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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un 20. 2023

농담의 순기능

 유머에는 힘이 있다  

마음이 그렇고 그럴 땐, 농담  


     

 내가 살던 중동의 나라는 한 여름 기온이 50도에 육박하는 곳이었다. 여름에 외출하려 바깥에 나가면 건식 사우나를 경험하게 된다. 일상적으로 숨을 쉬는데도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내 머리통을 감싼다. 당연히 이곳에서는 도보 이동보다는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자동차 이동을 선호하게 된다.    

 

 아이가 서너 살 때였던가. 이 건식 사우나의 여름날 남편, 아이와 차를 타고 어딘가로 놀러 갔다. -실외는 너무 뜨거워서 쇼핑몰 같은 실내에 놀러 가곤 한다.- 집으로 돌아오려 차를 탔는데, 남편이 에어컨을 아무리 켜도 찬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몹쓸 기계가 고장이 난 거다. 결국 50도의 햇빛이 내리쬐는 차 안에서 우리는 삼십 분 가량을 버티며 집에 왔다. 운전석이 아닌 뒷자리인데도 중동의 뜨거운 공기가 내 피부를 찌르는 걸 느꼈다.


 차에서 내리니 운전대를 잡았던 남편의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아이는 땀을 줄줄 흘렸다. 앵그리버드처럼 짜증을 내뿜을 만도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웃음이 터졌다.  햇빛에 벌겋게 달구어진 얼굴, 줄줄 흐르는 땀, 어딘가 시트콤 한 장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의외의 순간 터진 웃음은 당혹감이나 짜증 같은 감정을 이겼다. 

 

 웃음이 힘을 발휘할 때는 또 있다.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을 콕콕 찌를 때다. 몇 달 전 초등학생인 아이와 얘기를 나누던 때였다. 대화를 하다 새삼스레 아이가 8살이라는 사실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초등학교 2학년. 나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에. 

  

 8살의 나이, 나에겐 꽤나 의미심장한 한 해였다. 이런저런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1년이었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으로 집 안 상황이 편치 않았다. 내 불안을 돋우는 가정의 위기 장면도 몇 번쯤 목격했다. 책임감 강한 엄마는 그런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지만, 피치 못하게 목격을 하게 됐다. (가끔 심리상담을 할 때 해당 장면 이야기를 하면, 상담하는 분들 대다수가 '꽤 심각했던 일을 왜 그렇게 덤덤하게 얘기하냐'고 되묻곤 한다.) 


 그 해 몇 가지 씁쓸한 사실도 깨우쳤다. 돈 문제가 인간관계에 제법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가장 친밀한 관계도 험한 말을 내뱉으며 한 순간에 끊길 수 있단 사실을 -물론 직접 경험이 아닌 간접 경험이었지만 – . 경제 상황에 복잡한 감정까지 얽히고설키면 가족이든 지인이든 그 사이가 상당히 곤란해진단 사실도 알게 됐다. (이 역시 간접 경험) 여하튼 사는 게 녹록지만은 않음을 깨달았던 한 해였다.   


 당시의 기억은 마음 깊숙이 숨어 있지만, 어쩌다 가끔 고개를 쳐들고 마음을 쿡쿡 찔러댈 때가 있다. 며칠 전이 그랬다. 그런 날이면 답 없는 의문이 떠돈다. 이게, 여덟 살 난 아이가 굳이 목격해야 할 장면이었을까? 씁쓸한 현실을 여덟 살에 알게 되는 건 좀 슬픈 일 아닌가. 피해의식이 덧대어질 때도 있다. 어떤 운 좋은 사람들은 평생 그런 장면을 안 보고 살지도 몰라.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마음의 불길을 끈 건 문득 생각난 농담이었다. 어쩌면, 그건 일종의 선행학습 아니었을까? 인간관계의 조기 교육 같은 것.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어떤 지점에서 관계의 씁쓸한 면을 경험한다. 학창 시절이든 성인이 돼서든.. 영어 조기 교육을 받듯 난 여덟 살에 인간관계의 선행학습을 한 게 아닌가. 더군다나 제일 난이도 높고 씁쓸한 관계를 먼저 학습했고, 이후엔 그것보다 조금 더 괜찮은 관계들을 경험했으니, 제법 운이 좋은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어릴 때의 조기교육 덕분에, 가끔씩 온라인에 인간관계 관련 글도 올릴 수 있는 거 아닐까?  


 농담 같은 말을 홀로 내뱉고 나니 지근대던 머릿속이 가라앉았다. 회피일 수도, 어처구니없는 정신 승리일 수도 있겠지만. 시답잖은 농담은 효과를 발휘했다. 

          


미소를 불러오는 그림, 창가의 두 여인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 스페인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다. 세비야 출신으로, 고아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후에 그림 공부를 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자화상 



루벤스나 반다이크 등의 영향을 두루 받은 화가는, 세비야의 화단에서 주요한 인물이 되었고, ‘스페인의 라파엘로’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을 쌓아나간다. 특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은 우아한 형상과 따스한 색조를 보여준다. 


무염시태 (1678,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 <무염시태>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뜻한다  @wikiart



  무리요는 종교적 의미의 그림뿐 아니라 현실 속 인물들의 모습도 화폭에 두루 담았다. 특히 서민들의 소박한 모습을 담은 그림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거지 소년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이 유명하다. 그림 속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은 관람자의 마음을 흐뭇하게도, 아릿하게도 만든다.

 

어린 거지(1645~1650년경. 좌)와 멜론과 포도를 먹는 사람들(1645년경)  @wikiart




 그의 또 다른 그림 <창가의 두 여인>(1642)  역시 현실 속 일상을 화폭에 담은 작품이다. 


창가의 두 여인(1642,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화면에는 두 여성이 자리 잡고 있다.  창가에 턱을 괸 채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가 먼저 눈에 띈다. 그는 싱긋 웃는 표정으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는 창문 덮개에 몸을 반쯤 가린 여성이 보인다. 그 역시 터지는 웃음을 가리려 머릿수건으로 입에 댄 모습이다. 두 사람의 눈과 입 모두 거짓이나 가식 없는 웃음을 짓고 있다. 

  

 건물 안 실내는 어둡게 처리되어 있다. 덕분에 인물의 밝은 모습이 강조된다. 당시 귀족 여성들은 창밖을 함부로 내다볼 수 없었기에, 그림의 모델이 서민이거나 매춘부였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창가의 인물을 그리는 것은 네덜란드 풍속화의 영향이었다. 부유한 네덜란드 상인들이 무리요의 그림을 사가던 고객층이었기에 이런 구도의 그림을 그렸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머릿속엔 궁금증이 떠오른다. 두 사람은 무얼 보고 웃는 걸까. 창 밖에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지는 중일수도, 멋진 청년이 길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중일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다는 것. 그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것. 화면 속 빙긋 웃는 두 사람의 미소는 보는 이에게 유쾌함을 선사한다. 




농담의 순기능 



 <창가의 두 여인>을 알게 된 후, 가만히 이 그림을 바라볼 때가 있다. 주로 서글픈 마음 밭을 구르기 직전의 순간이다. 작품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나는 지금 어떤 창가에 기대어 턱을 괴고 있나.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고 앞을 바라봐도 될 것을, 입술 틈을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숨겨도 모자랄 시간에, 엉뚱한 창가에 기대어 슬퍼하려는 중 아닐까.


 그런 순간마다 웃음은 힘을 발휘한다. 짜증이나 고통스런 감정이 농담 한 마디로 덜어지기도 하니까. 나빴던 것이 농담 한 마디로 덜 나쁜 일로 탈바꿈할 때도 있다. 창피해서 홀로 숨고 싶었던 어떤 순간이 웃긴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농담과 유머의 순기능이다.


실제 유머는 꽤 쓸모 있고 성숙한 방어기제라고 한다. 불쾌하거나 공격적인 마음이 치솟을 때 유머를 사용하면 불안감도, 불쾌감도 가라앉기 쉽다고 한다. 성숙이고 유머고 죄다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쨌든 웃음에는 힘이 있다. 


 이 힘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순간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몇 달 전 미용실에서 바꾼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었을 때였다. 짧은 단발이 생경하게 느껴졌고, 속상함이 가라앉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속 거울을 보며 가르마를 바꾸고 앞머리 위치를 바꾸다, 갑자기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 떠올랐다. 지금 내 머리,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안톤 쉬거 (극 중 킬러로 등장.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함) 스타일 아닌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안톤 쉬거. 당연히 얼굴은 다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캡처 


 농담 반 자조 반인 말을 홀로 중얼거리자,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이거 그래도 나름 영화 주인공 헤어스타일인데? 나 홀로 유머에 내가 웃는, 북 치고 장구치고 꽹과리까지 치는 듯한 이 상황이 웃겨서 다시 한번 피식 댔다. 덕분에 머리야 시간 투자해 기르면 달라진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슬픔의 마음 밭을 뒹굴 땐 한참 더 그곳을 굴러도 나쁘지 않지만 한 마디 농담을 스스로에게 던져봐도 괜찮다. 심각의 바다에서 허우적댈 때는 보이지 않던 창밖 너머가, 환히 보일 수 있으니까.  




다음 글은 7월 4일(화)에 발행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마음 편안히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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