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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Essay

서늘하고 눈부신 것

<흰>을 읽고

by 아리스

달콤하고, 동심의, 추억이 가득한, 하얗기만 한 솜사탕과 흰 것은 다르다. <채식주의자>에서 세상은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여 있었다면 <흰>에서 흰 것은 생명과 죽음이 소슬하게 베여있었다. 갓 태어난 생명에게 흰색의 배내옷을 입히고 온기가 가신 주검에게 흰색의 수의를 입히는 것처럼. 아기에게 좋은 것 예쁜 것만 주어도 인간의 육신은 반드시 무너지고 부귀영화에도 끝은 존재한다. 세상은 흰 것으로 시작하여 흰 것으로 끝이 난다.


흰 종이에 검은색 글자를 써넣어 한 권의 책이 탄생한다. 흰 캔버스에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의 다채로운 색감의 붓을 휘갈겨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 '흰'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배경이 된다. 그러나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더럽혀질 수가 없는 것이 바로 '흰'이다.


붉은 환부에 흰 연고를 바른다. 흰 거즈로 상처를 보호한다. '흰'은 아픔을 치유하고 붉은색을 흰 것으로 여미는 힘이 있다.


소란스러운 세상마저 고요하게 만드는 흰 눈, 흰 눈이 드리운 풍광은 아름답고 그것의 감촉은 보드랍다. 그러나 맨 살에 닿는 흰 눈은 말단을 마비시킬 정도의 강력한 차가움을 지니고 있다. 희게 빛나는 소금이 상처에 닿는 것처럼 '흰'은 서늘하다.


어떠한 현상을 바라보기 전에 편협한 사고가 드리우는 경우가 있다. 흰색에 대한 나의 시각도 그러했다. 흰 것은 깨끗하고 밝은 것, 그렇기 때문에 쉽게 더럽혀질 수 있는 것, 그리고 하나의 색깔이었다. 작가는 깨끗하기만 한 하얀색이 아닌, '흰'에 대해 쓰고 싶었다. '흰'을 통하여 언니에게 더운 피가 흐르는 몸을 빌려주고 싶었다.




IMG_8357.HEIC 흰 | 한강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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