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혼자라고 느낄 땐, 책가도

말 없는 책등이 날 위로할 때

by 유랑선생

학창 시절, 쉬는 시간마다 교실 한 구석에서 그림 그리는 아이였다. 왜 반마다 그런 아이 있지 않나. 무리에 있기보다 혼자 앉아 만화 그리고 책 보는 친구. 매년 교실에는 학급의 중심인 아이들이 있었다. 활달하고 주목받는 데 익숙한 아이들. 선생님과 농담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 친구들 말이다. 관찰자 시점으로 얘기하는 걸 보면 짐작 가능하겠지. 난 그런 부류와 거리가 먼 청소년이었다.

솔직해지자. 가끔은 무리의 중심에 선 아이들이 부러웠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하루 종일 수다 떨고 싶진 않지만, 가끔은 다수에게 주목받고 싶은 마음. 양극단의 마음이 내 안에 떠돌곤 했다.


그러나 소소한 내적 갈등에 관계없이 학창 시절 나는 거의 아웃사이더였다. 관심사가 친구들의 흥밋거리와 늘 50m쯤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머릿속이 현실에 발붙이고 있지 않았다. 괴상한 상상과 분석이 머릿속에 줄기차게 이어졌다.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그저 생각이 많고 복잡한 편) 가끔은 주변의 이해를 받고 싶어 상상 속 얘기를 끄집어 말로 내뱉었는데, 그때마다 마주하는 건 친구들의 벙 찐 표정이었다. 집에서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엄마 아빠도 늘 가게 일로 바빴고, 인기 많고 친구 많던 언니는 거의 바깥에 나가 있었다. 열 댓살쯤 되자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아, 이번 생(生)은 일정 부분 홀로 꾸려가야 하는구나.


그러나 혼자만의 시간이 공허함이나 외로움의 동의어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다. 무엇보다 내겐 책이 있었다.


외로울 때는 도서관이나 서점에 달려갔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속 ‘에드몽 당테스’ 얘길 펼치면 신났고, 마리 퀴리 위인전을 마흔 번쯤 되새김질하며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간 상상을 했다. 무용수 안나 파블로바(20세기 초 세계 발레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러시아 발레리나)얘길 읽으며, '빈사의 백조' 속 몸짓은 뭘까 상상하곤 했다. 활자는 날 단숨에 흥미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줬다. 내 세계를 펼쳐 보여줘도 벙 찐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적극적인 친교 활동에 등 떠밀지도 않았고, 외골수인 네 세계도 의미 있다고 토닥여줬다.


그래도 사회화(社會化)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어른이 되며 무리에 잘 섞이고, 그럭저럭 사회성 갖춘 인간이 됐다.(외향형으로 자주 오해받는다) 그러나 제아무리 위장술을 펼쳐도 난 여전히 지독한 내향인이다. 모임에 가서 무리해서 말을 많이 하면 허름해지는. 무리에 섞여있어도 이따금 붕 떠 있고, 외로움에 괴로워져도 빽빽한 사람의 온기에는 잘 지친다.


여전히 관계가 고단하거나 외로울 때마다 도서관에 달려간다 . 여건이 안 되면 집안 책장 앞에라도 섰다. 말없이 날 토닥이는 책 등을 보려고.




책가도 8폭 병풍(冊架圖八幅屛風) @국립민속박물관

짙은 푸른빛 책장 안, 칸칸마다 다채로운 책과 기물이 섞여 있다. 고요하고 풍요한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 조선 후기 크게 유행하였던, 책가도(冊架圖)다.


책가도는 다보각경도(多寶格景圖)의 유행에서 비롯됐다. 다보각경도는 청나라에서 골동품이 유행할 때 장식장에 각종 귀중품과 기호품을 전시하던 그림을 말한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귀족의 서재 중 진기한 물건을 모은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이 청대에 전해져 다보각경 형성에 영향을 주었단 얘기도 있다. 가설이 맞다면 책가도는 중국과 서양의 영향을 두루 받아 탄생한 그림인 셈이다.

청나라 낭세령의 <다보각경도>(좌)와 16~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호기심의 방'(Wunderkammer)을 그린 그림(우). 다보각경도에는 서양의 원근투시법이 적용되었다.


중국에서 도입된 그림을 한 시대의 유행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 기를 열었다 평가된 임금. 어릴 때부터 책 사랑이 지극했던 군왕이기도 했다.


정조는 1791년(15년) 어좌 뒤에 놓인 일월오봉도(해와 달과 다섯 봉우리가 있는 그림)를 책가도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일월오봉도는 왕을 신(神)적인 존재로, 우주의 중심에 두며 그려진 그림이었다. 반면 책가도는 학자의 서재를 화폭에 옮겨놓은 것이었다. 임금을 하늘의 대리인이 아닌 ‘공부하고 수양하는 지식인’으로 규정한 명령. 문치주의에 대한 왕의 의지를 드러낸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명은 보수적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조선은 전통과 예(禮)의 나라였다. 수백 년 간 왕의 등 뒤를 책임지던 일월오봉도를 걷어 치우고 새로운 그림을 내건다는 건 파격이었다. 신성과 천명에 기초한 왕권을 학문이나 취미를 드러내는 이미지로 교체하는 것에 신하들은 반대했다. 당대의 책은 귀한 사치품이기도 했다. 얼핏 군왕이 세속적 이미지를 지향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도화서의 궁중 화가들 역시 오랜 장르의 관습을 깨는 책가도를 그리는 데 반대했다.


그러나 정조는 단호했다. 책가도 그리는 것에 반대하는 도화서의 화원 일부를 귀양 보내고 인사 조치도 단행한다. 누구도 왕의 엄중한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궁중화가들은 점차 새로운 규범에 맞춰 책가도 제작에 참여했다. 책가도 그리는 데 일가견을 보인 화가도 등장한다.


특히 궁중화원이었던 이형록의 책가도가 유명하다. 화가는 암녹색과 청록색, 청색 등 다양한 바탕색을 써 진중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서양식 원근법을 활용해 선반의 깊이와 책과 기물의 돌출감 역시 설득력 있게 표현해냈다.

19세기 궁중 화가였던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

그러나 책가도의 유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서책이 담긴 그림은 점차 왕실의 향유에서 민간의 유행으로 전파된다. 형식도 자유롭게 변주됐다. 궁중에서 그린 건 주로 서가의 책장에 책이 가득히 꽂힌 그림이었으나, 일반 민가에서는 임금 뒤편에 놓았던 거대한 병풍 사이즈를 맞출 수 없었다. 그림의 크기가 자연스레 줄었다. 책을 두던 서가(書架)가 생략된 그림도 유행한다. 책만 보여주는 것이 지루하니, 책뿐 아니라 벼루, 먹, 꽃 도자기 등 온갖 기물도 배치했다. 책가도의 전통은 점차 책과 구경거리를 합친 '책거리'로 변모한다.


책거리 7폭 병풍 중 일부(좌)와 책가도 8폭 병풍 중 일부(우) 시간이 흐르며 안경이나 시계 같은 서양의 문물도 그림에 담기게 된다. @ 국립중앙박물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석류나 수박, 포도, 오이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높은 벼슬을 상징하는 공작 깃털이나 꿩 깃털, 장수를 상징하는 대나무, 소나무나 학까지 다채로운 기물이 그림에 담긴다. 오히려 책 보다 기물이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언뜻 무질서해 보이나 당대의 민중들이 바랐던 생의 욕망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름의 질서를 품게 된 것이다.

책거리는 책장의 유무에 관계없이, 책과 소품 등을 배열한 그림을 통틀어 일컫는 넓은 개념이다. (중국 그림의 구경거리와 궁중의 책가도가 결합한 것이었다.) 책가도는 책거리 중에서도 책장(책가)에 책과 기물을 진열한 구체적인 형태를 가리킨다.


결국 이 모든 흐름은 '지독한 책벌레'였던 정조의 마음으로 수렴된다. 그는 자신의 문집인「홍재전서」에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란 말을 남겼다. 세손 시절부터 즉위 초까지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겪은 왕(정조는 사도 세자의 아들로, 세손 시절부터 노론 벽파 등 정적 세력의 암살 위협을 받은 적 있다)에게, 책은 마음 터놓을 가장 오랜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책가도는 외로움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그림이 아니다. 외로움이 소란에 흩어지지 않게 정돈해 주는 그림이다.

정조에게 선반 위 쌓인 책등이 군왕의 피로를 씻어주는 물건이었듯, 책은 소란한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고요한 성벽 아닐까. 관계 맺음을 강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혼자가 결핍이 아님을 묵묵히 일깨워주는 존재. 그렇게 보면 책가도 속 사람 없는 서재는 텅 빈 광장이 아니라, 내가 아끼는 것들로 꽉 찬 비밀의 방이 된다.


사람을 만나도 외로운 날이라면. 사람을 만나도 마음이 헛헛한 순간이 온다면 책이라는 정물(靜物)의 세계를 들여다보자. 그곳엔 여전히 나를 기다리는 단단한 위로가 쌓여 있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아이고, 오늘도 글을 조금 늦게 올립니다. 죄송하단 말씀드립니다.


내향형 인간인 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올렸는데요. 실제로 저는 약간 외향형으로 보이는, 친근(!)하고 활달해 보이는(!) 사람입니다만(이웃분들이든 편집자 분들이든 제 브런치 글을 보다 실제로 절 보면 인간미?가 넘쳐서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그래도 기질적으로 내향형이긴 합니다.


글을 쓰고 가장 좋았던 건 제 기질과 비슷한 성향의 분들을 많이 만났다는 거예요. 전 20년 이상 절 부정해 왔거든요. ㅎㅎ 사람 많이 만나면 쉽게 지치고 외골수 기질이 있고 생각 많은 성격이란 걸, 꽁꽁 숨겨두고 제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글 쓰면서 ‘그런 기질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구나’, ‘이런 나도 이해받을 수 있구나’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아마도 글 쓰는 게 가끔 고단하고 힘들어도 절대 놓지 않는 이유가, 글로 연결된 세상 때문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 주에는 조금 더 빨리;;;; 늦지 않게 글 올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월 감기 조심하세요!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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