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함부로 규정짓는 건 위험하다
초등학교 2학년 당시 성적표에 “수줍어하고 소극적이며, 발표력이 떨어진다”는 글귀를 받아 본 적이 있다. 담임 선생님의 냉정한 평가였다. 소극적이라는 단어의 파급력이 강했는지,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발표를 잘 못하고 소극적인 아이로 여겼다. 발표의 기회가 있으면 움츠러드는 식으로 행동했다.
그런데 3학년이 된 후,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한 번은 옆 반 선생님이 보강을 들어오셨다. 시간 때우기였는지 일종의 테스트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선생님이 퀴즈를 하나 던질 테니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사람은 손들어보라’는 질문을 던졌다. 마흔 명쯤 되는 반 아이들 중에서 손 든 것은 나뿐이었다. 질문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질문의 답은 ‘주시경’이었다.
열 살의 나는 자신만만하게 정답을 말했다. 선생님의 칭찬이 이어졌고 아이들도 감탄의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자부심이 차올랐다. 더불어 내 안의 관종끼를 발견했다. 아, 남 앞에서 나대며(?) 말할 때 즐거움을 느끼는 인간이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는 체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로군.
다행히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뒤, 약 10년간 그 ‘아는 체하고 싶은 끼’를 마음껏 발산했다. 그런데 일을 오랫동안 쉬고, 글을 쓰고, 마흔 쯤 되어 깨달았다. 남 앞에 나서서 말하는 걸 민망해하고 수줍어하는 내가 내면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심지어 몇 년 만에 학교 강연을 갔을 때는 부끄럽고 떨린 나머지, 강연 전부터 우황청심환을 들이키는 나를 발견했다. 수줍음 때문에 강연이 반쯤 실패로 돌아간 때도 있었다. 한동안 '이렇게 변한 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했다고 생각해서 조금은 침울해지곤 했다. 드라마 속 침울한 배역 1을 연기하듯,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스스로를 규정했던 다양한 생각이, 대부분 착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잘난 체하고 으스대는 걸 좋아하던 인간도, 수줍어하거나 음울했던 인간도, 그냥 나였다. 상황 따라 기분 따라 나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스스로를 끊임없이 규정하면서 과도하게 슬퍼했다가 기뻐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슬퍼해도 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이 정도는 괜찮게 넘기는 사람이라 여겨 억지 밝음을 연출하거나, 반대로 밝은 기분을 마음껏 표현해도 되는데 ‘나는 우울한 인간이었지’라는 생각에 갑자기 멈칫한 적도 있다. 자아 탐색을 넘어서서 밝음과 어두움, 성실과 게으름, 다정함과 차가움 따위의 단어로 선을 긋고, 그 구획 속에 스스로 가두고 있었다.
한 여인이 캔버스 안에서 웃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라 불리는 그림, <모나리자> 얘기다. 그림에 관심이 있건 없건 모두가 알고 있는 핫한 아이콘. 루브르 박물관에 수많은 인파를 몰려들게 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이다.
그림은 피렌체의 부유한 귀족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모나리자의 mona는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고, lisa가 조콘다 부인의 이름이라고 한다.) 작품의 인지도에 비해 세세한 정보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 둘러싸인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여인의 눈썹이 없는 이유만 해도, 미완성작이라는 설, 당시 눈썹을 뽑는 일이 여성들 사이에 유행이라는 이야기, 눈썹을 그렸으나 화학반응을 일으켜 그 부분이 사라지거나 떨어졌다는 설 등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많은 이들이 작품을 보며 질문을 던져 봄직 하다. 그림 속 여인의 미소에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걸까? 저 미소가 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라 불리는 거지?
그림의 감상은 개인에 따라 다르겠으나 많은 이들이 모나리자의 표정에서 그 답을 찾는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에는 살아 있는 듯한 눈빛과 알 듯 말 듯 한 미소가 관람자를 사로잡는다. 200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 연구팀이 모나리자의 입술의 굴곡, 눈가의 주름 등 얼굴 부위의 움직임을 수치화해 분석해 보았다. 감정 인식 소프트웨어를 통해 연구를 한 결과에 따르면 모나리자의 83%에는 행복의 감정이 담겨 있었으나 불쾌함(9%), 두려움(6%), 분노(2%) 정도의 미소가 고루 담겨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행복의 미소'라 단정 짓기 어려운 표정이다.
작품 속 다채로운 감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 답을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찾는 이들이 많다. 스푸마토는 이탈리아어로 ‘흐릿한’ 내지는 ‘연기처럼 사라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다.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얼마 후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 연기와 공기의 경계가 흐릿하고 모호해지는 걸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공기 중에는 먼지와 수분 분자가 가득하다. 이 분자들이 빛의 산란작용을 일으켜 거리가 멀어질수록 형태를 흐릿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경계, 또는 하나의 색채에서 다른 색채로 이어지는 경계가 흐려지고 모호해지는 게 스푸마토 기법의 핵심 원리다.
다른 화가들이 물체와 물체의 경계를 이루는 윤곽을 선으로 나타낼 때 다빈치는 스푸마토 원리를 그 경계를 흐릿하게 문질러 처리했다. 모나리자의 표정을 살펴보면 배경과의 모델과의 경계, 모나리자의 미소를 살펴보면 눈이나 입 주변에 예리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화가는 인물의 표정을 안개처럼 흐릿하게 처리함으로써 그 미소를 한 가지로 단정 짓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작품은 신비롭고 흐릿한 매력을 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보는 관람자의 상황, 위치, 감정 상태에 따라 모나리자의 얼굴은 수시로 바뀌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게 되었다. 작품의 아름다움은 명확함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영역에서 다양한 해석과 매력이 생겨난다.
가끔은 나를 해석하는 데에도 가끔은 스푸마토 기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해석하고 규정하다 스스로를 부자유 속에 가두기도 하니까.
처한 상황뿐 아니라 감정이 우리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심리학 전문가 분께 '순간의 감정'과 ‘나’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령 ‘무기력한 감정 상태’를 겪은 뒤 ‘나는 무기력한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것, 잠깐 슬펐다고 해서 나를 ‘슬픔에 가득 찬 인간’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것. 얘기를 듣고 삶의 경험을 뒤돌아보니 내 문제도 늘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기고는 했다. 순간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나를 자꾸 판단하고 구획하면, 자신감이 떨어지고는 했다. 내 가능성과 특성을 판단하고 그에 맞춰 행동하다 보면, 정말 그저 그런 인간이 되기도 쉬웠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자아 탐색의 순간에도 '인간이 입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를 수시로 언어의 틀로 구획하고 규정하고 평면적으로 해석하면 위험해진다. 한 번 윤곽선을 그리면 그 구획을 벗어나기 어려우니까. 한두 번의 실패나 잠깐의 감정으로 스스로를 확신하고 규정하면 그 안에 갇히기 쉽다. 경계를 벗어나기도 어렵고 지루한 인간이 되기도 쉽다.
살아 있는 인간은 늘 변하게 마련이다. 엉망진창으로 굴다가 한 순간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슬픔에 가득 차다가도 한순간 기쁨의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실패를 거듭하다가 성공이라는 발판 위에 서 있기도 하는 존재니까. 한결같이 슬프거나, 늘 명랑하거나, 24시간 내내 훌륭하게 굴거나 인생 내내 성공이나 실패만 거듭하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 끊임없이 나를 탐색하고 규정하고, 언어의 틀에 가두며 도리어 괴로워지고 있다면 잠깐 그 탐색을 멈추어도 좋다. 흐릿하고 모호한 경계, 다양한 해석이 오히려 다채로운 삶을 선사하기도 한다.
1. 오늘 가족여행에서 돌아오느라 늦은 시간에 글을 발행했어요. 죄송하다는 말씀드려요. ㅠㅠ
그리고 한 해 동안 글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읽어주신 분들이 계셔서 2022년에도 무사히 글을 발행할 수 있었어요. 연말 평안히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좀 더 부지런히, 즐겁게 글을 발행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다음 글은 2023년 1월 10일(화)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