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적 없는 이들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다. 직장 동료였던 언니가 무작정 가보자고 제안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꼭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언니가 말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4호선을 탔고 익숙한 역에 내렸다. 몇 년 전 일한 적 있는 도시, 안산에서 자주 드나들던 역이었다.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몇몇의 사람들이 속삭이는 걸 빼면 비교적 조용한 광경이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서성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교사의 영정 앞에 가서 절을 했다. 우리에게 고인의 아버지가 다정하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우리 아이와 어떻게 아시는 사이이신가요. 뭐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언니와 나는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둘러대고, 다급히 자리를 나왔다.
2014년 봄, 여느 때처럼 제주도로 향하는 배를 타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학여행을 위해, 일을 하러, 섬으로 이주를 하러 사람들은 배에 올라탔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배가 가라앉았고, 그곳에서 나오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그 해 봄, 쉴 새 없이 뉴스가 이어졌다. 한 학교의 이름이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생경하지 않은 이름의 학교였다. 교사로 임용된 후 셋째 해까지 그 도시의 한 중학교에서 일을 했다. 내가 근무하던 곳의 중학생들이 진학하던, 익숙한 이름의 고등학교 중 하나였다.
내가 해당 학교에서 근무를 했던 것도, 직접 가르치던 아이들이나 지인들이 그 배를 탄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다리 건너 아는 누군가가 그 배에 타고 있었다는 이야길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건너 건너’ 아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조금 묘해졌다. 몇 가지 상상도 해보았다.만약 내가 그 도시에 남아 근무를 계속했더라면, 만약 그 도시의 그 학교에 발령이 났더라면, 만약 그 고등학교에서 2학년을 맡았더라면, 아마 별 다른 이유 없이 나는 그 배를 타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를 몇 번 거쳐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대부분의 이들이 비슷한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옛 직장 동료들 모임에서 누군가 물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배에 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배에 탄 담임이었다면 반 애들에게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했을까, 빨리 배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했을까? 길지 않은 물음에 무거운 생각이 이어졌다.
나는 늘 안전한 선택, 누군가가 내리는 지시를 따르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아이들에게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라고 얘기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안전하다 생각했을 선택지가 가장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켰을지 모른다. 상상이 나쁜 결론으로 치닿자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머릿속 물음에 답한 순간, 그건 이미 타인의 일이 아니었다. 4월의 어느 날 무작정 장례식장에 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타인의 아픔에 둔감하던 나였다. 스무 살 무렵, 친구가 가족의 비극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던 자리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멀뚱히 앉아 있던 건 나뿐이었다. 내 아픔을 제대로 느껴본 적없었으니 누군가의 아픔은 더욱 헤아리지 못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아픔을 내 앞에서 쏟아 내거나 눈물을 흘리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곤 했다.(지금도 조금은 그렇다)
그러나 2014년의 사고는 달랐다. 나는 안산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몇 번의 만약을 거쳤다면, 어떤 선택을 달리 했으면 나 역시 그 배에 타고 있었을 거란 상상이 가능했다. 어쩌다 보니 그 배에 탄 이들 앞에 불행이라는 녀석이 당도했을 뿐이었다. 그날, 그 배에 탄 것이 나였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임을 깨달았다.
감정의 소용돌이,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19세기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다. 안타깝게도 낙마 사고로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으나 그 짧은 생 안에서 강렬한 작품을 여럿 남긴 인물이었다. 화가는 학창 시절부터 승마와 그림을 즐기며 자라났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초상화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제리코는 아카데미 화가 피에리 게렝에게 고전주의의 구성법과 조형법을 배웠다. 그러나 이성의 눈과 절제된 균형을 강조한 고전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화가는 프랑스혁명 이후 궁전에서 미술관으로 변신한 루브르에 수시로 방문해,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그림을 연구했다.
제리코는 점차 인간의 뜨거운 감정에 닿는 그림의 길로 들어선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뒤, 1812년 <돌격하는 샤쇠르>로 파리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힘찬 붓놀림으로 역동적인 장면을 그려내는 데 주력했다.
돌격하는 샤쇠르(테오도르 제리코, 1812)
이후 1819년작 <메두사호의 뗏목>으로 다시 한번 살롱전에서 입상한다. 훗날 제리코의 대표작으로,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그림이었다.
메두사호의 뗏목(테오도르 제리코, 1819)
작품은 1816년 벌어진 실제 사건인 메두사호의 비극을 배경으로 한다. 아프리카 세네갈로 향하던 메두사호는 암초와 부딪혀 대서양 연안의 모리타니 해안 근처에서 좌초 위기에 빠진다. 선장을 포함한 상급자와 고위 인사들은 구명선에 탔고, 신분이 높지 못한 이들이나 군인이었던 150여 명은 구명선에 연결된 뗏목에 가까스로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구명선에 탄 이들이 밧줄을 끊어버렸고 150여 명은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식량도, 구호물품도 없었다. 바다 위의 고난 앞에서 많은 이들이 이성을 잃었고 폭동이 일어났다. 희생자가 속출했다. 추위와 배고픔이 이들을 덮쳤고, 죽음이 이어졌다. 몇몇 이들은 죽은 이들의 인육을 먹으며 굶주림을 채웠다. 한없이 고된 13일을 거친 뒤, 뗏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10여 명 남짓이었다. 프랑스 전체가 이 사건으로 한동안 들썩였다.
제리코는 이 메두사호의 사건을 다루기로 결심했다. 화가는 생존자들을 찾아가 당시의 상황을 꼼꼼하게 들으며 그림을 구상했다. 실제 시체안치소에 방문해 죽음에 이른 이들의 신체를 관찰하며 치밀한 연구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716x419cm 크기의 거대한 화폭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 탄생했다.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 습작들
작품 속에는 절망과 희망이 함께 담겨 있다. 뗏목 위 화면 오른쪽에 배치된 이들은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한 채 들떠 있다. 손을 위로 쳐들며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의 모습과 반대로 화면의 왼편에는 죽음과 절망을 엿볼 수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 보인다. 그들의 손발은 오른쪽에 자리한 이들과는 반대로 아래를 향하고 있다.
그림 속 강렬한 색채와 등장인물들의 격정적인 움직임이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화가는 단순한 미화나 비화에 그치지 않고 사실주의와 결합하여 사건을 고발했다. 덕분에 감상자는 마치 이 거대한 참사를 눈앞에서 직접 바라보듯 날 것의 감정에 놓인다. 살고자 하는 욕망,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비참함, 분노와 좌절, 인간에 대한 연민이 교차한다.
물론 작품을 감상하더라도 참사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림은 감정의 소용돌이로 우리를 이끌고,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비극을 상기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
<메두사호의 뗏목>은 이성으로는 가닿기 어려운 지점,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고통과 희망의 한가운데로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 한편으로 그림을 보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누군가의 비극을 접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타인의 불행이나 비극을 마주할 때 가장 쉬운 대응 방법은 회피다. 타인의 고통을 가까이할수록 불에 덴 듯 나도 괴로우니까. 불안에 빠져드는 것이 두려우니까. 회피 대신 손쉬운 연민을 택하기도 한다. 멀찍이 떨어져서 연민과 동정을 베풀면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전형적인 회피형인 내가 그런 식이었다. 늘 타인과, 타인의 감정에 선 긋고 사는 인간이었다. 내 감정도 잘 몰랐으니 나 아닌 누군가의 감정에 손 뻗으려 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슬픈 소식을 접하면 불행과 불운을 피할 논리적인 방법만 찾고는 했다. 사고가 날 만한 장소는 가지 말아야지.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지. 그러면 불운이 따라오지 않을 거야. 나는 예외일 거야.
그런데 그 해 봄, 9년 전의 그 해 나는 처음으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불행이나 불운에서 나만은 예외일 수 있다는 생각, 그러한 생각이 대단한 오만이었단 걸. 타인의 비극은 멀찍이서 지켜볼 수만 있는 건 아니란 걸. 그때 처음으로 나 아닌 누군가의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타인의 아픔을 내게 어설프게 대입시켜 본 후에야 나온 눈물이었다.
물론 극적인 변화는 없다. 나는 여전히 나와 타인 사이에 공고한 선을 긋는 사람이다. 의로운 인간도, 휴머니스트도, 감성적인 인간도 아니다.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내 것으로 품을 수 있는 인간도 아니다. 여전히 무감각하고 어리석다. ‘교통사고로 5명이 부상하고 10명이 사망했다’ 같은 기사를 봐도, 5와 10이란 숫자 사이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자주 잊고는 한다.
그 뒤로 달라진 것은 단 하나다. 작은 능력이 생겼다는 것. 불행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능력. 타인의 불행을 내 불행으로 어설프게나마 대입해 보는 상상력이 생겼다. 이따금 2014년 봄을 떠올리며 그 불행이 내 것일 수도 있었음을 상기해본다. 타인의 고통이 타인의 것만을 아님을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고통을 함부로 이해하거나 아는 체하지 말자고 다짐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따금 희망해 본다. 회피나 가벼운 연민, 동정이 아니라, 불행과 불운의 상황을 상상해보려는 능력이 우리 사이에서 조금 더 떠돌기를. 온전한 이해나 공감의 길까지 닿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늘은 댓글을 닫아둡니다. 죄송하다는 말씀드려요. 다음 글은 4월 18일(화) 저녁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