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ragona, Valencia
다른 나라 혹은 민족의 문화에 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가장 먼저 해당 나라 나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동서문화의 충돌지역이라는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그들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스페인을 알고 이해하는데 더욱 기본이 되는 곳이다.
동서양 문화의 공존 이베리아 반도
선사시대 이베리아 반도에는 동남부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계의 이베로족 Ibero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에스파냐 원주민이며, 이들의 이름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들은 당시 그리스, 페니키아, 카르타고 등과 교류하면서 BC 1100년경에는 페니키아가 식민지로 “카디스” 항을 건설하는 등 여러 종족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각자의 문화를 이루면서 살았다.
BC600년 경에는 겔트족이 이주하여 오면서 북부와 포르투갈로 진출하고, 이베로인과 겔트족은 공존하면서 “겔티베르족”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는 지중해의 패권 향배에 따라 결국 그리스 식민지에 속하면서 지중해 문명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는 카르타고의 정복과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BC 38년 로마제국 영토에 편입된다. 편입된 후 원주민들은 로마 시민으로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로마화 되었다. 트라야누스 Trajanus 등 에스파냐 출신 로마 황제가 나온 사실이나, 에스파냐 출신 세네카 Seneca의 활약 등에서도 알 수 있다.
AD 44년 야고보가 순교하고 AD 64년부터 66년까지 “사도 바울”에 의해 에스파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다. 한편 게르만족에게 밀린 서고트족이 에스파냐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면서 415년 “서고트 왕국”을 수립하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서고트 왕국은 왕위 계승 문제로 왕족 간에 전쟁이 벌어져 300년간 32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왕위 계승문제를 가톨릭 교회에 일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에스파냐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교회의 정치 참여와 권력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711년부터 750년간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지배
결국 711년 서고트 왕국은 우마이야 왕조에 속한 베르베르인 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진 무어인 군대에게 멸망당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이슬람이 지배하게 된다. 가톨릭 세력은 북쪽 산악 지방을 중심으로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등이 자리 잡았다.
717년 가톨릭 세력은 이슬람 세력과의 “코바동가 전투”에서 첫 승리를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1492년에 완성되는 “레콩키스타” Reconquista (가톨릭의 이슬람에 대한 국토회복 전쟁)가 750년간 느리지만 지속하게 된다. 한편, 732년에는 프랑크왕국이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을 격퇴하면서 피레네 산맥이 이때부터 유럽과 이슬람의 경계가 된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된 이슬람 세력은 756년 “알안달루스 왕국”을 설립한다. “알안달루스 왕국” “톨레도 왕국” “코르도바 왕국”은 아랍인, 이베리아인, 유대인의 세 민족이 이슬람, 가톨릭, 유대교의 세 종교를 자유롭게 믿는 개방 국가였다. “코르도바”를 수도로 유대인이 금융, 의사, 법률가 등 지식인 계급을 차지하는 사회가 되었다. 당시 북부의 가톨릭 세력은 아스투리아스를 중심으로 미미한 저항만을 지속할 뿐이었다. 그러나 1031년 “코르도바 왕국”이 멸망하자 이슬람이 여러 개의 작은 이슬람 왕국으로 쪼개진 타이파 Taifa 시대로 접어들면서 세력이 약화되어 가톨릭 세력이 톨레도를 점령(1085)하고 에스파냐 민족 영웅 “엘 시드” El Cid가 등장한다.
가톨릭 세력의 최전선이자 최후의 보루 "에스파냐" 그리고 “레콩키스타” Reconquista
1212년 가톨릭 세력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본격적인 “레콩키스타” Reconquista가 시작된다. 마침 에스파냐는 교황의 명에 의하여 전 유럽적인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레콩키스타 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가톨릭 문화권은 에스파냐 최초의 “살라망카 대학” 설립 (1218년), 도미니크 수도회 설립(가톨릭 최선봉에 선 교파. 종교 재판의 재판관 대부분을 차지), 법전 편찬과 역사 정리 등 문화발전을 위한 여러 노력들을 하기도 하였다.
14세기 이베리아 반도는 아라곤, 나바레, 카스티야 이 레온, 포르투갈, 프랑스, 나스르 이렇게 6개 왕국이 지배하는 정치 양상으로 펼쳐졌다. 특히 이중 “카스티야 이 레온”은 1037년 무력으로 “레온 왕국’을 합병하고 안으로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지중해 섬까지 장악하는 힘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힘이 점점 약해진 이슬람 세력은 1238년 “나스르 왕국”을 세우고 “그라나다 왕국”으로 명맥을 이어가다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마지막 “그라나다 왕국”의 궁전이 그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이다.
1469년 10월 19일 에스파냐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세기의 결혼식이 열린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하면서 양국은 완전합병이 아닌 연합 왕국 형태로 통치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492년 마지막 남은 이슬람 왕국 ‘나스르 왕국”의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에게 항복을 한다. 이로써 에스파냐는 완전한 국토의 통일과 가톨릭에 의한 종교의 통일, 정치의 통일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바다 건너에서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명실공히 에스파냐의 영광과 축복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곳곳에 이사벨 여왕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가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태양의 제국 에스파냐의 영광 과 대항해 시대
1492년은 에스파냐 역사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해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1492년의 영광이 다시 재현되기를 기원하면서 500주년이 되는 1992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세비야 엑스포를 스페인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사벨 여왕은 지나치게 경직된 기독교 국가를 지향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하는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하는 등 종교 재판을 시작하였다. 특히 1492년 3월의 “알함브라 칙령”으로 당시 도시인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집 값 폭락과 은행 파산을 가져오고 결과적으로 사회에서 두되 집단 기능을 하던 계층이 사라져 버려 에스파냐가 농업국가로 전락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에스파냐는 대항해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고, 이사벨 여왕의 자녀들을 합스부르크 왕가, 영국 왕실, 포르투갈 왕실 들과의 혼인을 통해서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극단적 순혈령이나 가톨릭이 아니면 발을 못 붙이는 등 혈통과 종교 중심의 폐쇄 정책으로 16세기 중반에 들어 국운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더군다나 넓은 영토를 관리하기 위한 잦은 전쟁으로 경제 사정도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 (Armada)가 영국과 네델란드의 연합 함대에 패배하면서 대서양의 패권을 빼앗기고 연이어 포르투갈, 네델란드, 스위스 독립으로 이어지면서 이제 에스파냐는 유럽의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유럽 각국들의 이해타산에 따른 간섭과 전쟁(1701~1713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제 에스파냐는 남아메리카 식민지와 이베리아 본토만 남은 채 프랑스의 영향 아래 놓이는 유럽의 2류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태양의 제국의 몰락과 혼돈, 혼란의 시대
프랑스의 영향 아래 있을 때 에스파냐는 프랑스의 강요에 의해 아무 이익도 없는 전쟁에 참여해야 할 정도였다. 특히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는 프랑스의 포르투갈 정벌을 위하여 길을 내달라는 명분의 “퐁텐블로 조약”을 맺어 프랑스 군에게 에스파냐의 주요 도시를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에스파냐 백성들이 포르투갈과 함께 프랑스에 저항하는 “에스파냐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나폴레옹이 그의 형을 에스파냐 왕위에 앉히자 에스파냐인들의 “독립전쟁”은 더 치열해졌다. 스페인 화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총살”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809년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 동맹군이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에스파냐의 주요 인사들은 “카디스”에 모여 임시회의를 구성하고 1812년 입헌군주제의 ‘에스파냐 첫 헌법’을 제정 반포한다. 그리고 이 헌법에 따라 이듬해 선거로 새 의회를 구성하고 프랑스군도 에스파냐에서 완전히 몰아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에스파냐의 혼돈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왕당파 간의 권력암투에서 시작하여 왕위를 둘러싼 전쟁이 온건파 군부세력, 자유주의자들 중심의 “이사벨 파”와 보수적 왕당파, 귀족, 성직자 중심의 보수세력인 “카를로 스파”로 나뉘어 세 차례에 걸친 카를로스 전쟁으로 진행된다.
1800년대를 온통 이렇게 혼돈 속에 보내고 있을 때 바다 건너 아메리카에서는 카를로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멕시코, 콜롬비아,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등이 독립을 하게 된다.
1873년 에스파냐 의회는 투표로 공화국을 선택한다. 그러나 제1공화국의 이 기간 동안 10개월에 대통령이 4번이나 바뀌는 혼란으로 다시 헌법을 고쳐 양당 정당제를 채택한 입헌 군주제의 틀을 갖추게 된다. 그러는 사이 쿠바가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이를 지원하던 미국과 에스파냐는 전쟁을 하지만 떠오르는 신흥 강국 미국에 일방적으로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 전쟁의 패배로 쿠바가 독립하고, 에스파냐는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 괌을 미국에 양도하게 된다.
1893년 모로코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에스파냐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리프 전쟁(에스파냐, 모로코 간 전쟁)을 세 차례나 한 후 1898년 이후에 에스파냐에게 남은 해외 영토는 모로코의 세우타, 멜리야, 서 사하라, 적도 기니 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켰던 스페인은 이 기간 중 경기 활성화의 혜택을 잠시 누릴 수 있었다.
1923년 리베라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7년간 독재정치를 한 후 독재에 대한 반발과 경제공황 때문에 파리로 망명하자 공화파와 군주파 간의 대립이 벌어졌다. 그 결과 1931년 에스파냐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한편 1933년 당시 세계 역사에서는 히틀러, 무솔리니, 살리자르 등의 파시스트가 등장하게 된다.
1936년 총선 결과 진보 좌파인 “인민전선”(사회주의, 공산당, 노동자 단체, 공화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의 근소한 차 승리를 인정치 않고 보수 우파인 “국민전선”(왕당파, 극우 파시스트, 자본가, 지주, 교회 성직자, 군부세력 및 기득권층 중심) 간에 파업, 폭동, 테러 등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에스파냐 내전은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어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가 지원하는 “국민전선” 과 소련, 멕시코, 국제여단(의용군)이 지원하는 “인민전선”과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의 전쟁을 배경으로 나온 소설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며, 탄생한 그림이 피카소의 “게르니카”이다. 당시 헤밍웨이 외에도 조지 오웰 등 53개국 32,000여 명의 젊은이들이 국제여단 의용군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1939년 4월 에스파냐 내전은 “국민전선”의 승리로 끝나 프랑코의 36년 철권정치로 이어졌다.
새로운 도약과 민주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켰던 에스파냐는 한국 전쟁 후 친 서방 정책을 폈고 1970년대에 농업 국가에서 관광 국가로 변화되었다.
1975년 프랑코 사망 후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1978년 의회 군주국 가이며 민주적 법치 국가 정체의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새 헌법에서 바스크, 까탈루냐 등 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노동조합과 정당 활동을 보장하는 민주화를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1981년 2월 23일에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나 국왕이 단호하고 확고한 수호 의지로 좌절시켰다. 이를 23-F라고 하여 에스파냐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날로 기념하고 있다.
1982년 NATO에 가입한 에스파냐는 1993년에 출범한 EU연합 출범 15개국 중의 하나이다. 2002년부터는 유로화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과 함께 유럽 경제의 빅 5로 성장하고 있다.
2018년 1월 1일 바르셀로나 외곽의 호텔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오늘 계획이 2개 도시를 들르는 것이어서 서둘러 아침 7시 30분에 호텔을 나왔다. 새해 아침이어서인지 호텔 로비와 식당에는 투숙객들이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로마의 영광과 흔적이 남아있는 Tarragona
첫 번째 목적지인 “타라고나” Tarragona를 향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를 따라 남서쪽 방향으로 80여 km 떨어져 있는 “타라고나”는 로마 제국이 스페인에서 최초로 제국의 거점으로 삼은 도시로서 바르셀로나의 시원(始原)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의 통치 시절에 번영하기 시작하여 무어인들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가톨릭에 탈환된 뒤 아라곤 왕국의 주요 도시로 활력을 되찾으면서 스페인 왕들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보루 역할을 한 곳이다.
“타라고나”의 시내 중심지 람브라 노바 Rambla Nova 광장의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에 나오자마자 광장 가운데 있는 “인간 탑 쌓기 기념비” Monument als Castellers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 “타라고나”가 바로 “인간 탑 쌓기 대회”의 개최지이며, 현재도 2년마다 타라고나 투우 경기장에서 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이런 기념비를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인간 탑 쌓기”는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으로 인정받은 전통 축제로 100 ~ 200여 명의 인원이 힘을 합쳐 가장 높은 탑을 쌓는 축제이다.
광장을 지나 로마시대의 유적지들을 찾아 언덕으로 올라갔다. 인적 조차 없는 골목길을 고대 로마의 자취를 쫓아 올라가다 보니 “요새”인 Passeig Arqueologic 가 나타났다. 아뿔싸! 공휴일이어서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요새 주변만 둘러보았다. 고대 로마시대의 성벽과 14세기 ~ 18세기 중세 시대의 방어 시설이 함께 있었다.
요새에서 지중해 해변가에 위치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로마시대 검투사 경기장 인 ”암피테아트레 공원” Amfiteatre de Tarragona으로 갔다. 가면서 “타라고나 성당”도 잠깐 보았다. 검투사 경기장 역시 공휴일이어서 공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경기장 바깥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어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경외의 눈으로 구석구석 밖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경기장에서 타라고나 역까지는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Balco del Mediterrani 였다. 전망대 위에 타라고나의 고급 호텔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타라고나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 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면서 쉬엄쉬엄 새해맞이 산책을 하였다.
로마시대 거리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Forum local Roma”를 찾아서 갔지만 주택들로 둘러싸인 이곳에서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보기만 하였다. 외곽에 있는 수도교로 가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가는데 길 옆 빵집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빵 가격이 정말 쌌다. 오늘 점심은 발렌시아로 가는 차 안에서 빵으로 먹기로 하고 빵을 사 들고 주차장으로 갔다.
타라고나 외곽에 있는 2세기 로마 시대에 지어진 “악마의 다리” Pont del Diablesms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로마 수도교 “레스 페레레스 수도교” L’aqueducte de Les Ferreres로 갔다. 고속도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 수도교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인류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산과 함께 숲 속에 있는 풍경이 멋졌다. 입장료도 없고 27m 높이의 수도교에 직접 올라갈 수도 있었다. 유명한 세고비아 수도교는 올라가지 못하는데…… 수도교에 직접 올라가 물이 흘러가는 깊이를 보니 로마인들이 얼마나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는지 실감이 났다. 이 수도교는 “플랑콜리 강”의 물을 “타라고나”까지 끌어가는 25km의 수로였다고 한다. 18세기까지 사용하였는데 현재는 217m만 남아 있는 다리이다.
“타라고나” 수도교 옆 고속도로를 타고 “발렌시아”로 향했다. 스페인의 고속도로는 제한속도가 시속 130km였다. “타라고나”에서 ‘발렌시아”까지 대강 250km 정도의 거리였는데 고속도로를 다니는 차들이 거의 없어 자칫 하면 과속을 하게 되었다. 전방에 움직이는 물체가 없다 보니까 운전 피로도도 굉장히 높았다. 졸리는 데다가 직선 주행거리에서는 헛것이 보이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휴게소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이동을 하였다.
“예술 과학 공원과 발렌시아 대성당”
구도심에 있는 발렌시아 대성당 앞 “레이나 광장” 지하 주차장으로 바로 갔다. 우선 예약한 아파트의 열쇠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나 광장으로 나와서 전화 통화를 하며 찾아간 곳은 여행사 사무실이었다. 현지 숙소 대여, 렌터 카, 관광 가이드 등의 일을 하는 현지 회사였다. 잠시 사무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많은 여행객들이 드나들었다. 스페인은 구도심 가까이에 있는 주택들을 리모델링해서 대여해 주는 사업 –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서는 “아파트먼트”로 분류하고 있었다 - 이 성행하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간 우리가 묵을 숙소는 레이나 광장 바로 옆에 “발렌시아 대성당”이 창문으로 보이는 리모델링한 주택의 3층이었다. 방도 깨끗하고 좋았다. 물론 가격도 저렴했다.
“발렌시아” Valencia는 BC 138년 로마 제대 군인들이 정착하면서 시작한 도시로 1021년 “무어족”인 “발렌시아 왕국”의 수도였다가 1238년 아라곤 왕국에 점령되었다. 그 후 1497년 카스티야 왕국에 통합되어 발달하면서 예술도 번창한 곳이다. 스페인 내란 시에는 “왕당파”의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인구 약 80만 명으로 지중해성 기후를 지닌 스페인 제3의 도시이다.
1인당 생산액이 2011년 기준 약 28,141달러로 스페인 평균보다 높은 지중해 서부 최대의 항구이자 스페인 최대의 물동량을 가지고 있다. (수출품의 약 20%를 취급하고 있다) 1499년 설립된 발렌시아 대학이 있으며, 공용어로 스페인어와 발렌시아 어를 사용하는 스페인 대표 요리 “파에야”의 발상지이다.
차에서 짐을 옮긴 후 숙소에서 나와 “예술과학 공원” 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으로 갔다. 이곳 출신의 유명한 현대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하프 모양의 누워있는 다리"부터 박물관, 과학관, 천체관, 레이나 소피아 오페라관, 식물관, 수족관 등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사람 입모습, 투구, 돌고래, 우주선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오페라관의 경우 무당벌레처럼 수면 위에 떠있는 사람의 눈을 표현한다. 넓은 공원을 천천히 걸으면서 돌아보았다. 야경이 예쁠 것 같아 해가 질 때까지 천천히 곳곳을 둘러보면서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새해를 맞이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해서 시 청사 앞으로 나갔다.
시청 앞 광장을 둘러본 후 세계문화유산인 “발렌시아 대성당”을 밖에서라도 보기 위하여 다시 레이나 광장 방향으로 돌아 걸었다. 대성당은 13세기 후반 이슬람의 모스크(사원) 자리에 건설을 시작해서 14세기 말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주변 골목골목을 돌다 보니 작은 피자집이 보였다. 우리도 신년 파티를 하기 위하여 피자 한판을 샀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 “미켈레 탑”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2018년 1월 1일 밤 우리들의 신년회는 발렌시아 대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피자를 먹는 것으로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