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치료 제대로네
지난주부터 몇 번에 거쳐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낯선이 들에게 날카로운 직언을 듣고 있다. 그 자리에 스스로 자처해서 나갔으니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대체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최근 겪은 여러 힘든 일들로 에너지가 바닥인 상태라 딱히 더 설명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래도 몇 마디 변명은 늘어놔 볼걸 하는 후회가 된다. 그랬다면 쏟아지던 비판이 조금은 줄었을까.
잔뜩 구겨져 버린 기분을 가지고 며칠을 되새김 질을 하다가 문득 과거에 저지른 아직도 생각하면 이불킥인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약 10여 년 전, 대학원을 마치고 갓 취업을 한 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회사의 낙후된 시스템을 갈아엎어줄 젊고 똑똑하지만 싼 가격으로 쓸 수 있는 뉴페이스를 담당하고 있었다. 회사를 좀 다녀본 사람들은 알 거다. 이 신입이 들어오기 전부터 팀원들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미뤄놨으며, 기쁜 마음으로 해치워줄 신입에게 역시 네가 최고라는 말을 해주는 것은 단지 내 부탁을 먼저 들어달라는 얘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 한창 AI를 활용한 투자가 월가에서 유행을 했고 회사에서도 AI 전담팀을 만들어 투자에 활용하겠다는 프로젝트가 야심 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증권업은 처음이었던 프로젝트 리더는 업무 이해를 위해 각 팀을 돌면서 인터뷰를 진행했었는데 우리 팀에서는 가장 가방끈이 길다는 이유로 대리 나부랭이인 내가 어쩌다 실무진대표로 미팅에 들어가게 됐다.
AI로 박사학위에 해외 포닥까지 화려한 경력을 먼저 늘어놓는 프로젝트 리더에게 왠지 모를 반감이 들었던 걸까. 팀원들의 우쭈쭈에 어깨가 한없이 올라갔던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거침없이 내 생각을 얘기하고 말았다.
"증권업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 같은데 AI를 활용한 투자가 왜 뜬구름 잡는 소리냐면 현업에서는 이런 이유로 어렵고 백업에서는 이런 이유로 아예 불가해서 아마도 제대로 이쪽 업계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을 거예요. 학계에서 바라보는 이상향과 현업의 차이는 생각보다 커요. 뭘 하시려는 지는 알겠는데 힘들 겁니다."
기억을 떠올려 다시 쓰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설사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저렇게 말을 하면 안 됐다. 무슨 내가 회사에서 진행하는 이 소모적인 프로젝트를 멈추게 하는 특명이라도 받은 것 마냥 (내 기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심지어 미팅을 끝내고 나서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드린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했다. 내 말을 참고 삼아 제발 저 불필요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길 바랐다.
저렇게 자랑스러웠던 일이 이불킥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회사에 적응해 갔고 저 프로젝트가 존재해야만 했던 뒷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당연하겠지만 프로젝트 리더는 나보다도 훨씬 더 프로젝트의 낮은 가능성에 대해 인지를 하고 있던 상태였다. 각 팀을 돌면서 진행한 인터뷰는 새로 들어온 이사가 회사를 파악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분이었고 주제는 아주 형식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미팅에서 묘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늘어놨던 말들은, 같이 미팅에 들어갔던 팀장님께 뭐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나의 치기 어린 마음에서 우러난 결국 상대방의 기분만 나쁘게 만든 괴변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 대해 후에 팀장님께 여쭤봤는데, 이렇게 대답을 해주셨다.
"네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지. 근데 언제나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온건지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해. 그냥 가볍게 얘기하며 안면을 트고 싶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조금은 다른 얘기를 듣고 싶었을 수도 있어. 사람마다 다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너 그때 미팅 그렇게 끝내고 나니까 그 사람들 다시 못 만나겠지?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고 상황이라는 건 언제나 바뀔 수 있어. 우리 업무에 직결된 게 아닐 땐 여유를 갖고 힘을 좀 빼도 돼."
왜 이 에피소드가 떠올랐을까.
지난주 미팅을 했던 분은 퇴사한 지 얼마 안 된, 회사 밖에서 반드시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열정이 타오르는 사람이었다. 만나자마자 나의 얘기를 대충 듣고는 이미 나의 sns계정을 훑어봤기에 나에 대해 다 안다는 식으로 얘기를 꺼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었지만 듣는 내내 나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나에게 공격적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는 걸까? sns계정 본 게 다인데 나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지금 이 사람은 본인의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 스스로 우월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때쯤, 뜬금없이 자신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며 본인의 삶이 얼마나 계획적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불필요한 정보의 남발로 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미팅 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업계 정보를 까발려 준 사람도 없었기에 나름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생각하며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이상하게 그분이 모습이 잘 잊히지가 않았다. 분명 그분도 좋은 의도로 그런 말씀들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초보자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왜냐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나왔으니까.
나이를 꽤 먹었는지 갈수록 나도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줄 일이 생긴다. 상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자리조차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해줄 꼭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는 더 신중하게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반드시 옳은 것은 없다.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행동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