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없는 나날이 꼭 실패는 아니야

흘러도 괜찮은 날들이 쌓인다

by 이지은

나는 계획형 인간보다는, 즉흥에 가까운 사람이다.

여행 가방은 늘 전날 밤이나 당일 아침에 부랴부랴 싼다.

일정표는 대부분 비워둔다.

한 달의 계획은커녕,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도 미리 정하지 않는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피로다.

시간을 쪼개고, 동선을 계산하고, 모든 걸 미리 정해두는 순간

설렘은 과제가 되고, 기대는 수행으로 바뀐다.

목적지를 향해가는 길조차, ‘해야 할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길을 걷다 눈에 들어오는 카페에 들어가고,

냄새 좋은 식당을 만나면 앉는다.

계획한 장소보다 우연히 마주한 순간이 더 오래 남는다.


어느 날은, 우연히 들어간 골목 안 작은 서점에서

누군가의 오래된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 한 권을 샀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기에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날이 쌓이면 삶이 조금 더 괜찮아 보인다.



돌아보면, 내 삶도 늘 그렇게 흘러왔다.

정해진 길보다는 떠밀리듯, 때로는 끌리듯

그때그때의 선택에 따라 걸어왔다.

물 위를 유영하듯, 어디에도 단단히 닿지 않은 채.

가끔은 두려웠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아왔다.


계획이 없다는 건 무책임과는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충분히 감각한다는 뜻이다.

나의 하루는 충실했고, 그 하루들이 겹겹이 쌓이면

지질처럼 단단한 시간의 층이 된다.


누군가는 루틴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누군가는 여백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그 속도와 방식이 ‘느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삶은 각자의 리듬으로 흘러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실 한때는 불안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나는 너무 게으른 건 아닐까?”

계획이 없다는 것이 마치 미성숙의 증표처럼 느껴졌던 시절.

세상은 늘 미래를 준비하라고 말했고,

나만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충분히 살아낸 하루는 실패한 하루가 아니란 걸.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사람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지금,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단단한 목표도, 장대한 계획도 없다고 해서

당신이 어디에도 닿아 있지 않은 건 아니다.


흘러가는 날들 안에도 무게가 있다.

무심하게 지나간 순간들이 쌓여

언젠가는 당신만의 층계를 만든다.


그러니 오늘도 마음 가는 대로 걸어도 괜찮다.

그 길이, 결국 당신을 데려갈 곳으로 향하고 있을 테니까. 물은 흐르지만,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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