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주인공 손범수는 잘 나가는 방송사 드라마국 PD다. 그가 유명 작가 정혜정의 대본을 연출하지 않겠다며 퇴짜 놓는 장면이 있다. 범수는 혜정의 글이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지 않는다며 단순하고도 명확한 이유를 댄다. 화가 난 베테랑 작가인 정혜정, 범수에게 충고를 날리려 한다.
“내가 드라마판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할게...”
순간, 범수는 갑자기 자신의 귀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한다.
신박한 방법으로 타인의 충고를 듣지 않는 범수
“아~~ 안 들어~ 안 들어~ 충고 안 들어~~~~”
참으로 신박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보조 작가 진주 역시 그의 신선한 대응에 놀란다. 마음속으로 그녀는 말한다. 와. 네가 이겼다. 모지리인데 닮고 싶어.
유튜브에서 이 장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여러 번 다시 보기 했다. 아, 이 놀라운 전개는 뭐지. 이토록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현실에서는 범수의 행동을 그대로 하고 싶어도 도무지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 신선한 것은 당연했다.
학창 시절과 직장 생활 당시 나는 대부분 상대가 하는 말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는 말도 세상에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한테 불공정한 지시인데? 이것은 나를 100% 오해하고 날리는 소리인데? 내 인격체를 존중하지 않는 무례한 말인데?황당하고 기분 나쁜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사이다로 반박을 날리는 드라마 주인공들과 달랐다. 내 귀를 손으로 두드리면서 ‘안 들어~’를 시전 할 수 있을만한 담대한 용기도 없었다. 때로는 무례한 말을 들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자리에서 순발력 있게 사이다 킥을 날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했다. 아, 그때 그 말을 날려줬어야 하는데. 밤에 잠도 안 올 지경이었다
내가 예민한 것인지, 그가 무례한 것인지 헷갈리던 시절
예민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 대부분 까칠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바깥으로 까칠함을 끝도 없이 드러내는 타입의 인간형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너의 불편함을 드러내면 ‘민폐’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끝없이 교육받고 사회화되어 온 이들도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별나고 예민한 구석을 드러내면 사랑받기 어렵다’, ‘사람이 매사를 적당히 웃으면서 넘겨야 제대로 사회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왔다. 내가 타고난 기질 중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남들에게 감정이입도 잘하는 편이었기에 타인이 불편해할 만한 행동은 미리 피했다.
이런 방식의 사회화는 훌륭한 효과를 가져왔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덕분에 나는 사회에서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으며 주변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마음 한편 타인의 무례한 말에 예민함과 불편감이 치솟을 때마다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 내가 사회에 적응 못하는 인간인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의문을 가졌다. 나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에 의문이 많았으니, 당당히 의견을 밖으로 꺼내어 놓기는 쉽지 않았다. -불편한 감정은 드러내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눈치가 살아가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도 한몫한다 생각한다- 이 역시 수용력이 있는 것으로 포장한다면 장점이 맞다. 그러나 가끔은 화병이 생겨났다. ‘이런 게 불편한 내가 비정상 일까 봐’ 따져야 할 말이 있을 때, 제대로 말을 못 하게 될 때도 있었다.
남에게 무엇을 부탁할 때도, 만남을 주선할 때도 비슷한 심리상태에 자주 빠졌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민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만나자고 조르거나 내 부탁을 들어달라고 말을 건넬 때, 그것이 상대방에게 심각한 민폐일까 두려웠다. 나를 귀찮은 사람으로 여기면 어쩌지, 거절당하면 어쩌지. 겉으로는 남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이 귀찮다고, 나는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립적인 인간이라 자부했지만 가끔은 정도가 지나쳤다. 부탁해도 타인에게 크게 민폐 끼치는 일이 아닌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몇십 번쯤 하는 일도 있었다. 어느새 ‘부탁 포비아’가 되어 있었다.
'어쩌라고'와 '아님 말고'의 위력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나는 범수처럼 멋진 또라이가 될 수는 없음을. 사이다 킥을 날릴만한 순발력도 없음을. 내 타고난 성향을 죄다 바꾸고 이미 사회화되어 있는 나를 통째로 탈탈 털어 없앤 다음, 새로운 인격체로 탄생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나는 매우 간단한 두 가지 말만 마음속에 되새기기로 했다. ‘어쩌라고’와 ‘아님 말고’.
누군가 내게 부당한 것을 요구하거나, 말도 안 되는 것을 지적하거나, 친절한 척 은근히 먹이는 말을 시전 할 때 이제는 ‘내가 예민한 건가?’ ‘내가 부적응이라 불편함을 느끼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당장 사이다 킥을 날리지 못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마음속으로 '어쩌라고'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안 들어.' '당신 말 틀렸거든요.' 이 정도만 생각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릴 때 친구들과 하던 반사 놀이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누가 나를 약 올리는 말을 했을 때, 나를 가볍게 쳤을 때, '반사!'라며 상대방에게 돌려주는 유치한 놀이를 기억할 것이다. 반사는 앙갚음하겠다는 의미에 초점이 맞춰 있지 않다. 너의 말이나 행동을 굳이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뜻한다. 그 사람의 무례한 말에 내 기분이 우울이나 분노에 젖어드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의미다.
범수가 밖으로 네 말 안 듣겠다며 귀를 쳐대는 것을 나는 속으로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모든 말을 그렇게 아니꼽게 듣는다면 사회 부적응자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고집쟁이나 꼰대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남의 말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도리어, 이상한 말에도 마음이 혼란스러운 당신에게 하는 말이다.
부탁이나 만남의 주선, 오래간만의 연락 역시 지나치게 무겁게 여기는 것이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내가 상대방에게 거절당할까 봐, 상처 입을까 봐 두려워하는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바꾸려고 한다. '아님 말고'가 필요한 순간이다. 상대가 거절해도 의외로 별일 아닌 경우도 많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사정이 있다. 지금은 누구에게 부탁을 할까 연락을 할까 고민하지만 몇십 년 후에는 생각이나 고민도 하지 않을 경우가 대다수다.
공감능력과 수용 능력이 뛰어난 것은 분명 훌륭한 능력이다. 사이다 킥 못해도 바보는 아니다. 드라마 주인공들은 쉽게 사이다 킥을 날릴 수 있다. 반면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에게, 한국에서 몇십 년간 사회화되어 온 우리에게, 내성적이거나 예민한 우리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사이다 킥을 날리기 어렵다면 ‘어쩌라고’와 ‘아님 말고’의 정신은 머릿속에 담아두자. 마음속으로 내 편을 들어줘도, 약간은 가벼워져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