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니즘이 버거울 땐, 모란도(牡丹圖)

밥벌이가 고단할 땐 마음속 부적 꺼내기

by 유랑선생

아침에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운전을 했다면 대략 20분쯤 차를 몰아 닿을 거리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운전 무능력자다. 덕분에 10분 간 집 근처 역에 걸어가서, 40분쯤 버스에 몸을 싣고 달려야 직장에 닿는다. 출근길 버스에 탈 때는 빈 자리가 넉넉해 앉아 갈 수 있다.


선호하는 좌석도 있다. 버스 뒤편 바퀴가 있어 위로 튀어나온 자리. 다리가 긴 사람에게는 불편한 자리겠지만 다행히 나는 단신이다. 그리고 묘하게도 구석 자리, 웅크린 자세를 좋아하는 인간이라 이곳이 빈자리일 경우 냉큼 앉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 타이머를 켜고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20분 정도 잠을 청한다. (이때 잠을 자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있다.) 깨어보면 차창에 기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기에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상태다. 덕분에 주변에 서 있는 사람 몇몇은 '저 여자 뭘까'란 시선으로 날 쳐다보기도 한다.


동그라미 친 곳이 내 선호 좌석. 좀 위축되고 웅크린 자세를 취하는 걸 좋아함


이따금 긴 출근길에 행복하고도 지겨운 밥벌이의 세계를 생각해 본다. 첫 출근을 한 건 20년쯤 전이다. 적성이나 자아 찾기도 중요했지만 밥벌이를 해야겠단 생각이 주요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돈을 벌어야겠단 결심이 있었다.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단 거창한 책임감 따위는 아니었고, 그저 최소한 한 입 정도는 책임져 엄마의 짐을 덜어야겠단 생각 정도였다.


어린 시절엔 엄마의 밥벌이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며 자랐다. 바비큐, 햄버거, 한식까지 부모님은 업종을 바꾸어 가며 가게를 운영했다. 그 가게에서 초등학생인 나는 매일 숙제도 하고 심부름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근거리에서 본 내 모친의 특기는 ‘버티기’였다. 순조로운 날도 있었으나 삶이 얄궂게 구는 날도 있었다. 치킨을 튀기던 기름에 손이 데거나, 손님들이 험한 말이나 불만을 뱉어 난처한 날이 생겼다. 그래도 엄마는 매일 아침 어김없이 가게 문을 열었고, 묵묵히 그 자리를 버텼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보고 배웠으려나. 사회인이 된 내 특기도 ‘버티기’에 가깝다. (엄마에 비해 내가 훨씬 수월한 삶을 누리고는 있지만) 밥벌이의 현장에서 운 좋게 자부심에 부풀어 오른 날도 있었고 내 능력치에 만족한 순간도 있었다. 반대로 어느 정도의 모멸까지 견뎌야 할까 가늠하게 만든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자아 성장을 한 느낌에 취했지만, 또 다른 날은 자아가 위축되고 영혼을 탈탈 털린 채 퇴근길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어디까지 버티는 게 적정선일까. 밥벌이의 고단함이 끝나는 날은 올까.



생존에 대한 고민은, 옛 사람들도 똑같지 품지 않았을까. 20세기보다 먹고 살기 척박한 시절이었으니까. 옛 사람들은 밥벌이의 고단함을 비관하는 대신, 화려하고 풍성한 꽃 한 송이를 그림으로 방안에 들였다. 다채로운 빛깔로 화중왕(花中王)이라 불리던 꽃, 모란을.


모란도[牧丹圖], 조선시대, @국립민속박물관



모란은 풍성한 꽃잎이 겹겹이 달린 꽃이다. 모양과 기세가 남달라 위압감과 품위를 드러낸다. 이 모습 덕에 옛 중국에서부터 부귀영화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상징이 됐다. 부귀화(富貴畵), 화중왕(花中王)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러한 모란의 상징성은 한반도에도 일찍이 자리잡았다. 신라 신문왕 때 설총의 화왕계(花王戒)에서도 군주를 의인화한 존재로 등장했다.『삼국유사』 속 신라 선덕여왕 일화도 유명하다. 어느 날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도 석 점을 모란 씨 석 되와 함께 보내왔다. 여왕은 배필 없는 자신의 처지를 희롱하려 한 태종의 의도를 알아챈다. 모란은 향기가 없어 나비가 찾아들지 않는다는 속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여왕은 '향기 나는 왕'임을 사방에 선포하려 경주에 분황사(芬皇寺- '향기 나는(芬) 황제(皇)의 절'이라는 뜻)를 세웠다.


이 풍성한 꽃은 점차 ‘감상의 대상’을 넘어 왕실과 국격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조선시대에는 국상이나 혼례, 어진 봉안 등의 나라 행사에 모란도 병풍이 놓였다. 창덕궁 신선원전에 가면 일월오봉도가 둘러쳐진 공간에 왕의 초상인 어진이 봉안되어 있다. 그 일월오봉도 뒤쪽에 자리 잡은 게 모란 병풍이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만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셈이다.

궁중에서 쓰이던 모란도 병풍. 10폭에 이르는 커다란 화면에 펼쳐진 모란 나무들이 풍성하고 당당한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왕실의 전유물이었던 모란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민초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왜란과 호란 이후 견고하게 유지하던 조선의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내기법의 발달로 부를 쌓은 중인과 평민층이 생겼다. 경제적 여유를 쌓은 이들은 새로운 예술 향유층이 되었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잇는 이름 없는 화공(민화 화가)들도 그림 공급층으로 등장했다. 왕실의 문화는 점차 양반층으로 전유되었고, 곧이어 대중들에게도 전파된다. 이름 없는 화원들은 복잡하고 엄격한 궁중 모란도의 양식을 단순화했다. 화려하고 풍성한 색감을 더해 대중적인 민화 모란도를 만들어냈다.


왕실의 병풍 뒤를 장식하던 모란은 이제 서민들의 혼례용 병풍이나, 베갯잇, 자수 방석 등 생활 소품의 주요 소재로 자리잡는다. 민간에서도 혼례를 할 때 궁중에서처럼 모란 병풍을 설치했다. 그러나 열 폭에 달하는 모란 병풍의 제작비는 만만치 않았다. 이에 왕실의 의복과 식품을 관장한 제용감이라는 관청에서 가난한 선비들의 결혼식에 모란 병풍을 대여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혼례날을 그린 그림(평생도 중 일부). 자세히 보면 혼례장 뒤편에 모란도 병풍이 둘러쳐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처럼 모란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데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 풍성한 꽃잎과 화려한 자태는 왕실 뿐 아니라 부귀영화를 상기시켰다. 덕분에 민간에서 모란도는 부귀영화의 꿈을 상징하게 됐다. 조선 전기의 모란은 바위와 나무, 새나 나비 등의 곤충, 사군자류의 식물과 함께 화조화 속에 그려진 소재였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모란의 비중이 커진다. 단독으로 그려지는 작품 소재로 사랑받았다.


때로는 괴석 위에 꽃을 피운 민화 병풍도 유행했다. 불변의 단단함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괴석은 장수와 무병장수의 기원이었기에, 괴석 위에 모란이 꽃피운 장면은 오랜 부귀와 장수를 뜻했다. '부자 되어 오래오래 살게 해주세요'란 민중의 소망을 화폭에 그려낸 것이다.


모란괴석도 병풍 중 일부. @국립민속박물관


그러나 조선 후기의 모란 속 부귀영화의 꿈은 오늘날의 화려한 명품 가방이나 슈퍼 카와는 달랐다. 신분제의 요동 속에서 어떤 이들은 부를 쌓아 올렸지만, 누군가는 농토를 잃고 도시 빈민이 되거나 양반의 지위만 유지한 채 소작농으로 전락했으니까. 양극화 속에서 땅을 잃은 이들에게 부귀란 ‘영화의 꿈’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 속, 생존에 대한 불안을 이기고자 한 소박한 꿈에 가까웠다.



수백 년이 지나도 밥벌이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먹고사니즘의 현장은 대단한 승리나 화려한 역전승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니까. 작은 모멸의 순간을, 무너질 듯한 생존의 위기를 마주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비루한 감정들을 털어내고 내게 주어진 몫의 하루를 묵묵히 쌓아간다.


이런 날들 속에서 모란은 척박한 현실 위에서 화려한 꿈을 꿔도 좋다는 허락을 건넨다. 그림 속 꽃이 현실보다 과장되게 크고 화려한 이유는 현실의 반영이기보다는 '현실을 버티게 하는 마음의 부적'이었던 탓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저마다 다른 모란도 한 장을 품고 지내는 셈이다. 퇴근길 맛있는 디저트를, 주말의 짧은 나들이를, 언젠가 닿고픈 작은 꿈 한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표지 대문의 그림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모란도 8폭 병풍(19세기~20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으로 민화는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밥벌이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적었습니다. 글에 쓴 대로 전 20년 전쯤 첫 출근을 시작했지만 중간에 휴직도 오래 했고, 복직 해 다시 일한 지는 2년 반 정도 되었어요. 사실 휴직할 때는 뭐든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그래서인지 글쓰기 역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편입니다)


하지만 수 년의 휴직 끝에 복직할 때는 겁이 많이 났습니다. 워낙 오랜만의 복귀라 ‘내가 예전의 나처럼 일할 수 있을까?’ ‘직장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글 쓰는 일에 너무 몰입한 채 휴직 기간 몇 년을 보내기도 했고요.


저만 절 걱정한 게 아니었어요. 오랜만에 직장생활을 다시 할 절 보고 주변에서도 많이 불안해 하셨습니다. ㅎㅎ. 복직하며 인수인계를 받을 때 전임자셨던 선생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출근했을 때 자존심 상하는 일 겪어도 관두지 말고 버텨. 퇴근하면 운동하고 잊고, 그냥 다녀봐.” 당시에는 그 말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는데 ㅎㅎ 어쨌든 저의 버티기가 주특기이기도 하고, 운 좋게도 좋은 동료분들 많은 곳에 복직한 덕이 커서 일터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물론 글쓰기와 육아와 직장 일을 얼마나 병행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계속 있지만요)


그렇지만 제 성향이 그럴 뿐이고, 먹고사니즘에 지친 분들에게 '현실의 어려움 정도는 모두 참고 지내야 한다. 모두가 다 그렇게 참는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답은 다른 거니까요. 처한 상황도, 주변 여건도 모두 다 다르고, 어떤 곳에서는 버티지 않는 게 정답일 때도 많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먹고사니즘의 세계가 고단할 날에는 각자의 모란도를 만지작 거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말씀을 건네고 싶습니다.


오늘도 다시 글이 늦어서;;; 죄송하단 말씀 드려요;;;; 몸이 약간 좋지 않아서 글이 여러모로 늦었습니다. 다음 주 연재글로 다시 찾아뵐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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