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관계의 지형도 앞에 서는 방법
20년 지기 친구가 있었다. 많은 말 없이도 통하는 이, 내 무심함도 별 일 아닌 듯 받아주는 벗이었다. 자주 보지 못해도 각자 답답한 일이 있으면 찾는 사이였다. 뜬금없는 이야기나 영양가 없는 흰소리를 늘어 놓아도 안전하다 느꼈다.
당연하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어려워졌다. 물리적 거리도 있었지만 몇 년 간은 코로나와 육아의 파도가 우리 사이를 갈랐다. 괜한 망설임도 있었다. 지금 연락하면 분주한 날들 속 친구를 귀찮게 만드는 거 아닌가. 나만큼이나 답장할 여유가 없을 텐데. 배려를 가장한 망설임이 쌓여 갔다.
그러나 외로움이 발목까지 차오른 날, 참지 못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 외로워서 연락했다. 보고 싶네. 몇 분 지났을까. 답이 돌아왔다.
오, 잘 지내고 있니? 계속 글 쓰고 있지? 작가님. 파이팅이다. 잘 지내고.
돌아온 문장의 행렬 앞에 고개를 갸웃했다. 반가움의 말투 맞나. 평소 둔감한 나지만 행간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얘길 이어가고 싶단 뜻보단 대화를 끝내고픈 정중한 마침표를.
그렇게 몇 번 비슷한 시도를 했고 비슷한 패턴을 거쳐 짧은 대화가 끝났다. 따뜻하지만 단단한 거절의 벽을 실감했다.
몇 번은 내 행동을 곱씹었다. 이전에 내가 무심하게 군 적 있나.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던가. 친구를 둘러싼 미묘한 환경 변화를 내가 놓쳤나. 고민을 거듭했지만 좀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답만큼 연락 횟수도 줄었다. (겉으로야 대범한 척, 쿨한 척 해도 내 안에 상처받기 싫은 작은 인간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나이 먹을수록 상황도 바뀌고, 사람 사이 관계의 지형도도 시시때때로 바뀜을 알고 있었다. 영리한 척했으나 머릿속 깨달음일 뿐이었다. 이 친구와는 예외일 줄 알았다.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성향은 비슷하다 생각했으니까.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영구한 관계’란 게 있을 줄 알았으니까. 믿음에 균열이 와서 그런가. 마음이 좀 아렸다.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며 마음을 이어 붙이고 싶어서일까. 균열 사이로 허무함이 스밀 땐, 역설적이게도 단단한 불멸의 상징인 십장생도를 곁에 둔다.
십장생도(十長生圖)는 강력한 생명력과 영원불멸을 뜻하는 열 가지 자연물을 소재로 삼은 그림이다. 장생도라고도 부른다. 그 수가 열 가지로 정해져 있지는 않고 화폭의 크기나 의도에 따라 숫자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늙지 않는 불로장생(不老長生)과 무병장수, 평안한 삶에 대한 염원이 한 폭의 그림에 담겨 있다.
고려시대부터 그려진 장생도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화서의 화원들이 도맡아 그리는 궁중의 작품이 됐다. 왕실 행사에서는 축수(祝壽, 장수를 축하함)와 길상(吉祥)의 의미로 병풍을 세웠다. 정초가 되면 왕이 중신들에게 새해 선물로 그림을 하사하기도 했다. 투병 중인 신하에게 그림을 내려 치유와 건강을 기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엄격하고 화려한 궁중의 그림은 조선 후기 민간의 영역으로 흘러들어 민화의 대표 소재가 된다. 질병이나 재해가 시시때때로 삶을 덮쳐오던 시대였다. 당연하게도 장수(長壽)는 민중의 큰 염원이었다. 영원불멸을 담은 그림은 고단한 삶을 보듬는 대중적인 위로로 자리 잡는다.
그림 속 상징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변을 말한다. 해와 달은 영구히 빛나는 것으로, 인간의 생명도 그와 같기를 바랐다. 오랫동안 한 곳에 자리 잡은 산과 강도 마찬가지였다. 소나무는 잎의 색이 변하거나 낙엽이 떨어지지 않는 상록수로, 대나무는 겨울에도 살아 있는 나무로 긴 생명력을 의미했다. 구름은 비를 동반하여 풍년과 운을 상징하고 만물의 생기를 관장하는 자연물이었다. 기암괴석은 변치 않는 것으로 장수를 상징했다.
불로초는 불사에 이를 수 있는 신비한 약초를, 사슴은 신령한 동물을 상징한다. 보통 사슴이 고개를 숙여 불로초를 물려는 모습으로 담겼고, 이 조합은 장수와 복록을 뜻하게 됐다. 학의 경우에는 천년을 장생하는 새로 십장생에 등장했다. 온유하고 점잖은 모습이 은둔 생활을 하는 군자의 모습과 맞닿아, 입신출세의 상징으로도 통한다.
그러나 이 영원불멸의 상징물을 찬찬히 뜯어보면, 역설적이게도 분주한 흐름이 존재한다.
빛나는 태양은 하늘에서 그 위치를 바꾼다. 달은 이지러지고 차오른다. 산도 그 자리에 있으나 매년 그 옷을 갈아입으며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구름은 하늘 위를 떠다니다 비를 뿌리며 순환하고, 불로초는 사슴의 먹이가 될 것이다. 영구하거나 긴 생(生)을 누리는 것들도 뜯어보면 끊임없이 그 위치나 형태를 바꾸며 흐른다. '영원'이라는 타이틀 아래에도 끊임없는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를 얻을 때 그 관계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고정되길 원한다. 그러나 관계의 불로장생을 바랐던 순진한 열망이 때로 우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되짚어 보면 우정도 자연물이나 생물과 비슷한 게 아닐까. 볕이 들면 자라고, 서리가 내리면 시든다. 사람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름 같아서 바람이 불면 흩어지고, 달 같아서 차오르고 이지러지길 반복한다. 한 때 밤새워 나눠도 시간이 모자랐던 대화의 시간이, 오늘은 단 한 문장의 안부도 나누기 어려워지는 것.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깝다. 영원은 역설적이게도 고정된 틀이 아니라 ‘흐름’ 속에 자리하니까. 그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가 있다.
물론 깨달음이 외로움을 말끔히 씻어내 주진 않는다. 외로움에 대한 글을 백 번쯤 썼지만 나는 늘 그 감정의 서늘함에 몸을 떤다. 채팅방에 안부의 말을 썼다 지우며 망설이는 순간도 여전하다. 그러나 이제는 외로움을 ‘내 인생이 잘못 가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눈이 내린다고 해서 산의 형태가 변하지 않듯, 외롭다고 해서 내 삶의 가치가 훼손되는 건 아니므로. 오히려 ‘나’라는 산의 능선이 명료해지기도 한다. 관계의 이동과 흐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자존(慈尊)을 얻는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좀 시린 주제지만, 관계의 변화와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저는 살면서 평생 인기인이었던 적은 없어요ㅎㅎ 무심한 성격이어서 예전엔 지인들에게 욕도 제법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변에 늘 사람이 머물고 소수의 친구들과 꾸준히 만나는 편이라 그게 은연중에 제 매력(??) 덕분이 아닌가 믿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친구가 저에게 "너는 참 정(情)은 없지만 기복이 적고 일관성은 있어서 계속 만나게 된다."라고 하더라고요. ㅎㅎ 참고로 저희 둘 다 T입니다 ㅎㅎ)
그런데 제법 긴 외로움의 터널을 지나고 나니, 그게 다 제 오만이었단 걸 깨달았어요. 연락도 잘 안 하는 저란 인간을 묵묵히 견뎌준 친구들의 깊은 자비심(?) 덕분이었던 거죠. 지금은 관계 앞에서 꽤 겸손해졌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서로의 상황도 변하고 그만큼 관계의 지형도가 변할 수 있음을 느낍니다. 시간 갈수록 고독에 익숙해져서 외로움쯤은 거뜬히 넘기는 의연한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그 예상이 매번 빗나가더라고요 ㅎㅎ 하지만 그 과정 속에 배우는 것들이 있단 생각이 듭니다. 타인이란 구름이 걷힌 자리에 날 새롭게 세우게 되기도 하고요.
연휴 앞두고 분주한 나날 중에 긴 글 찾아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넉넉하고 편안한 설 연휴 보내시길 빌어요. 다음 주에, 다음 발행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