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유리멘탈 개복치라는 판정을 받았다

<예민한 당신을 위한 대화 생활백서>를 시작하며

by 유랑선생

대화가 시작되자 피곤해졌다



사람들과의 단체 모임. 대화가 시작되었다. 머릿속의 고민도 함께 시작되었다


오늘의 대화 주제는 A가 주도하고 있군. B와 C는 A의 이야기가 지루한 모양이야. 그런데 음식이 빨리 안 나오니 D 표정이 조금 짜증이 난 것 같은데? B와 C, D를 함께 즐겁게 해 줄 이야기를 내가 꺼낼 시점 아닐까? 가만 보자, B는 경제와 시사 이야기를 즐기고 C는 연예인 이야기를 좋아하고, D는 유튜브 관련 대화를 많이 하는데 셋이 함께 즐겁게 이야기할만한 공통 주제가 있을까?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맥 끊듯 끊어버리면 A가 싫어하겠지? 참, 내가 뭐라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도 날 피곤하게 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피곤해졌다.




어느 날, 유리멘탈 개복치가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예민보스 테스트'를 발견했다. 인터넷에 '나의 꼰대 지수는?' '나의 MBTI 유형은?‘ 등의 심리테스트가 뜨면 무심코 해보는 터라, 이번에도 별생각 없이 테스트를 했다. 테스트 문항 18개 중에서 13개가 YES에 해당했다. 유리멘탈 개복치에 당첨.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상위단계인 '예민보스 끝판왕'은 되지 았다는 점이다.

(테스트가 궁금하다면 http://www.getggul.com/section/newsview.php?idxno=11321)


1-1. 유리멘탈 개복치.jpg
1=2. 예민보스 끝판왕.jpg
예민보스 테스트에서 가장 상위단계인 유리멘탈 개복치와 예민보스 끝판왕. 나는 유리멘탈 개복치에 당첨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놀랐다. 유아기 때까지는 나름대로 예민하고 유난스러운 아이라는 소리를 좀 듣긴 했다. 그러나 청소년기 시절 이후 스스로를 예민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매사에 둔감하고 수더분하며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라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다. 내 멘탈은 쇠심줄같이 단단하다고 믿고 있었다. '예민하다'는 것은 주변 환경에 쉽게 휘둘리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매사에 짜증을 내는 그런 성격을 말하는 것 아닌가?


억울한 마음이 들어 예민한 성격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검색해 보고, 관련 도서도 찾아보았다. 예민한 것은 주로 신경계가 각종 자극에 민감한 것을 뜻하며 이것은 타고난 기질이라고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 박사는 매우 민감한 사람을 Highly Sensitive Person, HSP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어느 나라든 인구의 15~20%는 HSP 성향을 보인단다. HSP는 외부의 소리나 빛 등에 예민하고 단체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곤해한다.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뇌의 편도체가 활발하여 새로운 자극에 강하게 반응한다.


예민함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에 대한 반박도 찾아볼 수 있었다. 보통 예민한 사람을 같이 지내기에 피곤하고 불평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민한 사람은 인간관계나 사회적 환경의 흐름이 어떤지 일반적인 사람보다 잘 읽고 대처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 타인의 감정을 잘 파악하기에 배려심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다. 타인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편이고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지능과 호기심 등이 높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우울, 외로움, 신경증, 낮은 자존감, 삶에 대한 낮은 만족도와 통계적으로 유의한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존재하였다. 주변에 있는 인간관계의 부정적인 단서들을 잘 읽어내기 때문에 쉽게 우울해지거나 인간관계에 회의적이 되고 외로워지는 일도 생긴다는 것이다.




왜 가끔 대화하면 피곤해질까



유리 멘탈 개복치라는 갑작스러운 판정 이후, 내가 어떤 상황에서 가장 예민해지는지 생각해보았다. 사실 소리나 냄새, 빛과 같은 자극에 민감한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예민한 분야는 '인간관계'였다. 물론 사회생활하는 대부분의 성인들은 인간관계와 대화에 대한 회의감과 좌절, 피로를 자주 느낀다. 그러나 나의 경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예민한 성향이 두드러졌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대화 분위기를 짚어내고 상대방의 기분이나 상황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덕분에 나름 눈치 있게 행동하고 필요한 대화 주제를 짚어 말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쉽게 피곤해졌다.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피느라 정작 대화 주제에 집중하거나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친한 사람의 무례한 발언에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 반박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례한 발언을 듣거나 재미없는 대화를 하느니 혼자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고 실제로 혼자 있는 시간을 틈틈이 만들며 지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 번씩은 반드시 혼자 있어야 하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주변인들도 있었다.


01.jpg 솔직히 눈치 보느라 대화 시간 낭비한 적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의 성향과 버릇, 쉽게 지치는 대화. 별생각 없이 넘겼던 나의 버릇과 행동이 하나의 줄로 꿰어지는 순간이었다. 유리멘탈 개복치는 그 날부터 스스로의 대화 패턴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를 피곤하게 하는 대화의 상황과 패턴이 무엇인지, 무례한 말에도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되짚어보았다.


나와 비슷한 유리멘탈 개복치나 예민보스들이 인간관계에서 가지는 최대의 목표는 덜 피곤하고 덜 지치며, 회의감이 들지 않는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닐까. 더불어 서로의 내면을 이해하고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는 건강한 관계를 이룬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인간관계의 9할은 대화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대화의 끈을 맺을 때 맺고, 끊을 때 끊고, 집중할 곳에 집중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대화의 불필요한 요소들을 머릿속에서 분리수거하는 노력도 필수다. 나를 옥죄는 완벽주의와 기대치를 버릴 필요도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 예민한 사람들이 마주치게 되는 대화 패턴이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내 이야기다. 물론 내가 남의 무례한 이야기를 다 받아칠만한 순발력과 대담성을 가진 인간이거나, 엄청난 대화기술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므로 완벽한 처방전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예민한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가 될 만한 이야기, 작은 용기를 드릴 만한 이야기를 썼다.


더불어 오랫동안 생각해본 결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거나 무례한 말에 반응을 못하는 것, 내 감정에 확신이 없는 것 등은 내 예민한 성격 탓만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예민해지는 상황 뒷면에는 우리 사회의 특유의 분위기나 상황 탓도 있다. 대화를 하며 느끼는 어려움이 생각보다 보편적인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조금씩 곁들였다. 항상 나의 예민함을 탓하다 보면 내 감정에 확신이 사라지고, 타인의 생각에 휩쓸리며, 더욱 우울해질 가능성이 높다. 나 역시 오랫동안 내가 세상에 적응하기에는 부적절한 존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휩싸인 적이 많았다. 적어도 내 고민이 보편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약간의 자신감과 용기가 생긴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어보면 좋겠다


1. 대화 도중 쉽게 지치고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느끼는 유리멘탈 개복치 예민보스

2. 스스로의 완벽주의와 높은 기대치로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들고 대화 자체가 피곤한 분들

3. 무례한 대화에 사이다 킥을 날리고 싶으나 못하고 대신 이불킥을 날리는 분들


덜 피곤하고 덜 지치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당신에게 이어지는 글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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