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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ug 01. 2023

1000켤레의 구두를 가진 여자

우리의 욕망은 어떻게 탄생할까

오늘은 제가 짧은 가족 여행 중이라, 이번에 나온 제 10번째 신간 <구두를 신은 세계사> 중 한 꼭지의 내용을 발췌해 발행합니다. 이렇게 글 찾아와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외출을 하려 현관문 앞에 선 날이었다. 급한 일이 있어 아무 신발이나 꿰차고 밖에 나가려는데 현관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오늘 입은 와이드 팬츠와 어울리지 않는 낮은 굽의 샌들. 영 못 마땅하다. 더 높은 굽 샌들은 없나? 7cm쯤 되는 굽의 샌들이나 전체적으로 밑창이 높은 플랫폼 슈즈를 신고 싶었지만(나는 150cm대 남짓, 작은 키의 소유자다) 내 신발장 어디에도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쇼핑 충동이 일었다. 신발을 한 켤레 더 살까? 그러나 이 낮은 굽 샌들을 산 게 불과 2주 전의 일이다. 돈 낭비 아닐까. 난 나름 절약형 인간인데. 그러나 절약형 인간인 나 역시 이따금 주체 못 할 소비 욕구에 휩싸이곤 했다. SNS나 길거리 속 패션 피플처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픈 충동. 생각해 보니 여름옷 코디에 맞게 신발 한 켤레쯤 산다고 큰 일 나는 건 아니지 않나. 나도 모르게 온라인 쇼핑앱을 열고 있었다. 지름신 강림의 순간이 또다시 찾아온 거다.



1060켤레의 신발을 소유했던 여자, 이멜다

 

 예능 프로그램에 신발 수집이 취미인 유명인이 등장한다. 방 하나에 가지런히 놓인 수백 켤레의 신발. 그러나 신발 수집가조차 놀랄 만한 인물이 있다. 1,000켤레 넘는 구두를 소유해 유명해진 사람, 한때 필리핀의 영부인이었던 이멜다가 그 주인공이다.


이멜다의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65년에 필리핀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이후 약 21년간 필리핀의 지도자 자리에 머물러 있던 인물이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54년, 미모에 이끌려 11일 만에 청혼한 여성이 이멜다 트리니다드 로무알데스(Imelda Trinidad Romualdez)였다. 미인대회에서 '마닐라의 뮤즈'로 선정되어 상류층의 사교계에 이름을 알린 여성이었다.


 결혼 이후 이멜다는 남편의 선거운동을 도우며 정치인의 아내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등 소탈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멜다가 영부인이던 당시의 모습 @wikiart


 그러나 대통령 당선 후 부부의 소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르코스는 2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며 부당한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의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감옥에 가뒀으며, 반대파를 고문하고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아내 이멜다 역시 국가의 중요직에 앉으며 힘을 과시했다. 마닐라시의 시장과 복지부 장관 자리에 앉았고, 필리핀 특별 대사로 미국 대통령 닉슨과 레이건, 중국의 마오쩌둥 등 유명한 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권력을 휘두른 셈이다.


 이멜다가 전 세계에 이름을 제대로 알린 건 1986년의 일이었다. 마르코스 정부의 오랜 독재와 부정부패를 견디지 못한 필리핀 시민들은 피플 파워(People Power)라는 민주화 혁명을 일으켰다. 마르코스와 이멜다 부부는 이 혁명으로 쫓겨나 하와이로 도주하는 처지가 되었다.


 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이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가 살던 말라카낭 궁을 점거했다. 궁에는 부부가 미처 챙기지 못하고 떠난 명품 드레스와 가방, 장신구 등 사치품이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낸 건, 방 한가득 쌓여 있던 명품 구두였다. 1,000켤레 넘는 구두가 그녀의 신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샤넬, 페라가모, 지방시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품 브랜드의 구두들이었다.  


     

이멜다의 구두. 이후 이 구두는 필리핀의 마라키나 구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그녀는 왜 끊임없이 구두를 사들였을까  

 

훗날 호주 한 방송사의 보도에 따르면 이멜다는 8년간 매일 구두를 갈아 신었다. 일주일에 10켤레씩 구두를 수집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처음에는 구두의 숫자는 3000켤레로 알려졌으나 타임지가 이후 이멜다의 구두는 정확히 1060켤레라고 정정하였다) 어마어마한 사치의 흔적은 구두만이 아니었다. 이멜다와 마르코스가 살던 궁전 바닥은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순금으로 장식된 욕실 세면대도 있었다.


필리핀 국민들이 분노한 건 부부가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랏돈을 빼돌려 자신들의 욕망을 마음대로 펼친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은 국가의 사업을 독점해 나랏돈을 빼돌리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부부의 해외 비밀 계좌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숨겨져 있었다. 1950~60년대 필리핀은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의 산업 선진국이었다. 그러나 마르코스의 잘못된 정치와 부정부패 아래 필리핀의 경제도, 민주주의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1960년대 필리핀의 모습.한 때 필리핀은 아시아의 선도국이었다.

 

구두 수집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이멜다의 구두에 얽힌 사연을 돌아보면, 단순히 독재자의 아내가 사치 부린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구두는 발을 보호하기 위한 물건이다. 쓸모만을 따진다면, 사실 몇 켤레의 신발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멜다는 이미 구두를 실컷 가졌음에도 매일 새로운 구두를 사들였다. 제아무리 커다란 부(富)를 거머쥐었다 해도 이 정도의 사치를 부릴 이유가 있었을까. 그녀를 구두 수집광으로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미국의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는 그의 저서 『풍요한 사회』에서 현대인의 욕망을 분석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소비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만을 사지 않는다. 우리를 소비의 길로 이끄는 건 필요와 욕구가 아닌 타인의 시선, 그리고 미디어 속 광고다.


 멋진 모델이 최신 운동화와 트레이닝 복을 입고 빌딩 숲 사이 공원을 달리는 TV 광고를 시청한다고 상상해 보자. 시청자들은 ‘멋진 운동화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기능과 디자인이 뛰어난 최신 스마트폰 광고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광고를 보는 이들은 ‘새로운 스마트폰을 들고 행복해하는 나’를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을 하며 사람들은 신제품을 구매한다. 새로운 운동화나 스마트폰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갤브레이스는 어떤 식으로 광고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광고를 보며 사람들은 ‘저 상품을 가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위치,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욕망을 은연중에 품게 된다. 욕망은 새로운 상품의 소비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광고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욕구를 소비자에게 주입시켜 불필요한 무언가를 사게 만든다.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필요나 의지가 아닌, 광고나 선전에 의존해 새로운 상품을 소비하는 행동을 갤브레이스는 ‘의존효과’(dependence effect)라 정의했다.


 의존효과는 오늘날과 같이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기 쉽다. 산업혁명 이전의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많은 이가 배고픔과 굶주림을 해결했다.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할 만한 재화를 갖춘 현대인들은 이제 ‘남과 나를 다르게 만들어 줄 상품’의 소유를 추구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광고가 구매자를 유혹하는 방식도 바뀌어 간다. ‘여기 튼튼하고 실용적인 신발이 있습니다’ 정도의 광고 문구로는 소비자를 유혹할 수 없다. ‘이 신발이 더 근사한 삶, 멋진 장소로 여러분을 데려다 줄 겁니다’ ‘이 신발을 구매해 신고 다니는 당신을 모두가 부러워할 겁니다’ 정도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을 입고, 신고, 먹는지, 어떤 취미를 즐기는지에 따라 나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낼 수 있으므로. 


 의존효과는 흔히 ‘지름신 강림’이라 불리는 소비 욕구가 본능적인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풍요로운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근사하고 멋져 보이는 것을 원한다. 내 경제력과 사회적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상품을 가지기 위한 욕망이 끊임없이 탄생한다. 천 여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도 새로운 구두를 수집한 이멜다의 욕망이 어디에서 왔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멜다의 최후  


 필리핀에서 쫓겨난 후 이멜다는 어떤 최후를 맞았을까. 안타깝게도 완벽한 정의 구현은 없었다. 마르코스는 망명지에서 사망했으나 이멜다와 그의 자녀들은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이멜다는 부패 혐의로 최고 징역 77년형선고받기도 했으나 대부분 유야무야 되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부부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는 2022년 필리핀의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덕분에 이멜다는 대통령의 아내에서 어머니가 되었다.


구두박물관에 전시된 자신의 신발을 둘러보는 이멜다

 

필리핀에 돌아온 이멜다는 자신의 구두에 대해 당당히 언급한 바 있다. “누구에게나 구두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 '사치의 여왕'의 화려한 귀환은 씁쓸함을 안긴다. 더불어 이멜다의 한마디 말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 안의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이 내 '진짜' 욕망일까.       



1.  <구두를 신은 세계사>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신발 이야기로 시작해, 경제, 지리, 철학 등 다양한 방면으로 확장되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책 속에 담긴 글은 위 발행 글과 글투가 많이 다르다는 점 말씀드려요. 브런치 공간에 맞게 분량을 줄이고, 글투나 내용, 형식도 조금 고쳤어요)


신간 표지와 디자인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합니다.   

신데렐라는 왜 하필 구두를 흘리고 갔을까?    

소비자를 오픈 런하게 만드는 한정판 운동화의 힘은 무엇일까?  

소설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는 왜 은구두를 신은 걸까?

여름마다 사랑받는 신발 크록스의 원조는 어떤 신발일까?

If I were in your shoes에 숨은 의미는 뭘까

신발은 어째서 저항의 의미로 쓰일까?      


  책 링크를 함께 답니다.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P.S. 책을 열 권이나 낸 입장에서 엄살 같지만 신간이 나올 때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여전히 있습니다ㅎㅎ집필 중에는 '아, 이번에는 무슨 계란을 만들어서, 바위를 치지?’라는 느낌으로 글을 쓰게 돼요. 책이 나오기 직전 최종 교정본이 왔을 때는 ‘내 계란에 미세한 균열이 있지 않나’ ‘이건 문제가 있는 계란 아닌가’식의 생각을 하며 잔뜩 예민해진 채로 교정을 봅니다. ㅎㅎ

 

 지난 4년간 정말 다양한 카테고리와 종류의 책을 썼고, 나름 괜찮은 결과가 나온 책도 있긴 하지만(집필한 책 중 한 권은 얼마 전에 10쇄를 찍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늘 막막한 느낌에 휩싸이곤 합니다.   


 책 소개나 홍보 글도 출간되는 대로 소개하고 싶지만 브런치에 올리는 글의 내용과 접점이 너무 적고,(주로 경제와 사회 관련 책을 많이 씁니다) 제 경우엔 단시간에 책이 너무 자주 출간된 편이라, 이것도 다 소개하면 혹시 글 공해(?)일까 싶어 자중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집필한 책 중에서도 경제나 사회 문제 관련 청소년 도서는 브런치에 소개글을 잘 올리는 편이 아니에요. (주로 인스타에 소개 글을 올립니다) 그나마 이번 신간은 역사, 문화와 관련된 내용이 있고, 나름 접점이 있다 생각해 소개 글을 올려봅니다. 이번엔 4년 전 투고로 혼자서 쓴 책을 내고 10번째 책이라 이번에는 나름 출간 그 자체로 뿌듯한 마음도 있고요 :)


2. 다음 글은 8월 15일(화)에 발행됩니다. 제가 강원도에서 가족 여행 중이라 답 댓글이 조금 늦을 수 있는 점,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에 글 올리지 못한 점,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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