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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Aug 13. 2024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그러면 치킨도 안 먹어요?>를 읽고

 10여 년 전,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으로 비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채식 3년 차 임신을 하면서 간헐적으로 육식을 먹는 플렉시테리언의 채식을 하지만 여전히 채식을 지향한다. 이전에도 육식을 즐기진 않았으나 식탁에 오르내리는 '고기'들이 한때는 살아있던 동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갈비, 치킨, 닭강정, 돈가스, 사골 등은 흔한 주식의 풍경이었고 그것들과 살아 숨 쉬는 농장의 동물을 연결해 본 적은 없다. 우연히 공장식 축산의 실태를 보고하는 영상을 본 것이 화근이었다. 농장의 동물이라 하면 드넓은 초원의 목가적 풍경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때론 눈부신 햇살을 이불 삼아 여유 있게 낮잠을 취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동물 농장은 전부 소멸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돼지는 우리의 생각보다 똑똑해서 배설하는 곳과 잠자는 곳을 구분한다. 돼지가 흙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는 행위는 그들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식으로 본능에 의한 행동이다. 먹기 위해 길러지는 동물에게 자연 교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퇘지의 생식기에서 받아낸 정액을 암퇘지의 뱃속에 넣는다. 인공 수정은 더 많은 새끼 돼지를 낳을 수 있으므로 양돈업자에게 큰 이득이다. 인공 수정 후 출산하게 되는 돼지의 수는 30마리 전후다. 새끼 돼지 중 태생부터 약한 돼지는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쳐 죽일 수 있다. 합법이다. 남겨진 새끼 돼지는 이빨을 뽑고 꼬리를 자르고 수퇘지의 경우 생식기도 자른다. 마취는 필요하지 않다. 돼지의 고통은 양돈업자의 이익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한 달 남짓 암퇘지의 모유를 먹은 새끼 돼지는 10년에서 15년 생존할 수 있지만 공장의 돼지들은 6개월이라는 짧은 생을 도살장에서 마감한다. 6개월 동안의 삶은 어떠한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은 사육장은 몸을 좌우 앞뒤 어느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현대판 홀로코스트가 공장식 축산가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돼지의 움직임은 고기의 무게를 줄여주므로 돼지에게 넓은 공간은 사치다. 본능적으로 똥오줌을 가릴 수 있는 돼지는 오물이 뒤섞인 채 밥을 먹고 암모니아 냄새가 가득한 공간에서 생의 전부를 바친다. 


 양계장도 양돈장과 다를 것은 없다. 태어나자마자 부리를 자르고 날개 한 번 펼쳐볼 수 없는 좁은 케이지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수평아리는 산 채로 분쇄기에 갈리고 암평아리는 알을 낳는 기계로 평생을 살다가 삼계탕용 닭으로 마트에 진열되리라. 양계장의 불은 밤에도 꺼지지 않는다. 닭들이 밤낮 구분 없이 알을 낳고 많이 먹어서 살을 찌우게 하기 위함이다. 더욱 비대해질 닭 가슴살을 생산해 내기 위해 닭들의 먹이는 살이 잘 오르는 옥수수 등으로 구성된다. 비대해진 몸의 무게로 인해 닭들의 다리는 골절이 되고 위에서 떨어지는 동료의 분변을 맞아 피부 질환에 시달린다. 닭들의 상해 또한 양계업자의 이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인공 수정을 위해 정자를 채취하고 암소의 몸에 넣는 행위는 강간이다. 젖소는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우유 만드는 기계'로 전락한다. 새끼 소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분리되어야 한다. 젖소의 젖은 새끼 소를 위한 것이 아닌 사람을 위한 것이므로. 우유 생산 능력이 떨어진 젖소의 마지막 행선지는 도축장이다. 이산화탄소가 가득한 가스실이 가장 인도적인 도축 방법이라고 하지만 가스실에 들어선 소의 내장은 지독한 가스에 파열된다. 다른 방법으로는 머리에 총을 겨냥하는 방법이다. 사람이 하는 방법으로 실패할 확률이 높아 절단된 소의 머리들을 보면 총구 수가 다양하다. 다양한 방법으로 소를 기절시킨 후 목을 칼로 찔러서 피를 빼고 뜨거운 물에 사체를 담근다. 간혹 기절이 잘되지 않아 이때까지도 살아있는 개체를 목격할 수 있다. 


 채식은 좋고 육식은 나쁘다는 이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육점에 보기 좋게 진열된 붉은색 고기가 한때는 살아있었던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식탁 위에 오르내리는 양념에 버무려진 그것들이 동물의 사체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사육하고 도축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도 산업화로 지구가 병들고 있다. 오염된 지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에게 먹히기 위해 생산해 내는 공장식 축산이다. 또한 인간의 이기로 기계처럼 취급받는 공장식 축산 동물들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본능에 위배되는 환경, 자신의 동료를 갈아 넣은 사료, 사체와 분변으로 뒤덮인 사육장, 성장촉진제와 항생제가 들어간 동물의 식사는 분명 인간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다. 더 이상 동물의 사체는 고단백 식사가 아니다. 건강한 동물만이 건강한 고기를 내어줄 것이다. 이처럼 풍요로운 먹거리가 존재했던가. 오늘날 우리는 과잉 공급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의 식습관을 돌아보고 의식적으로 먹거리를 진단하라. 한 끼의 채식은 본인의 건강뿐 아니라 공장식 축산업의 환경을 개선하고 보다 행복한 농장의 동물을 그린다면 허황된 꿈일까. 먹는 것은 분명 자유다. 그러나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을 죽여도 괜찮은 것인가. 그렇다면 동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개인은 똑똑한 소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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