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20년>을 읽고
엄마가 되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세 가지의 젠더가 존재했다. 남성, 여성 그리고 엄마. 사회의 남성과 여성은 그 일원이 되어 앞을 향해 전진한다. 그러다 눈이 맞아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출산과 동시에 여성은 '엄마'라는 제3의 성으로 탈바꿈한다. 기혼자 남성은 미혼일 때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가 된 여성은 사뭇 다르다. 가슴으로 불리던 은밀한 신체 부위부터 아이의 밥통이 되어 황홀하지만 쳐진 젖가슴은 모유 수유의 표창이리라.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주 양육은 '엄마'의 몫이다. 아이의 성적표는 곧 엄마의 성적표가 되어 엄마는 아이의 학업에 더욱 매진한다. 교육의 본질은 잊은 채, 경력이 단절된 본인의 인정을 위해서인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인지 모를 채찍질을 감행한다. 엄마는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던 작은 아이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엄마의 그늘 밖으로 멀어져 감에도 엄마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그 존재를 잊지 못한다. 여전히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머물길 바란다. 엄마에게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바친 전부였고 자신보다 더 사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모성. 여성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면서 아기를 끔찍이 생각하는 그 마음은 본능이리라. 아이는 고귀하고 소중하다. 거기다 나를 꼭 닮은 작은 사람이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이는 내가 아닌 또 다른 생명체다. 여성은 엄마가 되면서 자신의 끼니는 차치하고 남편과 아이의 식사를 챙기는 데 여념이 없다. 내 인생에 주연은 아이도 남편도 아닌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로 하는 세 아이의 엄마라서 익히 알고 있었던 바다. 아침을 먹이고 치우고 세탁 건조기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다섯 식구의 빨래를 개킨다. 간단한 과일을 먹이고 점심을 준비하여 먹이고 치운다. 고무장갑을 벗자마자 간식을 대령하고 집 안을 치우다 보면 저녁을 할 시간이다. 저녁상을 치우고 나면 아이들을 씻기고 책 한 권씩 읽고 나면 비로소 세상이 고요해진다. 간략하게 나의 일과를 나열해 본다. 현재 아이들의 방학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아이들과 생활하는 일상에서 '나의 시간'이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바라는 순간 육아는 더 힘들어진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되었으면 응당해야 하는 것, 이것은 엄마의 특권이다. 쌓인 업무 속에서 아이들에게 벅찬 사랑을 받는다. 매일 엄마와 함께하는 일상에서도 엄마가 보고 싶어 한 번씩 와락 안기는 아이의 허그, 아이의 세상의 전부는 다름 아닌 '엄마'다. 유한한 이 시간을 나는 즐기기로 결심했다.
엄마인지라 육아 서적은 100권을 훌쩍 넘게 일독했다. <엄마의 20년>은 육아와는 거리가 먼 성공 처세술이다. 그러나 그 강렬한 '페미니즘' 색채는 엄마인 내가 읽어도 조금은 불편했다.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 남편이 쉬는 주말,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자기 계발을 하고, 남편 몰래 남편의 월급으로 자기 계발을 하라는 구절 등은 동의할 수도 없으며 크게 반감이 들었다.
오롯한 육아는 길어야 한 돌 내외일 것이다. 출산한 지 일 년이 흘렀다면 아이는 대개 어린이집에 다니게 될 것이고 '전업맘'은 아이가 기관에 있는 시간 동안 온전한 내 시간을 가지면 된다. '워킹맘'은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 등을 활용하여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아이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소속되어 있지만 엄마와 그리고 가족과의 시간을 갈망하고 또 갈망한다. 워킹맘이라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더욱 없을 것인데, 그 소중한 주말을 또 남에게 맡겨서까지 자신에게 매진해야 하는가.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엄마가 나간다면 남편은 언제 쉬어야 하는가. 주말은 재회의 시간이다. 평일 내내 바빠서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가족 완전체가 모여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일상을 나누는 시간. 나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도 중요하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삶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