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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ul 18. 2023

비교의 늪에서 조금 벗어나는 방법  

내 욕구가 향하는 곳을 살펴보기 

학교 조회 시간에 단상 위에 올라가 상을 타는 것. 학창 시절 내 소원이자 바람이었다.  어릴 때의 나는 제법 공명심이 강한 학생이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단상 위에 올라가 전교생 앞에서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소박한 꿈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바라는 것의 전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소원을 이뤘다. 교육청 주관으로 열린 논술문 대회에 참가해 수상을 했기 때문이다. 소원대로 단상에 올라 상을 탔다. 며칠간 내적으로 우쭐했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뒤, 나름 친했던 친구 한 명이 교내 시 쓰기 대회에서 상을 탔다. 심지어 그 친구의 시를 읽고 감명받은 교장 선생님이 그 시를 직접 낭송하면서, 이 작품이 멋진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다. 순간 내 마음속을 춤추던 우쭐함이 한풀 가라앉았다. 친구가 상을 탐으로써 내가 이룬 것의 희소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보다 한 발 더 앞서가는 목표를 세워야 하는 거 아닌지 생각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나는 뭘 원했던 걸까? 상 타는 것 자체? 글을 잘 쓴다는 인정? 남들 앞에서 주목받기? 


 살면서 비슷한 의문이 몇 번씩 찾아오곤 했다.  학교 시험에서 썩 괜찮아 보이는 점수를 받아도, 다른 친구가 나보다 높은 평균 점수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왠지 내 점수가 흡족하지 않게 느껴지곤 했다. 처음 책을 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내 이름이 박힌 책을 한 권 내는 것이 처음 목표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정작 책을 내니까 좀 더 잘 팔리는 책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다. 


 뭔가를 이루면 더 높은 목표를 이뤄야 할 것 같았고, 남들이 대다수 이룬 목표라 생각하면 왠지 시시하게 느껴져서 나는 더 높다란 목표를 향해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높다란 목표'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이렇게 계속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기쁨과 슬픔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건지 의문이 솟곤 했다. 



소실점이 어디일까,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마인데르트 호베마, 1689)


 고요하고 한적한 전원의 시골길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길의 양 옆에는 높다란 가로수 나무가 자리 잡고 있는데 하나같이 가는 몸통과 정리된 형태의 가지를 지니고 있다. 작품의 좌우에는 어두운 도랑과 나무숲이 펼쳐져 있는데 가운데에 밝게 비친 가로수 길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정면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가로수길을 따라 한 남성과 그가 데리고 오는 개가 보인다. 


 이 작품은 마인데르트 호베마(Meindert Lubbertszoon Hobbema, 1638~1709)라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의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이라는 작품이다. 호베마는 네덜란드 미술황금기 시대의 끝자락을 장식한 화가였다. 평온하고 고즈넉한 네덜란드의 시골 풍경을 주로 남겼는데, 나무나 오솔길, 물레방앗간 등을 주요한 그림 소재로 삼았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에서 포도주의 세금을 걷는 본업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주로 자신의 직업에 시간을 보냈고, 프로 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하지는 못했으나 붓을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하며 암스테르담의 경제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와인 무역이 멈추면서 일을 잃었다. 결국 빈곤한 삶을 이어가다 도시 빈민 묘지에 묻히며 삶을 마감한 예술가였다. 

숲이 우거진 풍경(1667, 마인데르트 호베마) 

 

호베마의 작품은 생전보다 죽음 이후 사랑을 받았다. 특히 그는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그리는 데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는데, 그의 그림은 이후 영국의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 호베마의 작품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위 작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1689)이다.


 작품 속 미델하르니스는 네덜란드 남부에 위치한 작은 섬에 위치한 시골마을로, 한적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작품은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로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 화면 속에는 뭉게구름이 가득한 하늘, 가로수길이 화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그 양 옆으로 다소 앙상해 보이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그 바깥쪽에는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가까운 곳에는 농가가 보이고, 좀 먼 곳에는 교회의 첨탑이 우뚝 서 있다. 그림의 앞쪽에는 농부가 경작을 하고 있는 모습, 농가 앞에서 대화를 하는 남녀도 눈에 띈다. 


그림  오른쪽 화면에 위치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좌)과 농부가 경작을 하는 모습(우)


시골 풍경을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점 외에도 이 작품이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원근법의 정수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원근법은 3차원의 입체를 2차원에 드러내는 방법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처럼 3차원의 거리감과 공간감을 나타내주기 위한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는 물체를 크게 보고, 멀리 있는 물체를 조그맣게 보는 방식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물체들을 선으로 이으면 대각선이 되어 한 점에 모이는데, 이처럼 한 점에 모이는 것을 소실점이라고 한다.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1689)는 이러한 선원근법의 교과서로 불리는 작품이다. 길고 가는 보이는 나무는 가로수길의 양옆으로 늘어서 있으며, 가로수길은 점점 멀어져 점으로 사라질 듯 보인다. 나무의 상층부를 이은 선과 가로수길을 이은 선은 X자로 만난다. 한 점으로 모여드는 연장선. 하나의 점으로 집중되는 이 선은 그림의 전체적인 중심을 잡아 준다. 


 그림 속 소실점을 보며 생각해 본다. 당장 앞에 있지는 않으나 보는 이의 시선이 향하는 궁극적인 곳. 시선이 분산되고 혼란이 찾아와도 마음의 초점이 향하게 되는 곳. 그림의 중심을 잡아주듯, 삶에도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내 삶의 궁극적 지향점을 따져 봐야 할 때 



  삶의 목표점을 모르고 앞으로 달려갈 때가 있다. 때로는 목표점이 무엇인지 알고 달리기 시작했지만, 중간 과정에 휩쓸리거나 비교의 늪에 빠져 괴로워질 때가 있다. 


 상대평가처럼 앞뒤를 재고 비교하고 옆길을 보며 인생길을 달려가다 보면 놓치는 것들이 있다. 어디로 가고픈지 방향이 보이지 않기 쉽다. 내가 남보다 앞선다 느껴지면 행복해지고 내가 뒤처진다 느끼면 불행해지면서, 그 일희일비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뤄도 나보다 많은 걸 이룬 사람을 이기려고, 트레드 밀 위를 뛰는 것처럼 계속 달리고, 또 달리게 된다.  


 끊임없이 달리는 트레드밀에서 멈춰 쉴 방도가 있을까? 내 마음의 소실점이 어디로 향하는지 직면하는 게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다. 가령 ‘순자산 10억을 모으고픈 욕구’를 목표로 가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사실은 10억 원이라는 숫자 자체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되기는 어렵다. 결국 순자산 10억으로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혼란이 덜어진다. 투자를 해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픈 욕구가 숨어 있을 수도 있고, 좋은 집에 들어가 '안정'을 누리고 살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자유 또는 안정이라는 가치를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마음 휘둘림이 덜해질 수 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거나 비교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대더라도 '내가 지금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고 불안하니, 자꾸 10억이라는 돈에 매달리는구나'라는 걸 깨달으면 마음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다. 


 ‘글을 쓰고 싶은 욕구’도 마찬가지다. (내 경험상) 그 욕구 아래에도 복잡다단한 욕망이 숨어 있다. 겉으로야 글을 쓰고 싶다고 단순히 말하지만, 사실 ‘글을 써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을 수도 있고, '남들에게 지적으로 보이고픈 욕구’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글로 돈을 벌고 싶은 욕구'나 '재능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구'가 숨겨진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뒤엉킨 욕구 중 비중이 높은 것이 무엇인가 따져 보면 의외로 단순한 답이 나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글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글쓰기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둔다고 생각해보자. 표현의 욕구가 강하다면,  비교로 마음이 휘둘릴 때 이 사실을 꺼내어 가만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나는 나를 표현하려고 글을 쓰고자 하니, 다른 사람의 글과 나를 비교하는 건 부차적인 일일 수 있겠구나' 정도로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끝이 어디인지 알면, 중간 과정이나 날 비교의 늪에 빠뜨리는 타인의 존재를 건너 뛸 수 있다.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정면으로 들여다 보자. 마음을 직시하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그걸 통해 비교의 늪도, 성마른 갈증도 조금 벗어날 수 있다.



다음 글은 8월 1일(화)에 발행합니다. 제가 (증상이 심하지 않은) 코로나에 걸려서 격리가 어제 끝났어요. 살짝 정신이 없는 상태였어서 오늘 글이 두서가 좀 없고 거칠어요. 읽어주시는 분들께 죄송하단 말씀 드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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