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런 건 없지만
‘인간 폭포수’가 된 거 아닐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는 느낌이 들던 때. 해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막 귀국한 시기였다. 코로나로 1년 넘게 사람을 잘 만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터라, 다정한 이들과의 관심 어린 대화가 간절했었다.
사람들과 많은 약속을 잡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지만(남편이 아직 귀국하기 전이라 혼자 육아를 하고 있었고 당장 써야 하는 원고가 있었다) 그래도 가능한 시간 안에서 꾸준히 약속을 잡았다. 원래 알던 지인들도 보았고 글 쓰며 만난 브런치 이웃들도 만났다. 가끔은 출판사의 편집자분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누군가를 볼 때마다 말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다. 대화에 굶주린 사람인 양.
정해진 시간 안에 지금껏 못한 말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가끔은 상대나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오랜 지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관심사 밖에 있는 글 쓰는 얘기, 책 얘기를 하거나(확실히 글쓰기나 독서는 관심 없는 입장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주제일 수 있다), 편집자들을 만나 육아의 고달픔을 털어놓는 식이었다.
아무 말 대잔치의 풍경을 펼쳐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스산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한참 하고 왔는데도 마음이 허기졌다. 더, 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야 되는데. 공감과 위로를 더 많이 주고받고, 관심사를 더 많이 공유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더 많이 기대고 싶은데. 오늘 만남에서 난 왜 그렇게 못했을까? 어째서 나란 인간은 한결같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걸까. 인간관계나 외로움에 대한 글을 수없이 많이 썼음에도, 이 분야는 여전히 내게 미해결 과제였다.
의문도 솟았다. 내가 이토록 외로움에 속수무책, KO패 당하는 사람이었나. 아는 사람 적고, 홀로 글쓰기에만 몰두하던 해외에서는 충분히 그랬을 수 있다. 그러나 해외 이주 전 한국에서의 나는 늘 사람들 틈에 있었고, 혼자 있는 걸 힘들어하거나 외로움에 취약한 부류도 아니었다.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며 귀국했지만, 예상이 빗나가고 있었다.
이 현상의 원인이 뭘까 헤아리는 데 한동안 골몰하기도 했다. 어느덧 마흔 살에 접어든 나이 듦의 결과인 걸까? -그래, 이제 내가 적은 나이는 아니긴 하지-. 아니면 혼자 있어야 해결되는 글쓰기를 쉴 틈 없이 하는 부작용? 그것도 아니면 예전 해외에서의 고립된 생활이 불러온 마음속 혼란인 건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봤지만 답은 하나로 축약되지 않았다. 확실히 알게 된 건 단 하나, 마음 구멍의 존재였다. 내 마음에 전에 없던 구멍이 생겼는데, 도무지 메워지지 않았다. 바깥에서 구멍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팀 아이텔(Tim Eitel. 1971~). 독일의 예술가다.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다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
대학 시절의 공부 덕분인지 그의 작품에서는 인문학적 시선과 독특한 분위기를 읽어내는 이들도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문학자이며 문학평론가인 고(古)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난다, 2013)와 신형철 작가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표지 그림 등으로 아이텔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팀 아이텔이 속한 신라이프치히 화파는 한 때 독일 동부의 도시 라이프치히를 배경으로 자라난 작가들을 일컫는다. 독일 통일 이후, 새로운 매체가 속속 발전하는 가운데에서도 전통 회화 장르를 꿋꿋이 지키는 경향을 보인다. 동독에서 비롯된 구상의 전통과 서양 예술의 추상화의 전통이 뒤얽힌 그림을 그리는 게, 이들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팀 아이텔의 작품은 신비롭고 고독한 분위기로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뒷모습으로 존재하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흐릿하게 표현된 인물들이 눈에 띈다.
익명의 외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는 면에서 얼핏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연상되기도 하나, 아이텔의 작품 특유의 개성이 있다. 배경이 선과 면 등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구성된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 인물을 빼놓으면 추상화처럼 느껴지는 그림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일면 건조하게도, 무덤덤하게도 느껴지는 게 작품의 특징이다.
무엇보다 아이텔의 그림을 보면 ‘고독(solitude)’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림 속 인물들은 홀로 서 있거나 여러 명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상호 소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과 긴장감이 감돌기도 한다. 현실과 그림이 겹친 듯한 초현실적 풍경. 관람자는 그 풍경 앞에 홀로 선 그림 속 인물에 자신을 이입해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모든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배경과 인물 모두 닫힌 이야기를 품지 않고 흐릿하거나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림은 보는 이에게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관람자는 그림을 보며 외로움, 소외감, 고독함을 느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아이텔은 코로나 당시 국내 언론과의 한 인터뷰에서 그가 생각하는 ‘고독’을 언급하기도 했다. “사회적인 교류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은 고통스러우나 때로는 필요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고독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매일 온라인과 모바일로 소통하면서 자신을 잃을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관련 기사) 고독의 순기능도 역기능도, 그의 작품 안에서 모두 느낄 수 있는 셈이다.
인터뷰 내용을 접한 뒤 그의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작품 속 인물은 여전히 고립되어 보인다. 어떤 순간에는 다소 불안해 보이고 고민에 휩싸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물들이 홀로 선 시간 속에서 고통에만 둘러싸인 것 같지는 않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사색이나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창밖의 풍경이나 전시관에 걸린 그림이 그들의 사색을 돕는다. 떠들썩한 분위기나 사람들 안에서는 온전히 느낄 수 없는 투명한 감각. 그림 속 인물들은 그 감각을 쌓아가는 중 아닐까.
아이텔의 말대로 고립감과 소외감은 고통스러운 마음을 가져온다. 그러나 고통은 또 다른 생각의 틈을 여는 창문이다. 삶의 가장 큰 역설이자, 한편으로 위안이 되는 사실 아닐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사람들을 만나던 어느 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옛날의 내가 타인의 온기만으로 외로움을 채우는 사람이었던가. 외부의 누군가가 먼저 내 마음 구멍을 메워주기를 바랐기에 그토록 외로웠던 건 아닐까. 내가 나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기에 외로웠던 거 아닐까.
질문이 여기에 미치자, 혼자만의 외출을 감행해야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를 조금 줄였다. 마음에 허기가 돌 때마다 전시회를 가거나 서점에 들르면서, 나만의 속도를 다시 찾아보려 노력했다. (오랜만에 하는 것이라 처음에는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했다. 예전과 달리 노력이 필요했다) 마음껏 걸을 수 있는 장소를 누볐고, 광화문 거리를 돌아다녔다. 남편이 귀국하고 나서는 이전보다 여유가 생겼다. 이따금 홀로 작은 숙소를 잡아 1박을 한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다.
홀로 외출이라 해도 마음속 원칙은 세웠다. 머릿속으로 뇌까리는 말이라 해도, 절대 나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최대한 친절하게 군다는 게, 제1의 규칙이었다. 앞뒤로 여닫는 문을 옆으로 밀어댄다던가, 내비게이션 앱을 보며 걸어도 길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연발해도, 최대한 너그럽게 스스로를 구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도 최대한 친절하게 던진다. 음식 한 입, 커피 한 잔을 먹더라도 나에게 세심하게 취향을 물어봐준다.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고 싶은지도 끊임없이 묻는다. 홀로 식사 중에는 스스로를 재촉하지 않는다. 내 속도로 음식의 맛을 최대한 음미한다. 20대 시절에는 홀로 앉아 음식점에서 비빔밥이나 파스타를 먹는 날 흘긋흘긋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가끔은 있었지만, 혼밥이 일상화된 지금은 그렇지도 않아 편하다.
평소엔 드러내지 않는 취향도 부끄러움 없이 즐기는 게 또 다른 규칙이었다. 나는 평소에 사람들과 만날 때는 나만의 취향이나 성향을 뾰족하게 드러내는 편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에는 대체로 명랑하고 적당히 원만한 날 보여주는 편이다 (가식은 아니고 사람들 만날 때의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다)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조금은 느릿하고 씁쓸한 음악을 좋아한다. 그런 음악을 들으며 생각에 잠겨 발 닿는 대로 거리를 돌아다니자, 마음의 생기가 조금씩 찾아왔다.
홀로 외출의 순간. 나만의 속도로 걷는 순간. 그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면, 데이터를 쌓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꺼리는지,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고픈지 답을 구할 때마다 쌓이는 감각이 있다. 타인의 요구사항이나 욕구가 끼어들지 않은 투명한 감각이다. 이 감각을 데이터로 차근차근 저장해 두면, 훗날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 있을 때 나에게 맞는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물론 현재의 내가 ‘외롭지 않은 나’로 변신했다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 여전히 스산하고 허기진 마음이 종종 찾아온다. 사람을 만나면 인간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다. 원고를 쓰다가 ‘아 근데 너무 외롭다’는 말을 습관처럼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주 미세한 변화는 생겼다. 밑 빠진 독에는 여전히 마음 구멍이 있지만, 그 크기가 예전에 비해서는 줄었다는 것. 마음 구멍을 스스로 채울 수밖에 없음을, 때로는 구멍을 메우지 못하더라도, 그대로 홀로 안고 걸어가야 한다는 걸, 나는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다음 매거진 글은 5월 2일(화) 저녁에 발행합니다. (어쩌면 글 쓸 시간이 부족해서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매거진 글을 올릴지도 모르겠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