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을 그만 두고 싶다면, 문자도(文字圖)

흐트러지는 결심을 작은 단서로 붙드는 방법

by 유랑선생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샤워를 하면서 온갖 상상을 이어가는 사람과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 나는 명백히 전자에 해당한다. 아침 샤워 시간,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낭비되는 물의 양을 걱정하다가 아프리카 사막화를 떠올린다. 생각은 '기후 문제와 인류의 미래'로 번지고, 곧이어 국제 정세와 세계평화, 사후 세계의 존재 여부까지 사고의 꼬리가 이어진다.


누군가는 "수도꼭지 잠그듯 생각을 멈추면 될 것 아니냐", "사고의 비약이 너무 심하다"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사유 과정은 폭주하는 고속열차와 같다. 멈춰 세울 수도, 잠금단추를 누를 수도 없다. -첨언하자면 이 모든 망상의 종착역은 삶의 의미다. “출근은 왜 해야 할까? 매일 출근을 해야 할 만큼 삶이 의미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곱씹게 되니까.-


바로 내가 왼쪽의 인간형. 비행기 타기 전부터 추락을 걱정함 @twitter-mbti zzal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샤워실 철학자형 인간에게도 장단점은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생각 여행으로 즐거울 순 있지만, 낮은 실행력이라는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한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목표로 가는 구체적 행동 지침 1-2-3단계'를 생각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대신 극단적인 상상을 한다. ‘완벽한 성공 후 건치를 드러내며 웃는 나’ 또는 ‘처참히 실패해 우는 내 모습'을.


덕분에 늘 비슷한 스텝을 밟아왔다. 결심이 머릿속 거대한 관념과 상상으로 전환돼 날 압도하고, 현실에 일어나지 않을 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에너지를 쓴 다음, 종국엔 실행 회피주의자가 되는 단계. 매년 1월 1일이면 ‘운동해야지’라는 결심을 세우지만, 그 다짐을 72시간 이상 지속한 적은 없다. 마흔이 되던 해에는 영양제 챙겨 먹기를 목표로 정했다. 비타민이며 오메가 3을 (생각 없이) 한 번에 입에 털어 넣다 속이 울렁거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누군가는 나처럼 비대한 상상에 압도되어, 또 누군가는 반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함에 갇혀 시작을 미룬다. 원인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발목 잡히는 것. 짧은 시간 의지력에 불탔다 꺼지는, 작심삼일의 마법에 걸리는 것이다.




결심이 안개처럼 흐트러질 땐 원대한 비전을 붙들기보다 눈앞의 단서를 살펴보는 건 어떨까. 명료한 획들이 자리 잡은 그림 문자도(文子圖)를.


오른쪽부터 '신(信) 염'(廉)을 쓴 문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자도는 의미 있는 글자에 상징적인 도상을 덧대어 그린 그림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타이포그래피라 할 수 있다. 연원은 복(福) 자를 가구나 베갯잇, 수저나 가구에 행복을 염원하던 중국의 풍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문자 그림은 독특한 면이 있다. 18세기경 조선의 유교적 질서가 정착되면서, ‘효제충신 예의염치(孝弟忠信 禮義廉恥)’ 여덟 글자를 중심으로 궁중과 사대부, 민간까지 깊숙이 파고든 것이다. 이런 그림을 효제 문자도(孝悌 文字圖)라 일컫는다.


효제 문자도 8폭 병풍. 효제충신 예의염치의 유교의 주요 덕목이 쓰여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흥미로운 건 문자도가 단순히 글자의 형태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효제 문자도의 효(孝) 자에는 잉어 그림이 함께 등장한다. 잉어는 한겨울 얼음을 깨고 잉어를 낚아 계모에게 공양한 진나라 선비 왕상의 효행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형제간 우애를 뜻하는 제(第) 자에는 주로 할미새가 등장한다. 서로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돕는 호들갑스러운 모습에 연원한 것이다. 문자도는 이처럼 엄격하고 딱딱한 유교의 덕목을 글자라는 형식에만 가두지 않았다. 누구나 이해 가능한 생생한 이야기를 도상으로 풀어냈다.


효제 문자도 중 효와 제를 그린 부분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 정부와 사대부에게 있어, 문자도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훌륭한 시각 교재였다. 유교의 기본 소양을 담은 책인 삼강행실도나 가례 등의 책을 그림으로 풀어 해설을 달고 보급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글을 모르는 평민들도 그림 속 잉어나 할미새를 보며 유교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삶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19세기 이후에는 단순한 교육용 그림을 넘어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다. 자녀 출세 및 가문의 번영을 꿈꾸는 길상화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대부 가문뿐 아니라 중인층과 부농층의 집안 곳곳을 장식하는 그림으로 변신한다.

문자도 8폭 병풍 중 일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문자도의 화려한 모습에서, 옛사람들이 고안한 현실적 장치를 본다. 우리 조상들은 '효도해야지'란 다짐을 머릿속으로만 곱씹지 않았다. 관념은 머릿속에 있을 때 가장 먼저 휘발되니까. 대신 병풍에 글자를 두르고,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 시선이 닿는 곳에 묶어두었다. 완벽한 성인(聖人)의 덕목을 머릿속으로 곱씹기보다 일상 풍경 속 각오의 글자를 박아 넣은 기술. 결심을 마음의 영역에서 시선의 영역으로 옮기는 지혜. 생각에 매몰되어 정작 오늘 할 일을 놓치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처방전 아닐까.



실천하지 못한 계획과 거창한 질문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생각의 물줄기를 줄여본다. 작심삼일은 의지력 결핍보다 물리적 단서가 부족할 때 발생한다는 걸 아니까.


대신 실행을 위한 작은 단서를 일상에 흩뿌려 본다. 운동을 하고 싶을 때는 운동복을 침대 옆에 두고 잠들고, 글을 쓸 의지가 충만할 때는 노트북을 열어 두고 흰 여백에 제목만 박아둔다. 해야 할 일이 많을 때는 거울 옆에 짧은 메모를 한 장, 물 한 컵 옆에 미리 꺼내둔 알약 하나면 충분하다. 거창한 결심이 머릿속 망상으로 휘발되기 전에, 내 시선이 그 단서를 먼저 가로채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나만의 문자도를 그려 넣는 방식이다.


젊은 시절 머릿속으로 거듭 곱씹던 독한 의지나 비장한 부르짖음은 이제 내려놓았다. 사흘에 한 번씩 비장한 다짐을 스스로 어길 만큼 내 마음이 나약하단 걸 기꺼이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나약함이 삶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모든 사람이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며 아침형 인간이 될 필요도, 24시간을 30시간처럼 살며 갓생을 추구할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대신 사흘마다 결심하고, 그 결심을 어긴 후 다시 다짐하는 '하찮은 의지력' 정도만 이고 지고 간다. 인생을 바꾸는 건 거창하고 정교한 설계도가 아닌, 서툰 삶의 한 획을 긋고 또 긋는 다정한 태도일 테니.


오늘 대문 그림도 1920년대 우리나라에 왔던 영국 출신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의, '달빛 아래 동대문(1920)'이라는 작품입니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작심삼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입부에 썼듯 저는 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사는 관념적인 사람에 가까워요. (저랑 비슷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사람에게 '멍 때리기'란 없습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뭔가를 생각하고 있거든요. 쓸데 있는 생각이든 없는 생각이든.)


한 때는 대단한 의지나 독한 마음가짐이 절 한방에 근사한 사람으로 바꿔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흔이 넘기고 보니 그 거창한 기대가 저를 무기력한 회피주의자로 만들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깨달음 이후로 웅대한 자아를 내려놓고 인생 설계도가 내 뜻대로 움직일 거란 기대도 조금 내려놓았습니다. (삶의 큰 흐름이 꼭 제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대신 예전에 하찮게 여겼던 소소한 행동들을 계획표에 '대충' 적어 넣기 시작했어요. '다 쓴 샴푸 통 새 걸로 바꾸기' '관리비 납부하기' 같은 작은 일부터 '원고 반쪽만 쓰기' 같은 글쓰기 목표로요. 사소한 것 하나를 마칠 때마다 밑줄을 긋고 혼자 뿌듯해하는 편이에요. 샴푸 통만 바꿔도 무언가를 끝낸 거니, 자기 효능감을 높여주더라고요.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원고 계약을 하면 가장 먼저 예상 목차랑 출간 기획안을 작게 오려 수첩에 붙여둬요. 그러면 ‘책 한 권’이라는 거대 미션이 ‘오늘 쓸 수 있는 명확한 분량’이라는 실체로 다가오고, 마감까지 어찌저찌 달려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제 수첩에 붙여 놓은 출간 기획안이랑 예상 목차입니다. 원고 쓸 때 중간중간 확인하면 집필에 큰 도움이 돼요.



한 가지 안내를 드려요. 이 민화 에세이 연재는 총 10화로 2주 후에 끝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 공간에 발행 글을 올리려면 제 경우 구상-초고 쓰기- 퇴고 7~8차례에 이르기까지 하고 발행까지 하루에서 하루 반 정도 필요한데(그래서 브런지 발행 앞둔 날은 거의 3~4시간만 잠을 자요 흐흐) 개학 후 학교 생활을 하고 원고 집필을 병행하면서 브런치 연재를 같이 하려면 살짝 버거울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3월 15일(일요일)까지 연재를 하고 그 이후에는 잠시 쉬고, 지금 쓰고 있는 원고들 마감이 조금 끝나면 다시 찾아오려고요 : )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한 주 보내시고 다음 주에 다음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 )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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