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30분 후, 나는 이민아 기자의 빌라 앞에 내렸다.
빌라 공동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걸 느끼고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그때였다.
3층 층계참에 이르렀을 때 야구방망이며 쇠파이프 같은 걸 들고 선 한 무리의 덩치와 마주쳤다.
덩치들은 층계참부터 4층 계단까지를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못해도 열다섯 명은 넘어 보였다.
“빨리 지나가쇼.”
덩치 중 한 명이 말했다.
아무래도 날 빌라 주민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계단을 올랐다.
그러면서 어떤 덩치가 어느 무기를 들고 있는지 머릿속에 새겼다.
4층에 다다랐다.
한 놈이 402호 앞에 서서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야! 빨리 문 열어!”
노려보는 덩치들 사이를 지나서 5층으로 향했다.
나 혼자 무기도 없이 저 많은 인원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힘으로만 붙는다면.
인간이란 자고로 머리를 써야 한다. 물론 박치기하라는 뜻은 아니고.
나는 5층 층계참에 놓인 소화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핀을 뽑고 그대로 4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내가 내려가는 소리에 덩치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나는 거기에 대고 외쳤다.
“불이야!”
동시에 소화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쉬이익!
그런 소리와 함께 소화기 분말이 덩치들을 향해 뿜어졌다.
“악!”
덩치 몇 놈이 비명을 질렀고, 4층 복도는 순식간에 뿌연 분말로 뒤덮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머릿속에선 덩치들이 어느 위치에 어떻게 서 있었는지 생생하게 재생됐다.
제일 먼저 문 앞에 서서 두드려 대던 덩치를 향해 소화기를 휘둘렀다.
퍽!
“윽!”
쇠가 돌덩이를 때리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와 그 돌덩이가 내뿜는 신음이 차례로 들렸다.
이번에는 계단 바로 아래 서 있던 덩치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
“으악!”
덩치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더 아래쪽에 있던 덩치들은 상황 파악을 못 한 상태였다.
소화기 분말 때문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문을 두드리며 집안을 향해 외쳤다.
“신기탄 수사관입니다! 빨리 나오세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자그마한 여자가 달려 나왔다.
이제는 소화기 분말도 서서히 걷혀 가고 있었다.
“이민아 기자님?”
“신기탄 씨?”
서로를 확인한 우리는 곧장 5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택시에서 내려 빌라 구조를 봤을 때 옥상에서 다른 건물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민아 기자도 그걸 아는지 군말 없이 따라왔다.
그때였다.
“이 새끼가!”
덩치 중 한 놈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내가 돌려차기를 먹이려는 순간, 이민아 기자가 한발 빨리 움직였다.
그녀는 까맣고 네모난 무언가를 덩치의 목에 가져다 댔다.
다음 순간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전기충격기였다!
덩치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픽 쓰러졌다.
“아이템 좋네요!”
내 말에 이민아 기자가 대꾸했다.
“최루 가스도 있어요.”
이 여자 역시 살아남으려고 나름 많이 준비했구나 싶었다.
5층을 지나 옥상까지 올라간 우리는 아예 문을 잠가버렸다.
얼마 안 가 덩치들이 문을 때려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나는 옆 건물 옥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로 뛸 수 있겠죠? 건너가서 밑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해봐야죠!”
이민아 기자는 그 말과 함께 망설이지 않고 옥상 난간을 향해 달렸다.
“어어! 조심…….”
내가 미처 다 외치기도 전에 그녀가 점프했다.
그러고는 가뿐하게 옆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옥상 난간 사이를 뛰어서 옆으로 넘어갔다.
“내려갑시다!”
내 말에 이민아 기자도 움직였다.
우리는 계단을 달려 1층으로 내려갔다.
결국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한 나와 이민아 기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 이민아 기자가 물었다.
“다음 계획은 뭔가요?”
“안전한 곳으로 피한 뒤에 장 계장님께 연락할 겁니다.”
“안전한 곳이 있을까요?”
“오면서 봐 둔 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동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상가 건물 3층에 있는 PC방이었다.
“여기, 괜찮을까요?”
이민아 기자가 불안한 듯 물었다.
“놈들은 우리가 이 동네를 떴을 거라고 짐작하겠죠.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PC방에 숨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할 겁니다. 게다가 여기, 시원하고 의자 편하고 여차하면 음식도 먹을 수 있으니 이만한 도망처가 없죠.”
“그러네요.”
내 말에 이민아 기자는 웃으며 동의했다.
나는 장춘자 계장에게 우리가 피해 있는 곳 위치와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메시지로 보냈다.
그러자 곧 답장이 날아왔다.
- 지금 간다.
우리는 형식적으로 컴퓨터를 켜고 나란히 앉았다.
PC방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게임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 특종을 잡았기에 이런 위험한 일에까지 휘말린 겁니까?”
내가 물었다.
그러자 이민아 기자가 대답했다.
“알면 수사관님도 위험할 텐데요.”
“그게 제 일인 걸요.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를 모으는 거.”
범정 수사관이 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허세를 떨었다.
“저도 기자라서 모든 패를 한 번에 다 꺼낼 순 없어요. 다만 이 정도는 말씀드릴게요. 이번에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킨 그 연예인의 불륜 상대가 밝혀지면, 세상이 떠들썩해 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계 판도가 완전히 바뀌게 될 거예요.”
“그 정도란 말입니까?”
“네. 상대가 아주 힘 있는 정치인이거든요. 일개 기자 정도는 우습게 제거하려 들 정도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선은 안전할 때까지 피해 있어야겠죠. 그런 뒤에는 터트릴 겁니다. 제가 알아낸 걸.”
“용감하시네요.”
“정보를 다루려면 그만한 용기가 있어야죠.”
이민아 기자는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러네요.”
나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나저나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수사관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 났을 거예요.”
“뭘요. 저도 계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장춘자 계장님. 전설적인 인물이긴 하죠.”
“계장님에 대해 잘 아십니까?”
나는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아뇨. 그저 전설처럼 들었을 뿐이에요. 기자들 사이에서도 계장님은 꽤 유명하거든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분이라고.”
“그래서 적도 많은 것 같더군요.”
“아! 그건 정보를 가진 자의 숙명이에요. 예로부터 인간은 자기보다 많이 아는 자를 싫어해 왔으니까.”
“왜 그랬을까요?”
“돈이나 권력보다 정보의 힘이 더 세니까요.”
이민아 기자의 말은 꽤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때였다.
PC방 문 열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낯익은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장춘자 계장이었다.
“양반은 못 되네요.”
내가 말하자 이민아 기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둘 다 괜찮아?”
장춘자 계장이 다가와 물었다.
“네. 이 멋있는 분 덕분에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이민아 기자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이제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자네는 정말 수고했어.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려. 내가 다시 연락하지.”
장춘자 계장은 그 말과 함께 내게 지폐 몇 장을 건넸다. 택시 타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이 정도 위험수당은 받을 만했으니까.
이민아 기자가 장춘자 계장의 SUV에 오르는 걸 보고 나서 나는 돌아섰다.
어느덧 자정이 넘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새삼 배고프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컵라면과 삼각김밥은 사놓기만 하고 손도 못 댔다.
“치킨이라도 먹을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도로 쪽으로 향했다.
아침이 밝았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과연, 장춘자 계장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 오늘은 여기로 출근해.
그 짧은 문장과 함께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 메시지 보낸 시각이 새벽 4시였다.
“이 양반은 잠도 안 자나…….”
서둘러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광화문역 근처였다.
지하철로 이동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발신번호표시제한’이라고 떴다.
순간 멈칫했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신기탄 수사관.”
상대방은 남자였다.
쫙 깔린 낮은 목소리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밝고 높은 목소리라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누구십니까?”
“당신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고 싶은 사람.”
“조언은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몰라.”
“조언이 아니라 협박 아닙니까?”
“뭐, 어떻게 들어도 상관은 없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장춘자를 조심해.”
남자가 말했다. 한층 더 목소리를 깔고서.
“이유는요?”
내가 물었다. 한층 더 심드렁한 말투로.
“장춘자가 너 같은 애송이를 왜 파트너로 삼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전 애송이가 아닙니다만.”
“흐흐.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러면 넌 그 상태로 그냥 장춘자 총알받이가 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죠?”
이번에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장춘자는 궁지에 몰렸을 때마다 파트너를 뽑았지. 그러곤 자기를 대신해 희생시켰어.”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5년 전에도 장춘자는 젊은 수사관을 파트너로 삼아서 같이 다녔지. 그 수사관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할 것 같은데?”
“그건 좀 궁금하네요.”
“장춘자가 저지른 모든 불법 행위를 대신 뒤집어쓰고 여태 교도소에서 살고 있지.”
“확실한가요?”
“못 믿겠으면 장춘자한테 물어봐. 김민수 수사관을 아느냐고. 크크.”
“그런데 그쪽은 누굽니까?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거죠?”
“나? 나는 선량한 시민이라고 해두지. 장춘자에게 당해서 분노한 피해자.”
“그쪽이 선량한 시민이라면 검찰 수사관에게 피해 입을 일은 없을 텐데요.”
“잘 들어. 장춘자는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 그 과정에서 누가 희생되든 신경도 안 쓰지.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러니 빨리 발을 빼. 놈에게서 떨어져.”
거기까지 말하고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찜찜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광화문역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장춘자 계장이 말한 곳으로 찾아갔다.
거기엔 자그마한 전통찻집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를 맞이했다.
“장 계장님 찾으시죠?”
“네.”
“이리로 오세요.”
찻집 뒤편에는 생각보다 너른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 너머에는 별채로 보이는 공간이 따로 서 있었다.
여자는 그 별채의 문을 두드린 후 내게 손짓했다.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향했다.
방에는 장춘자 계장과 다른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낯익은 남자였다.
“아…….”
나는 그 남자를 보며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남자가 먼저 일어나 내게 인사했다.
TV에서 자주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대통령 비서실장 남도민, 그게 그의 직함과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