (책 중 「쪽팔리면 좀 어때서?」라는 꼭지의 글입니다)


 저도 최근에 새로운 경험을 하며 서투르고 창피한 제 모습을 마주했어요.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지만, 실패하거나 창피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모두 흘러갈 일이고 남들은 내 일의 성패그닥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힘이 솟더라고요 : )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새로운 도전 거리가 있다면 너무 부담갖지 않고 시도하시길 응원드립니다.


2. 다음 글은 11월 25일(화)에 발행합니다. 다음 글은 꼭 새로운 내용으로 발행해서 만나 뵐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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