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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Oct 20. 2020

내가 누군가의 들러리로  느껴질 때

세상의 무대를 작게 만드는 것도 삶의 기술이다  

 작년에 본 드라마 중 <어쩌다 만난 하루>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흥미롭게도 순정만화 속 세상이다. 주인공 단오는 어느 날 자신이 만화 속 등장인물임을 알아챈다. 처음에는 스스로가 만화의 주인공이라 생각한 단오는 그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만화의 여주인공은 ‘여주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착각 속에 살던 단오가 갑자기 뒤로 밀리고 스포트라이트가 여주다에게 비추어지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 중 한 장면. 자신이 만화의 주인공인 줄 알았던 은단오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들에게 밀려난다

 

 우리도 가끔 현실 속에서 이런 장면을 맞닥뜨리게 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세상에 따로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미모나 재능, 엄청난 매력을 지닌 주변 사람을 보면서, 나는 이를 ‘받쳐주는’  조연이나 엑스트라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같은 반이던 아이가 공부를 잘했을 뿐 아니라 얼굴도 예뻤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썼으며 성격도 차분하여 선생님들의 사랑을 두루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저런 아이가 있다니. 주인공의 관상을 타고 난 아이가 있다면 저 아이인가 싶었다. 나도 나름대로 어느 정도 상위권의 성적을 지니고 있었지만, ‘공부 못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다. 덤벙대는 성격도 그 아이와는 달랐다. 흘끔흘끔 그 친구를 쳐다보고 질투하고는 했었다.       


 대학에 가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 있다. 나는 전공수업 중에 경제학과 통계학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시간마다 우울했다. 원래 소설 읽기나 역사, 미술 등의 분야의 책 읽기를 좋아했다. 논리적 사고나 수학적 분석이 필요한 분야에는 취약했다. 아무래도 전공을 잘못 찾아 대학을 왔구나 생각했다. 반면 논리적 사고나 수학적 분석에도 뛰어난 친구들이 있었다. 시사상식이 풍부한 이들도 학과에 참 많았다. (사회교육과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학과공부에 딱 맞는, 공부도 잘하는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글쓰기와 책쓰기를 시작하고 나서도 비슷한 감정을 자주 느낀다. 누군가는 이미 내가 책을 낸 사람이고, 브런치에서 구독자도 꽤 늘었으니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그렇지 않다. 주목받는 글을 특출 나게 잘 쓰는 사람들, 박식함이 글에 묻어나는 사람들,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들이 세상에 넘쳐난다. 가끔은 그런 작가들이 '세상'이라는 큰 무대의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가끔씩 특별한 누군가가 되고 싶은 소망을 가진다. 원하는 특별함이 크던 작던 간에.

그러나 빛나고 있는 누군가를 살펴보면 그 소망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있다.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과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이야기를 다시 꺼내본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영국의 풍경화가 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조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점에서 함께 언급되는 일이 많다. (이미 언급을 한 적 있는 화가들이지만 최근 시간이 부족하여 다른 화가를 찾지 못해 다시 관련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터너는 살아있는 동안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이루었다. 전람회에 출품하여 영국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된 것도 불과 20대 초반의 일이었다. 반면 컨스터블은 아카데미 회원이 되기 위해 53세까지 기다려야 했다. 39세 이전까지 그의 그림은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아무래도 터너 웅장하고 극적인 풍경 표현에 마음이 강하게 끌렸다. 빛의 묘사에 있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터너 최초의 유화작품인 <바다위의 어부들>은 밤바다와 구름 사이로 비추는 달빛, 거친 파도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배를 그리고 있다. 절묘한 빛의 표현이 담긴 작품이다. 그는 불과 20세 무렵에 이 그림을 전람회에 출품해서 왕립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었다.      

<바다위의 어부들>(윌리엄 터너,  1796)        @출처: 위키아트

 

 반면 컨스터블은 당시의 유행이었던 장엄하고 이상적인 풍경화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을 그렸다. 그는 영국 시골의 소박한 풍경들을 그렸는데,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평범해보이는 것이었다. 컨스터블은 실제 풍경을 살펴보고 실제 자연에 가까운 모습을 세심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남겼다.

<건초 마차 > (존 컨스터블, 1821)       @ 출처: 위키아트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 컨스터블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풍경화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찍 주목받지 못한 컨스터블의 삶에 감정이입이 되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의 그림들을 살펴보며 터너와의 작품과는 또 다른 종류의 매력을 찾아보게 되었다.

<무지개의 풍경> (존 컨스터블, 1812). 컨스터블은 무지개를 '희망의 부드러운 아치'라 표현하며 작품 속에 자주 그리고는 했다          @ 출처: 위키아트


 더 깊이 생각해보면 터너와 컨스터블을 ‘동시대’에 살았던 ‘영국’의 ‘풍경화가’라는 이유만으로 라이벌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풍경화가라는 점 외에는 큰 공통점이 없었다. 터너는 평생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풍경을 담아내는데 힘썼다. 빛의 표현을 통해 엄숙하고 웅장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컨스터블은 어찌 보면 다른 장르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평생 동안 영국 밖을 떠나지 않고 눈앞의 풍경을 진실 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크게 보면 터너와 컨스터블은 같은 무대에 서 있었고 터너가 세상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 컨스터블은 그에 비해 초라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이 그저 서로 다른 무대의 주인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 등 다수의 책을 지은 저자, 김민식 PD의 강의를 유튜브로 본 적이 있다. 그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공학이라는 전공이 자신에게 매우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영문과 전공수업을 청강하고, 영어책들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영어를 잘하는 공대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통번역대학원에 갔고, 또 다시 진로를 바꾸어 방송 PD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인생의 부침이 있었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갔다.      


이전의 나는 세상에 넓은 무대가 오로지 하나 있고 그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소수의 주인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머릿속 무대를 크게 만들지 않고 작게 , 여러 개 세분화해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무대의 주인공은 각각 다르다. 모든 사람의 영역이 생기는 것이다.      

 

가령 나는 당시 경제학 수업을 같이 듣던 친구들 중 경제학을 가장 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과에서 경제학을 배우는 사람들 중 미술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다소 이상한 비유처럼 보이지만 사실이다.-'경제학을 배우는 사람 x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무대로 영역을 좁히면 그 무대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된다.    

  

 일종의 차별화 전략이라 볼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정신승리’라 해도 좋다. 그러나 이 정도의 정신 승리가 해롭거나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정도의 유익한 측면이 있다.


  먼저, 다른 사람에 비해 매력이나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보여 내가 스스로를 낮춰보게 될 때 열등감을 잊게 해준다. 나만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면 작은 자부심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나만의 세분화된 무대를 찾아가다 보면 나만의 강점인 영역이 무엇인지 찾게 된다. 예를 들어 경제를 아주 잘 알지 못하지만, 나는 미술을 좋아하는 경제 교사였다. 이는 ‘나만의 영역’이 되어 책을 쓰는데 도움을 주었다. 무대를 넓게 보지 않고, 나만의 무대를 찾아 영역을 좁혀가는 과정에서 내가 빛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분야가 생긴다. 스스로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는 좋은 사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세상의 매력이나 재능이 공평하고 고르게 분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무대가 있다. 무대가 좁을 수도 넓을 수도 있다. 무대의 모습이 특이한 것일수도, 보편적인 모습일수도 있다. 그런 것은 큰 상관이 없다. 나만의 무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무대의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p.s.

1. 다음 주에는 <그림으로 나 위로하는 밤> 매거진은 한 주 쉬겠습니다. 대신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낼 다른 에세이를 다음 주 중에 하루 이틀에 걸쳐 한꺼번에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 글을 한 번에 올릴 가능성이 높아 구독하시는 분들이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어 미리 알려드립니다.      


  2. 제 세 번째 책이 곧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출간 전입니다) 생활 속 내용과 경제학을 접목한 쉬운 경제 교양서입니다. 출판사에서 출간 전 연재 이벤트를 하는데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 중 3분께 책을 무료로 드린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벤트 경쟁률이 치열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적고보니 약간 웃프네요 ㅎㅎ )

 홍보 차, 출간 전 연재 이벤트 글 링크를 남겨드립니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736828&memberNo=1006583&navigationType=p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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