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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Oct 25. 2022

힘빼기의 묘미

최선을 다해도 최고의 결과가 따라오지 않을 때

최선의 노력이 나를 배신할 때    



 24살,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의욕이 충만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빠른 시간 안에 업무에 능숙하고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열의는 금세 과몰입으로 변했다. 퇴근 후나 주말에도 일 생각을 놓지 않았다. 주말 하루는 수업 준비에 꼬박 썼고, 퇴근 후나 쉬는 날에도 내일 할 일, 학급 아이들에게 해야 할 말을 끊임없이 궁리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업무 매뉴얼을 홀로 작성할 때도 있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경력을 쌓아 가면, 웬만한 일은 쉽게 해치우는 노련한 직장인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연차가 쌓일수록 기대는 어그러졌다. 최선을 다할수록, 노력의 강도를 강-강-강-강으로 유지할수록 업무량이 늘어났다. 실수가 잦아졌고 한계도 느껴졌다. 기대치만큼 내가 능숙하고 노련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노력이나 열정에 비례해 보상이 주어지기보다 도리어 더 많은 업무가 가중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런 게 직장생활의 논리 중 하나임을 어렴풋이 깨닫자, 허탈한 마음이 찾아왔다.   


 허무한 마음을 품고 20대 후반이 되어 주위를 둘러봤다. 직장 생활에 노련한 이들은 어떤 비결을 갖고 있는 걸까? 몇몇 능숙해 보이는 직장 선배들을 살펴보니 그들만의 특징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일을 할 때 노력을 기울이지만, 모든 시점과 구간마다 힘을 주거나 열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가령 학생들 생활지도를 한다고 하면, 꼭 필요한 순간에만 아이들의 일에 개입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적당히 기다려 줄 줄 알았다.


 업무에서도 비슷했다. 어떤 영역에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적당히 힘을 뺄 줄 아는 이들이 있었다. 일의 완급조절이 되는 이들. 힘을 다해 달려야 할 구간과 어슬렁어슬렁 걸어가야 할 구간을 구분하며 일을 지속하는 이들. 그런 이들이 대체로 현명하게 직장 생활을 이어나갔다.  


 학창 시절에는 최선을 다하라는 이야기를 주로 들어왔다. 그렇게 노력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성과가 올 거라는 논리를, 은연중에 익히고 배워왔다. 경험해보니 전 속력으로 모든 구간을 달리는 게 반드시 바람직한 건 아니었다. 업무 하나를 끝낼 때에도, 직장 생활 속 인간관계를 맺을 때조차 강약의 조절이 필요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던 진리를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세 개의 머리가 의미하는 것, 티치아노의 <신중함의 알레고리>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라 불리는 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90년경~1576). 북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신성로마제국 경계 사이에 있는 산악 마을, 카도레에서 태어난 예술가다.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자화상


어린 시절인 1500년경에 베네치아로 향한다. 당시 베네치아는 경제적•정치적 전성기를 구가하던 곳이었다. 티치아노는 이곳에서 모자이크 장인인 주카토의 제자로 그림 수업을 시작했다. 이어 젠틸레와 지오반니 벨리니 형제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동문인 조르조네의 조수로서 벽화를 남기기도 했다.


 1513년부터 자신의 작업장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518년에는 베네치아에서 두 번째로 큰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 걸릴 <성모승천>이라는 제단화를 완성했는데, 높이 7미터에 가까운 이 작품은 그의 이름을 베네치아 대표화가로 널리 알리는 발판이 되었다.


성모승천 (베첼리오 티치아노, 1518)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승천하는 성모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아래에는 사도들이 위치해 있고, 화면의 가장 위쪽에는 성모를 맞이하는 성부가 있다. 성모의 옷차림새 중, 베네치아의 색이라 불리는 깊은 빨간색이 눈에 띤다. 색채만으로 성스러움과 아름다움, 생동감을 드러내는 것이 티치아노 작품의 특징이었다.


 이후 티치아노는 종교화, 역사화, 초상화, 여성 누드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긴다. 특히 그가 그린 초상화는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티치아노 작품을 가졌다고 자랑할 수 있는 보통 사람은 없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교황 바오로 3세와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그의 동생 오타비오 파르네세(티치아노, 1546)


베네치아 사람들 뿐 아니라 인근 도시 국가의 왕족과 귀족들이 앞 다투어 그림을 주문했는데, 이는 그의 초상화가 단순히 인물을 현실보다 미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델이 캔버스 안에서 영원한 삶을 얻는다고 느껴질 만큼 인물 묘사가 생생했다. 국제적인 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티치아노. 고전이나 신화 속 인물들을 그려내거나 종교화를 제작하는 데에도 그는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제작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흥미로운 해석이 존재하는 작품이 1565년작 <신중함의 알레고리>다.


신중함의 알레고리(티치아노 베첼리오, 1565)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세 사람의 머리다. 오른쪽을 바라보는 젊은 청년이, 가운데 정면을 보는 장년의 사내가, 왼쪽에는 노년의 인물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이 노년의 얼굴이 화가 티치아노의 모습(화가의 자화상과 유사한 모습이기에 추측 가능한 부분이다), 가운데 장년의 인물은 티치아노가 아꼈던 아들이자 조수였던 오라치오, 오른쪽 젊은이는 먼 조카뻘인 청년이자 총애하던 제자였던 마르코라는 이야기가 유력하다.


 세 인물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의견이 오갔으나 대체로 인간의 각기 다른 시대를 나타낸다는 에르빈 파노프스키(20세기 독일 출신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의 의견이 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의 과거를 노년의 모습으로, 현재의 강렬한 모습을 장년으로, 희망에 찬 미래는 청년의 모습으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세 연령대의 사람은 인간의 세 시간대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들 아래에 자리 잡은 세 동물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기대로 가득 찬 오른쪽 개의 머리는 미래에 벌어질 희망과 기쁨을 상징한다. 가운데에 맹렬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자는 현재를 가리킨다. 현재를 헤쳐 나가는 데에는 강렬한 추진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왼쪽을 보는 과거는 늑대의 머리를 의미한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신중함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동물의 모습은 헬레니즘 시대에 많은 이들의 숭배를 받던 지하 세계의 신, 세라피스의 상징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라피스는 뱀의 몸통에 머리가 셋 달린 짐승을 데리고 다닌다. 이 역시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시대의 신 '세라피스'의 모습. 세라피스의 왼쪽 아래에 세 개의 머리가 달린 동물의 모습이 보인다.  

 

 <신중함의 알레고리> 속 머리 위에는 희미한 글자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에 신중하게 행동하고, 미래에 경거망동하지 않도록’이라는 글귀다. 어쩌면 그림을 그릴 당시 이미 노년에 접어든 화가는 ‘노인의 경험과 지혜를 존중하며, 신중함을 꾀하라’는 메시지를 후대의 사람들에게 은근히 전하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화가의 의도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림은 중요한 교훈을 건넨다. 미래에 대한 예지와 희망, 강력한 행동력, 그리고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 모두 신중함을 얻기 위해 중요한 덕목임에 분명하니까.


        

일의 강약 조절이 필요한 순간       



  <신중함의 알레고리> 속 교훈은 인간의 시간 속 흐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꿈을 향해 달려가거나 업무를 수행할 때에도 비슷한 세 개의 구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떤 일이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시동을 거는 게 좋은 단계가 있다. 앞뒤 재지 않고 맹렬한 행동으로 일을 추진해 나가야 하는 시기도 존재한다.  그러나 때로는 과거의 경험을 되짚으며, 늑대와 같이 힘을 빼고 어슬렁어슬렁 과거가 선사해준 지혜를 되짚어야 할 시기도 돌아온다.


 피아노 연주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한 곡을 칠 때 모든 구간에서 건반을 강하게 두드리는 건 연주를 망치는 길이다. 그래서 건반을 강하게 내리쳐야 하는 구간과 살짝 두드려야 할 구간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노하우가 된다. 이 노하우를 쌓으려면 반복과 경험, 적당한 연구가 필요하다. 경험을 쌓아가야 비로소 나다운 곡의 해석도, 변주도 가능한 법이니까.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노력과 열정의 강도 높이기’가 최선이라 생각해오던 나는, 특히 힘 빼기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힘을 빼며 어떤 일을 지속한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글쓰기를 꽤 오랫동안 지속하며 최근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힘빼기' 노력과 성과가 반드시 비례할 거라는 기대감을 조금 내려놓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거리를 둔다는 의미 아닐까.


 노력을 쏟은 만큼 엄청난 결과가 나올 거라 기대하면  오히려 결과에 대한 부담 때문에 시도 자체가 힘겹고 부담스러워진다. 세상 대부분의 영역은 노력에 비례해 성과가 주어지는, 완벽하고 공정한 세계가 아닌 경우가 대다수니까. 노력치에 비해 형편없는 결과를 마주하며 허탈감을 느낄 때도 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다 쉽게 기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새로운 일에 시동을 걸거나, 현재를 바라보며 맹렬하게 달릴 때에는 적당한 기대감과 최선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가끔은 그렇게 부풀어 오른 마음을 빼고 달리기의 속도를 늦추는 힘빼기의 구간도 필요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직구와 변화구를 끊임없이 던져보는 시도가 되려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꿈을 향해 걸어가거나, 일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강약 조절과 완급 조절이 필수다. 희망을 품은 개, 맹렬히 포효하는 사자, 지혜를 발휘하는 늑대의 모습을 모두 오고 가는 것. 그것이 신중함과 성숙함을 동반하는 길 아닐까.   



다음 글은 11월 8일(화) 저녁에 발행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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