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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May 16. 2023

실패에 덜 휘둘리는 방법

인생은 오디션이 아니니까

글 발행하는 오늘이 딱 청소년책 원고 마감일이기도 하고, 이번 달에 어쩌다보니 원고 마감이 두 개라서 도저히 새 글을 쓸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오랜만에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책에 실린 글 중 하나를 올려봅니다. (책에 추가 분량으로 넣은 꼭지로, 브런치에는 올린 적이 없는 글입니다).  제 책을 읽어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새로운 글이 아니라 죄송하다는 말씀드려요 ㅠㅠ



코로나19가 길어져 마음이 가라앉던 시기,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이 인기를 끌었다. 무명 가수들이 무대를 찾아 다시 노래한다는 포맷의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을 단 몇 분 보았을 뿐인데 과도하게 몰입하는 나를 발견했다. 길어야 4분을 넘지 않는 참가자들의 노래에 웃다 울다 보면 프로그램이 끝나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 몰입한 건 나뿐만은 아닌 듯했다. 이 프로그램 이야기로 유튜브와 SNS가 들썩거린 걸 보면.


10년이 넘게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아왔다. 아이돌이나 래퍼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 배우나 모델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 등등. 반복되는 형식인데도 불구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질리지 않고 계속 매혹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다.


노래의 힘이 주요한 비결이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디션 참가자에게 내 모습을 대입해 보며 대리 만족이나 감정이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는 실력을 인정받고 만인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참가자들을 마냥 부러워했다. 젊은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고 살아가는 기분은 어떤 걸까? 저 재능은 노력의 산물일까, 타고난 것일까? 궁금증과 동경의 눈빛으로 프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다르다. 실력과 노력이 충분하지만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며 활동해 온 참가자에게 몰입한다. 그들이 인정받으면 내가 인정받은 것처럼 기뻤고, 그들이 실수를 하거나 지적을 받으면 내 일인 양 슬펐다. 오디션의 한 장면에 감동과 씁쓸함이 교차했다.


 가끔은 의아했다. 저렇게 능력이 출중하고 열심히 노력을 했음에도 아직까지 인정받지 못한 이유가 뭘까? 참가자에게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는 걸까? 단순히 그의 시기가 오지 않은 걸까? 인터넷 댓글을 보니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원성을 높이는 목소리도 있었다.


되돌아보니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너무 많았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의 논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운의 영역을 인정할 때,〈운명의 수레바퀴〉



인간사를 지배하는 운명의 힘을 화폭에 담아낸 예술가가 있다.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Burne-Jones, 1833-1898). 성서나 신화, 고전주의 작품 등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린 19세기 영국의 화가다.


에드워드 번 존스의 생전 모습


그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라는 집단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주로 고전 문학이나 신화, 성서의 이야기 등 스토리를 중요시하며 낭만적이고 화려하며 사실적인 그림을 화폭에 담아냈다. 에드워드 번 존스 또한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인 그림으로 신비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에드워드 번 존스의 <큐피드와 프시케>(1866,좌)와 <페르세우스와 바다의 님프들>(1877, 우)



그가 그린〈운명의 수레바퀴〉역시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작품은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 포르투나는 영어로 운을 뜻하는 포춘 fortune의 어원이 된 말이기도 하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포르투나는 커다란 수레바퀴를 가지고 있었다.



에드워드 번 존스, 〈운명의 수레바퀴〉, 1883



 그가 움직이는 수레바퀴의 움직임에 따라 수많은 인간의 운명이 달라진다. 수레바퀴의 위쪽에 있는 인간은 최고의 행운을 누리는 중이고, 바닥 쪽에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불운의 상태에 놓여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속 인간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자. 수레바퀴의 가장 위쪽에 매달려 있는 사내는 행운의 절정을 향해 가는 중이다. 그 아래, 머리가 밟힌 남자는 왕관을 쓰고 지휘봉을 들고 있다. 사내가 영광스러운 과거를 이미 누렸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 역시 여지없이 아래로 내려왔고 누군가에게 머리를 밟히는 신세가 되었다.


가장 아래쪽에는 월계관을 쓴 남자의 머리가 보인다. 월계관을 쓴 자는 지성을 가진 이(시인)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향하는지 살펴보는 중이다.



에드워드 번 존스는 이 작품과 관련해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내 운명의 수레바퀴는 진실한 이미지라네. 우리의 차례가 오면 우리는 그렇게 바퀴에 들러붙고 말지.”



포르투나의 도구가 수레바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바퀴에 붙어 있는 인간의 운명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바퀴의 핵심은 ‘돌아간다’는 것이니까. 행운에 즐거워하던 이도 어느새인가 나락에 떨어질 수 있고, 불운에 허덕이던 이도 수레바퀴가 돌면 언제든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언제든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뒤바뀔 수 있으며, 영원한 불행도 영원한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오디션보다 복잡하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떠올리면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운명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설명도 어렵다.


반면 ‘노력’이나 ‘능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진다는 규칙은 명확하고 예측이 가능하기에 안도감을 건넨다. 가령 ‘노력하면 결과가 따라온다’, ‘능력을 키우면 반드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노력을 할 때에도 쉽게 지치지 않고 불안감이 덜어진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너무 굳건해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어느새부터인가 능력주의, 업적주의에 대한 환상도 커졌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펼쳐 보이면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성공한 인물을 판단할 때 그의 빛나는 노력과 의지, 재능에 찬사를 보낸다.


 반대로 실패한 누군가를 판단할 때에는 그의 미흡한 점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운이 나빠 실패한 사람에게 “그건 네 탓이야”라는 이야기를 내뱉기도 한다. 그러나 논리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존재한다. 능력은 있는 데 성공하지 못하거나, 열심히 했는데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경우를 볼 때면 혼란이 온다. 공평함에 대한 믿음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에 인간은 불안해진다.


나 역시 그랬다. 모든 것을 명확한 인과관계로 설명하려 하다 보니 실패에 엄격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으면 이를 수정 보완하여 다음번에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으니 나쁜 습관은 아니다. 다만 모든 실패의 원인을 나의 부족, 결핍 때문으로 내몰며 마음이 힘들어지는 일이 생기기 쉽다. 실력의 부족함을 탓하고, 노력하지 않은 나를 혼내다가 자존감이 낮아지기도 했다.


이제는 운이 좌우하는 영역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다. TV에서 우연히 코로나19 사태로 해고된 승무원을 보았다.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승무원이 되었는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청년이었다. 허탈한 표정의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불운이 우리를 가끔 이상한 곳으로 데려다 놓는 경우도 있으니, 당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운명 결정론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세상일 대다수를 운의 탓으로 돌리면 모든 일에 체념하기 쉽다. 다만 운의 영역을 어느 정도 인정할 필요는 있다. 일이 잘 풀릴 때 그것을 100퍼센트 내 노력이나 의지 덕분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오만해진다. 내 성공의 법칙을 남에게 그대로 대입해 보며, 남들의 실패를 의지 부족과 실력부족 탓으로 돌리며 채근하는 경우도 생긴다. 내 운이 좋았음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의 실패를 너그럽게 보는 여유도 생긴다.


운의 영역을 인정하면 보이는 희망도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나에게 불운을 안겨줄 수도 있지만 때로는 행운 쪽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 펼쳐질 카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좋은 패일 가능성도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명확한 규칙이 있다. 실력이 있거나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의 인생은 그보다 훨씬 불규칙적이고 예측하기 어렵다. 더구나 오디션 프로그램은 우승자가 정해지며 빛나는 결론으로 끝나지만 우리 인생은 우승과 탈락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채 흘러간다.


내가 노력하던 일이 실패로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실패일 리 없다. 항상 운 나쁜 인간이라며 스스로를 단정 지을 필요도 없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게 마련이니까. 모든 걸 한순간에 단정 짓기에 우리 인생은 길다. 인생에는 항상 역전이 존재한다.



저도 글 쓰고 원고 쓸 때마다 마음이 한껏 휘둘리는 스타일이지만 ;;; 그래도 크고 작은 실패로 마음 흔들리는 분들께 용기를 드리고 싶어 이번 글을 발행해 봅니다. 그리고 인생은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게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돌아보면 세상이 막 공평하고 그렇단 게 아니라, 어차피 '인생 최후의 승자' 그딴 건 없다는 게 제 평소 생각입니다 ㅎㅎ;;)


다음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은 6월 6일(화) 저녁에 발행합니다. 다음 글 발행 텀이 너무 길어서 그 전에 글쓰기에 대한 글을 하나 발행할 수도 있을 듯싶어요 : ) 이웃분들 글도 원고 얼른 끝내고 시간 나는대로 찾아가 읽어볼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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