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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Feb 10. 2021

어머니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위대하다.

152cm인 우리 엄마가 해준 어부바

“우와 진짜 대단하시다!”
“그니깐! 역시 아버지의 힘 크으~”
 
친한 언니와 등산을 하던 중 거친 숨소리가 뒤에서  돌아봤더니, 우리가 방금 올라왔던 그 가파른 언덕을 어떤 아버지가 올라오고 계셨다. 무려 자신의 딸을 등에 업은 채로. 언니와 나는 단지 산을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딸을 업고 올라오시다니. 등산하다가 보면 이런 광경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볼 때마다 아버지들의 힘에 감탄사밖에 안 나올 뿐이다. 하지만 비단 아버지들뿐만일까. 어머니들의 힘도 실로 대단하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였다. 워낙 편식도 심했고 양도 적었기에 유치원생이었을 때는 선생님들이 음식을 조금씩만 주시거나, 내가 음식을 남겨도 “다음에는 한번 조금만 더 먹어보자”라는 말씀만 하셨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그런 자비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식판에 담긴 음식은 전부 다 먹어야 했다. 밋밋한 회색 색깔 식판에 반찬받을 때마다 왠지 식판에 담긴 반찬도 회색 맛이 날 것 같아서 정말 너무 먹기 싫었만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했다. 론 선생님께 말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지금까 여자 선생님만 보아오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 선생님 담임으로 배정받숫기 없는 나는 안타깝게도 그런 질문은 꺼낼 수조차 없었다. 식을 다 먹는 것보다 선생님께 뭔가 물어보는 게 그 당시에는 더 어려웠기에. 하지만 그런 것을 알 턱 없는 담임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식판에 있는 음식은 꼭 다 먹어야 한다며 많이 먹어야 튼튼해지고 키 큰다고 거듭 강조하셨고, 어린 나는 속으로 ‘나는 벌써 키 큰데.’라는 생각만 한 채 식판에 무지막지한 양의 음식을 받아올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보통 초등학교 점심시간은 1시간이었지만  점심시간거의 2시간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선생님은 음식을 남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끝나도 만약 식판에 있는 음식이 남아있으면 우리를 자리에 앉혀놓고 음식이 다 사라질 때까지 먹게 하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처럼 편식이 심하고 양이 적은 아이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힐끗힐끗 서로를 바라보면서 동지애 아닌 동지애를 느끼며 입안에다가 꾸역꾸역 음식을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항상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들 중에 나처럼 양이 적고 편식이 심한 애들은 없었기 때문에 보통 그 아이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점심을 남아서 먹었다면 나는 일주일에 거의 네 번은 남아서 먹기 때문이다.
 
위가 작아서 잘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매일 억지로 먹다 보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다른 애들은 점심을 다 먹은 후에 남은 시간 동안 축구나 공기를 하면서 노는데 나는 왜 음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건가.


초등학생인 나에게 급식시간만큼 큰 고통은 없었기에 하루는 엄마에게 급식 시간이 너무 싫다고 불평하며, 혹시나 엄마가 선생님께 한마디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봤지만, 엄마도 내심 나의 편식하는 습관을 고치고 싶으셨는지 나에게 그래도 계속 먹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를 다독이셨다.


하지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한 달에 두 번은 반 아이들 엄마 중 한 명이 오셔서 급식을 배식하는 날이 있었는데 그때 일이 터진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 아줌마께서도 다른 아줌마들처럼 배식을 해주셨는데 초등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되게 사교성이 좋으셨다. 요즘 말로 “인싸 중 핵인싸"라고 표현하면 정확하지 않나 싶다. 어쨌든 저 정도로 사교성이 좋으신 아줌마면 왠지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나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좀 적게 달라고 말해야지.'


드디어 내 배식 차례가 되자 다른 애들에게 말 거는 것처럼 나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걸며 맛있게 먹으렴 하며 음식을 주시는데 그때 날 보시더니, “어머 너는 왜 이렇게 말랐니? 넌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줄게! 많이 먹으렴!”이라는 말과 함께 재빠르게 음식을 한가득 떠주셨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 한 채 음식을 한가득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행히 밥과 반찬들은 다른 때에 비해서 괜찮았지만 국이 문제였다. 콩나물국이나 된장국 같은 건 먹을 수 있었지만 유부국이 나온 것이다. 태어나서 유부국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 먹는 음식을 이렇게 많이 주시다니.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 회색빛 식판은 벌써 유부들로 가득 차 버린 상태였다. 나에게 유부은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국에 둥둥 떠다니는 축 쳐진 유부를 보자니 스펀지 같았고 입으로 가져가서 유부를 오물오물 씹자니 적신 스펀지를 먹는 것 같았다.
 
“웩” 토를 하지는 않았지만 자꾸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건 정말로 먹지 못할 음식이었다. 옆에 앉은 짝꿍이 자꾸 웩웩 소리를 내는 나를 보고 놀랐는지 선생님에게 “선생님! 아리가 토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선생님이 깜짝 놀라서 달려오셨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내 의견을 말했다. “선생님, 이건 정말 못 먹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진짜 토를 한 게 아니고 겨우 ‘헛구역’ 질이란 걸 깨달으시고는 “아리야, 괜찮아. 이것도 꼭꼭 씹으면 먹을 수 있어. 아! 유부초밥 알지? 그거랑 똑같은 건데 그냥 국에 있는 거야. 꼭꼭 씹어서 다 먹으렴. 그러면 오늘도 밖에 나가서 못 논다.” 절망스러웠다. 이번에 넘어가실 줄 알았는데. 내가 안 괜찮은데 뭐가 괜찮다는 거지. 심지어 유부초밥이랑 유부국이랑 비슷하다니. 맛이 완전히 다른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음식을 남기는 건 절대로 용납 못하셨고, 결국 나는 다른 때보다도 더 길게 무려 3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앉아서 유부국을 다 해치워냈다.
 
그렇게 적신 스펀지 맛이 나는 유부국을 억지로 먹은 후 하교 시간이 되어 집에 가는데 슬슬 위가 아파왔다. 그러더니 식은땀까지 얼굴에서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아까 점심시간 때 먹었던 그 유부들이 내 장기에서 무지막지하게 불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왠지 무섭기까지 했다. 일단 집에 도착해서 빨리 엄마에게 아프다고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엄마에게 “나 너무 아파. 데리로와줘”라는 문자나 전화를 했을 테지만 그 당시 초등학생들은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단지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집을 향해 걸어갈 뿐. 정말 말 그대로 이 악물고 엄마에게 도착했다. 그때 엄마는 작은 동네 슈퍼를 하고 계셨는데, 안에 있거울에서 내가 들어오는 모습이 비쳤는지 내가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기도 전에 “아리 왔니?”라고 말을 건네셨지만, 그 순간 엄마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셨다. 내가 구부정하게 배를 붙잡고 걸으며 얼굴은 완전 사색이 되어있는 걸 보자 엄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아리야!! 왜 그래? 괜찮아?” 나도 그 말을 듣자 긴장이 풀렸는지 눈물이 줄줄 흘렀고 “엄마, 나 배가 너무 아파”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편식이 심했지만 담임 선생님 말과는 달리 나는 초등학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120cm 정도 되는 꽤 큰 키였다. 하지만 엄마는 152cm 에다가 체구도 정말 왜소하셨기 때문에 평소에도 엄마보다는 주로 아빠가 나를 업어주셨다. 하지만, 아빠는 콜밴(택시) 일을 하고 계셨고, 아빠가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나에게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까 봐 무서웠던 152cm인 우리 엄마는 120cm나 되는 나를 냅다 둘러업고 병원까지 쉬지 않고 뛰셨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던 걸까? 하지만 어머니의 힘은 우리가 항상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했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나를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소아과까지 무사히 데려갔고, 다행히도 나는 단순히 체한 것이었기 때문에 몇 시간 뒤에 괜찮아졌다.




엄마보다 훌쩍 커버려서 지금은 173cm가 돼버린 나는 엄마에게, “내가 그렇게 아프면 또 업고 뛸 수 있어?” 하고 장난스럽게 물어보자, 아직도 152cm인 엄마는 “지금은 119 불러야지 하고”하고 익살스럽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내 “만약 업고 뛰어야 한다면 뛰어야지. 우리 딸인데.”라고 대답하셨다. 이렇게 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졌고, 상상도 안 갈 만큼 대단한 것 같다.


엄마가 당시 나한테 주었던 어부바는 사랑이 너무 커서 자식인 내가 절대 따라 할 수 없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남은 평생 엄마에게 내 사랑은 담은 어부바를 해드려야겠다.


엄마, 오늘도 사랑해.

엄마와 내가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모습 Drawn by.me





이 글은 신협중앙회와 여성조선이 함께 개최한 공모전에 응모했던 글 수정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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