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Nov 10. 2020

조건부 행복의 함정

'~한다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명제의 한계  

 대단지 새 아파트의 꿈과 조건부 행복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포털 사이트에서 부동산 실거래가만 확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원하던 아파트 청약에 연거푸 떨어지고, 집값 상승 때문에 출산 두 달 만에 원래 살던 전셋집에서 이사한 직후였다. 되돌아보면 당시가 부동산 열기의 시작점이었다. 거의 1년간 머릿속에 동네의 주요 아파트값을 머릿속에 입력하고 지냈다. 수도권에 위치한 소위 '대장 아파트'로 불리는, 주요 아파트의 이름을 모두 외우기도 했다. 부동산 카페나 부동산 실거래가를 알려주는 앱을 하루 종일 쳐다보며 우리 식구가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를 따져보았다.      


 때로는 대단지 새 아파트에 입주하여 커뮤니티 센터를 이용하거나 단지 내 산책로를 걷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아파트에 입주하면 행복은 절로 따라올 것 같았다. ‘아, 그 아파트를 사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 인생에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 그 뒤로는 쭉 행복할 거야' 종종 생각했다. 조건이 따라주기만 한다면 행복의 길이 내 앞으로 쫙 깔릴 것 같았다.      


 되짚어보면 '조건부 행복'의 상상을 거듭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 새내기가 되어 멋진 캠퍼스를 누비는 나를 상상했다. 해외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도우미를 쓰며 육아와 살림을 하지 않고 자유롭고 럭셔리한 삶을 누리는 나를 꿈꿨다 '만약 ~한다면, 행복할 것이다'의 명제에 사로잡힌 채 환상 속을 헤매던 날이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꿈과 환상이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중동에 건너와 해외 생활을 시작하며, 새 아파트에서 보내는 풍요로운 삶은 누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대학에 갔을 때에도 멋지게 캠퍼스를 누리기보다는 학교 기숙사방에서 소주를 먹는 날이 많았다. 설령 청사진의 일부가 이루어진다 해도 행복의 길이 무한히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해외에서의 삶은 시작되었으나 환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척박한 편이었다.       


 소원대로 새 아파트에 입주하며 살았다 해도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야 크게 감격했겠지만 결국 감격의 순간은 금세 지나간다. 경제학에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는 이론이 있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처음으로 무엇인가 얻거나 경험했을 때  순간의 기쁨과 만족은 대단히 크다. 그러나 같은 상품의 소비를 거듭할수록 순간적인 만족도는 점차 감소한다는 이론이다. 아파트에 입주할 때 첫 순간의 감격은 무척 컸겠지만 살면서 처음의 감격을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4시간 사는 지내는 곳이니 무덤덤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의 춤, <세월이라는 음악의 춤>        

   

<세월이라는 음악의 춤> (니콜라 푸생. 1635~1640년경)   @ wikiart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네 사람이 있다. 단순히 춤추는 장면을 그린 작품일까? 춤추는 사람들 외에도 날개 달린 노인, 심상치 않게 생긴 돌기둥, 구름 위에 있는 인물들과 마차들... 춤추는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다.     


 17세기의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1594~1664. Nicolas Poussin)의 <세월이라는 음악의 춤>이라는 작품이다. 푸생은 이와 다르게 고전주의를 추구했다. 이전 시대인 르네상스 시대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 또는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하여 균형감 있고 안정된 분위기의 그림을 그려내는데 주력했다. 위 작품 역시 신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과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니콜라 푸생(1594~1664) @wikiart

 

그림의 오른쪽,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노인은 ‘사투르누스’라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시간의 신이다 (사투르누스라는 이름이 영어권으로 가면서 토성을 뜻하는 Saturn이 되었다). 농경의 신이기도 하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크로노스라고 불리는 제우스의 아버지다. 


 사투르누스가 의미하는 시간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이다. 하루라면 해가 뜨고 지면서 생기는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태어나서 늙고 죽을 때까지 주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국 모든 시간은 처음과 끝이 있게 마련이다. 사투르누스가 연주하는 ‘세월이라는 음악’도 마찬가지다. 시작이 되었다면 언젠가는 끝이 있는 것이다. 그의 옆에 있는 아기 역시 아기의 형상을 한 천사로, 모래시계를 들고 있다. 이 역시 유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림의 왼쪽 구석의 아기 천사가 들고 있는 비눗방울 역시 곧 터지고 사라질 시간을 뜻한다. 


시간의 유한함을  의미하는 사투르누스와 아기 천사들


 비눗방울을 가지고 노는 아기 천사 뒤에는 돌로 된 기둥이 하나 있다. 기둥의 꼭대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두 개의 얼굴 중 한쪽은 젊은이의 모습이, 다른 한쪽에는 노인의 얼굴이 드러나 있다. 젊음과 늙음, 인간이 늙어가면서 시간이 흘러감을 의미한다. 이 돌기둥 걸려 있는 화려한 꽃목걸이 역시 아름답지만 언젠가는 시들 존재다. 


꽃목걸이를 두르고 있는 돌기둥


 이제 작품 가운데에서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의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각각의 인물들은 단순히 춤추는 사람들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욕망하거나 맞닥뜨리는 가치를 상징한다. 가장 왼쪽의 여인은 장미 화관을 쓰고 아름다운 푸른 상의를 입은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쾌락’이라는 가치를 의미한다. ‘쾌락’의 오른쪽에는 머리에 고급스러운 진주 장식을 하고 흰 옷을 입은 여성은 ‘부(副)’를 의미한다. 


'쾌락'과 '부'


 

화려한 ‘쾌락’과 ‘부’에 비해서 오른쪽에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은 다소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만 쓰고 있고, 자세히 보면 신발도 신지 않고 있다. 이 여성이 의미하는 것은 ‘가난’이다. 사실 ‘부(副)’는 ‘가난’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난’의 손을 잡지 않고 있다.  

 ‘가난’과 ‘쾌락’ 사이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남성이 있는데, 그는 영광과 승리를 의미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데,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근면’이다. 사람들은 근면하게 살다 보면 나중에 영광과 성공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월계관은 영광과 성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가난'과 '근면'


지상에서 춤추는 그들 위에는 검은 구름이 존재한다. 구름 위 마차에서 원반을 들고 있는 이는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 신이다. 태양, 빛, 음악, 예언의 신으로 그가 들고 있는 원 모양은 끝없는 영원을 상징한다. 아폴로의 오른쪽에서 이 마차를 이끄는 것은 새벽의 신 아우라다. 그녀는 장미꽃을 뿌리며 아폴로를 찬양하고 있다. 


하늘 위의 무한한 시간을 상징하는 신의 모습 

 

 

 하늘 위의 이들에게 시간은 어떤 것일까? 원모양처럼 끝이 없다. 그야말로 무한한 것으로, 지상에 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푸생이 이 작품을 통해 나타내려고 한 바는 무엇일까? 세월이라는 음악 속에서 ‘쾌락’과 ‘근면’, ‘부’와 ‘가난’. 모두가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고 근면하게 살기도 하며, 가난하기도 했다가 반대로 부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세월’이라는 연주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쾌락’ ‘부’ ‘가난’ ‘근면’이라는 가치나 상태는 큰 의미가 없다. 언젠가는 한정된 시간 속에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시한 행복의 리스트 채우기      


푸생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묵직한 교훈을 안겨 준다. 우리가 희망하는 가치나 순간적인 상태가 당시에는 대단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그래서 때로는 부질없는 것일 수 있음을 작품은 말한다.

      

내가 매달리던 새 아파트 입주, 상위권 대학, 럭셔리한 해외 생활의 꿈은 어떠했나. 나는 한 때 하루 종일 그런 것들에 대해 상상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중 현실로 이루어진 것은 많지 않았다. 되려 머릿속 청사진이 나를 좌절시키거나 불행에 빠뜨리기도 했다 - 심지어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런 것들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도 않는다- ‘조건부 행복’은 때로 꿈과 희망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건이 충족되지 않거나, 조건을 이루어도 그 만족이 기대치에 이르지 못하면 매우 허망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행복이란 하루 중에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루 중에 기분 좋은 시간이 길면 길수록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행복은 순간 속에 사라지는, 단순한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푸생의 작품을 보고 카너먼의 행복론을 들은 후,  이제 조건부 행복보다는 ‘시시하고 즉각적인 행복’을 떠올린다. 시간 속에 흩어질, 조건이 채워질지 아닐지 알 수 없는 미래의 행복보다 지금 움켜쥘 수 있는 시시하고 즉각적인 행복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현재의 내가 누릴 수 있는 시시하고 즉각적인 행복의 리스트를 작성해본 적도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요리할 때 유튜브로 음악을 켜놓고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부르는 것 

하루의 글쓰기를 마친 후 드라마와 예능 킬킬대며 감상하기  

주말에 홀로 외출해 차 안에서 여유롭게 커피 마시기 

          

 한국에 가면 실행하고픈 시시한 행복의 리스트도 있다. ‘삼겹살 도시락 시켜서 소주와 함께 먹기’  ‘친구들과 1박 2일 모임 하며 수다 떨기’ ‘깨끗한 공원과 길거리를 여유롭게 산책하기’ ‘만화카페에 가서 라면 먹으면서 만화책 보기’ 이런 리스트들은 나에게 행복의 의식과 같은 것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마음속에 욕심이 드글드글 가득 찬 인간이다. 돈 욕심도 많고, 이루고 싶은 일도 머릿속에 가득하다. 조건부 행복이 머리 밖으로 떠나간 것도 아니다. 요즘에도 “만약 ~이 이루어진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식의 명제는 머릿속을 자주 떠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부 행복이 '완벽한 행복의 길'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꿈꾸던 조건이 모두 현실이 되더라도 행복이 절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시시하고 즉각적인 행복의 리스트를 가끔 생각해본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흩어질 행복이라면, 시시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움켜쥐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누군가의 들러리로 느껴질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