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한다고 그게 괜찮아질 체력이야? 확실해?"
어느 날인가부터 홈스테이 아저씨와 막내아들이 저녁식사를 끝내면 매일같이 밖에 나가서 1시간 정도 뛰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한 달 뒤에 있을 5km 달리기 대회를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뉴스나 신문에서나 가끔씩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만 접해봤지, 주변 사람들 중에 대회를 출전하는 건 처음 본 터라 너무 신기했다.
"와 진짜 신기하다. 나 태어나서 누가 이렇게 대회 나가는 거 처음 봐."
"진짜? 헤이, 아리, 너도 나가볼래?"
오. 그저 지인이 나가는 게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물어보니깐 나도 한번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달리기 연습도 제대로 해본 적 없으면서 괜히 체육학과를 나온 아빠가 떠오르며 '나도 운동 잘하는 아빠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잘하지 않을까'라는 내 기준에서는 나름 근거 있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오! 나도 해볼래!"
대회에 참가하기로 정하자마자, 아저씨와 막내아들과 나는 인터넷으로 대회 참가 신청을 하고 아저씨 카드로 재빠르게 대회 참가비를 결제해버렸다.
'좋아, 오 재밌겠다! 오! 아주 신기해! 너무 신기해! 대박 신기해! 살면서 별걸 다해보네! 너무 신기해!'
그 당시 16년밖에 살지 않았으니 당연히 해본 것보다 안 해본 게 많았지만, 혼자서 계속 '내가 살면서 별걸 다해보네!'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리고는, 잠이 들 때까지 나는 계속 새로운 걸 시도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신이 나서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드디어 다음날. 나도 아저씨와 막내아들의 달리기 훈련에 합류했다.
"아리, are you ready? " (아리, 준비됐어?")
아저씨의 질문에 "예야~"하고 대답한 뒤, 나는 준비운동과 비슷한 그 무언가를 해 보였다. 그렇게 나의 하찮은 준비운동이 끝난 후 다 같이 뛰기 시작했다. 몇 분이 채 안됐지만 나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게 생각만큼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 아저씨와 막내는 둘 다 남자였기 때문에 나랑 신체적으로 폐활량이 달라서 쉽게 지치지도 않았을뿐더러, 엄청 빨랐다. 이를 악물고 따라가는데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라는 속담이 절로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우리 선조들이 그런 속담을 괜히 만든 게 아니었다. 결국 그날 우리는 나 때문에 1시간은커녕 20분을 겨우 달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당에 주저앉았다. 계속 속이 막 니글니글 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토를 쏟아낼 것 같았다. 심지어 저녁 먹고 바로 뛰었더니, 그날 먹은 폭찹스테이크 (돼지 갈빗살)가 목구멍에서 까꿍 하며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막내가 나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아리, 괜찮아?"
아저씨는 나의 엄청난 저질체력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셨는지 한마디 던지셨다.
"너 못 나갈 것 같은데? 너 나가서 쓰러지면 엠뷸런스에 실려갈 텐데, 참가비로 1000불 내는 거야 그러면."
그렇다. 미국은 참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아픈 사람을 병원에 실어가는 와중에도 환자에게 엠뷸런스 비용으로 1000불, 즉 100만 원 정도를 뜯어내기까지 한다. 참 고약스러운 나라다.
어제만 해도 대회에 참가한다는 생각에 기쁨에 젖어있던 나는 순식간에 이 대회에 나가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갔다가 엠뷸런스에 실려가기라도 하면 피 같은 생돈 100만 원이 날아가버리는 데다가, 좀 창피할 것 같기도 했다. 대회에 나간다고 해도 인생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무엇을 위해서 이 대회에 참가하나, 나가지 말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아줌마와 언니들도 집에 돌아온 내 상태를 보더니 이건 연습 가지고 될 체력이 아니라며 그냥 나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가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은 게 아닌가. 홈스테이 가족 전부가 나가지 말라고 하니깐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대회는 한 달 정도 남았으니 그동안 연습하면 될 일이었다. 특히 음악 선생님이었던 아줌마가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언니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Practice makes perfect~"인데, 즉 연습이 "완벽"을 만든다라는 뜻이다. 나도 한 달 정도 달리기 연습을 하면 "완벽!"까지는 아니어도 "완벼억?"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줌마는 대회에 나가지 말라고 몇 번씩이나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봐야 하겠기에 나는 이왕 시작한 거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날부터 약 한 달간 비가 오는 날은 제외하고,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리는 약 2.5km로 대회 거리보다 짧았지만, 아저씨와 막내는 너무 빨라서 같이 연습할 수가 없었기에 나 혼자서 그렇게 연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회 거리보다 짧은 것을 감안하여 체력을 좀 더 늘려보려고 책가방을 메고 뛰는 것을 선택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2.5km를 한 번에 뛰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습할수록 점점 더 실력이 늘기 시작했고, 심지어 한 달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는 책가방을 메고 2.5km를 다 뛰는데 17분 정도가 걸렸다. 한 달 전만 해도 대회에 나가지 말라고 했던 나의 홈스테이 가족들도 나의 체력과 달리기 실력이 점점 느는 것을 보며 적어도 더 이상의 반대는 하지 않았다.
드디어 기다렸던 D-Day가 다가왔다.
나와 아저씨 그리고 막내는 한 달 동안 기다렸던 대회장으로 이동했다. 대회장에 도착하니 어마 무시한 숫자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애초에 누구를 이기는 게 아니라 이왕 참가비까지 낸 대회를 무탈 없이 완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 수가 많던 적던 상관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아저씨는 나에게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엠뷸런스가 타기 싫었던 나는 알겠다고 한 뒤 아저씨와 막내와 같이 출발선에 섰다.
"땅!"
경쾌한 출발 소리가 나자 그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미친 듯이 빨리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순간적으로 같이 빨리 뛸뻔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연습한 대로만 해, 연습한 대로'를 되뇌며 내 페이스대로 나의 첫 5km 달리기 대회를 시작했다.
나름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힘들게 달리기 연습한 게 도움이 됐는지 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2.5km를 최고로 잘 달렸을 때가 17분 정도가 나왔기 때문에, 나는 이 5km 대회에서는 적어도 34분 밑으로만 해보자라고 생각하며 달렸다. 물론 달리면 달릴수록 약간 입에서 피맛이 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후 하하 후후 하하"
뛰면 뛸수록 점점 더 숨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숨을 최대한 잘 내뱉으려고 하며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생각 없이 달리고 있는데 결승선이 가까워졌는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보고 외쳐 댔다.
"유 캔 두잇!!!" (넌 할 수 있어!)
"런!!!!!" (뛰어!!)
"돈 스탑!!!" (멈추지 마!!!)
"유얼 올모스트 대얼!!!" (너 지금 거의 다 왔어!!!!!)
그 말과 함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결승선이 있는 게 보였다. 결승선이 보이자, 나는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페이스를 깨고 미친 듯이 전력질주 하기 시작했다.
'우왁! 그래 할 수 있어! 34분! 목표 달성하자!'
나는 이를 악물고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결승선을 통과해냈다.
'와! 했어! 대박! 엠뷸런스에 실려가지도 않았어! 장하다!'
그리고 그렇게 미친 듯이 뛴 결과. 나는 28분 정도를 기록했다.
말도 안 되는 기록이었다. 34분 이하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기록을 6분 이상을 단축할 줄은 몰랐다. 달리기를 연습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연습 때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기록이 실전에서 어마 무시하게 단축될 확률은 거의 0% 라는 걸.
"와!! 축하해!!!!! 이번엔 안 쓰러졌네!!!"
"잘했어!!!! 살아남았네!!!"
진작에 도착한 아저씨와 막내가 나를 기쁘게 맞아주었다. 물론 그들은 20분 이하의 기록이 나왔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해냈다는 사실이 그저 뿌듯하기만 했다. 그렇게 서로 축하를 한 뒤, 막내가 자신의 기록이 좋은 것 같다며 메달을 받았을 수도 있으니 기록 결과표를 확인해야 한다며 결과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메달은 당연히 전체 참가자 중에서 제일 잘 달린 사람들에게 1등, 2등, 3등에게 주지만, 10대 남자, 10대 여자, 20대 여자, 20대 남자 이렇게 나이 대(代)로 한 번 더 나눈 뒤 거기서 잘 달린 사람들에게 추가적으로 1등, 2등, 3등에게 시상했기 때문에, 우리는 막내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결과표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몇십 분을 기다리고 나니, 드디어 결과표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메달을 기대한 막내는 정작 메달을 못 받고 내가 10대 여자들 중에서 3등 한 것이었다.
"What!!!!!!!!!!!!!!!!!!!!!!!!!!?!?!?!!!! Are you serious?!?!?!!!!!!!!" (뭐?!?!?! 진심?!?!?!!)
막내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나도 결과표를 다시 찬찬히 본 뒤 소리를 질러댔다.
"왓!!!!!!!!!!!!!!!!!!!!!!!!!!!!!!!!!!!!!!!!!!!!!!!!!!!"
메달은 생각 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3등을 해버린 것이었다. 진심 생각지도 못한 상이여서 아까는 달리느니라 힘들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면, 지금은 미친 듯이 기뻐서 우심방, 좌심방, 우심실, 좌심실 전부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미쳤어!!!!!!!!!!!!!!!! 미쳤네!!!!!!!!!!! 미쳤어!!!!!!!!!!!!! 미친 거 아냐???????????'
그렇게 겉으로, 속으로 소리를 몇 번씩이나 지른 뒤에야 마음을 가다듬고 메달을 수여받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모든 일이 이 달리기 결과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지레 겁부터 먹거나, 무작정 뒷걸음질 치지 않기로 했다.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깐.
커버 이미지: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