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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희 Aug 14. 2021

3월의 서머데이

 리조트는 젠 스타일로 휴양에 더없이 쾌적하다.

 눈을 뜨자 간밤의 피곤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뒤척여 본다.  등허리에 늘쩍지근한  방안 공기가 느껴진다. 선뜩했던 서울 기온과 사뭇 다르다.  일어나 테라스 문을 연다.  스콜을 쏟아낼 듯 후덥지근한  바람이 얼굴로 달려든다.

 찌를 듯  솟아오른 야자수 나무와 육각형 나무 조각을 정교하게 이은 지붕이 내려다 보인다.  멀리 수영장이 보이고 선베드에는 타월이  눈부시게 정리되어있다. 길목은 파초와 꽃으로 장식되어 사랑스럽다.

 나는 서울의 꽃샘추위를 담보로 하여 여름을 빌리러 발리에 왔다.  겨울은 길었고 나는 남국이 그리웠다. 추위에 움츠렸던 몸과 마음은 하루 만에 여름을 맞아 긴장이 풀리고 세포는 낱낱이   해체된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자신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난다.  이탈 리아에서 달콤한 게으름을 알게 되고,  인도에서는 결혼생활을 돌아보고 상처를 주었던 자신을 용서한다.  발리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면서 다른 사랑을 만나고 받아들인다.

 영화에서 본 시골 풍경과 줄리아 로버츠의 편안함에 끌려 나도 이곳에 있다.


 30도가 넘는 한낮의 울루와뜨 사원을 등에 지고 절벽 해안을 따라 내려간다.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물거품과  짙푸른 바다가 선명하게 대비되어 절경을 이룬다.  절벽을 감싸 안듯 겹겹이 하인 흰 포말,  여기에서 탄생했던 아프로디테를 찾는다.

 바다를 향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잊힌 누군가가 대답을 하고,  삶에 대한 해답을 들려줄지 모른다는 착각을 잠시 하지만 뜨거운 태양을 이길 수 없다.  늘 그렇듯이 낯선 풍경을 만나러 낯익은 안락함을 버리고 거리를 헤맨다.

  리조트  앞에 좌우로 넓게 펼쳐진 해변에서 석양을 본다.  사방이 트인 드넓은 바다 위에 노을과 뭉게구름이 만나 서로를  주홍으로 물들이며 검붉은 채색화를 그린다.

  야외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서양의 노부부와 딸 그리고 어린아이들,  삼 대가 제각기 다른 즐거움에 푹 젖어있다.  할머니는 3인조의 밴드에  맞춰 노래를 따라  부르며 몸을 흔들고 딸은 아들을 안고 스텝을 맞추고 아이들은 엄마 주변을 맴돌며 풀밭을 뛰어다닌다. 우리도 서로에게 넉넉해지고 각자의 감정에 사치를 더하며 웃고 있다.

 우붓 왕궁과 시장에는 따가운 햇볕에 벌겋게 달은 동서양의 얼굴들이 서로 부딪치고 차량이 뒤엉켜 혼잡하다. 이 혼란 틈에도 오후가 되면 전통의상을 입고 이마에 흰 쌀알을 예쁘게 붙인 여자들이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사원으로 향하는  행렬을 곳곳에서 본다. 집집마다  가족 사원이 깔끔하게 관리되어있고 리조트 앞에도 저녁마다  꽃을 담은 작은 상자를 놓아둔다.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 관습으로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듯했다.

 옛 왕들의 석굴 무덤이 있는 사원에서는 서양의 부부가 꽃과 물을 뿌려주는  힌두 의식으로 정갈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들의 종교는 모르지만 다를 문화도 존중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이 경건하다.

 스미냑은 발리의 강남으로 청춘들의 거리다.  등허리를 드러낸 늘씬한 몸매와  배우 필의 젊은 남녀들로 거리는 흔들린다.  오른쪽 바다는 외국인이 주로 이용하고, 야외  음악당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수영할 수 있다.  반대편, 현지인이 이용하는 해변에는 길거리 음식이 좌판에 펼쳐져 있고  높은 파도에 휩쓸리며 노는 아이들의 외마디 소리와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경쾌하다. 딸의 몸에 묻은 모래를 씻어주는 엄마와 딸의 실루엣이 석양 속에 정겹다.

 우리가 내렸던 비행장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어딘가를 향해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잠시 빌렸던 여름을 반납할 시간이다.


 비행기에서의 잠을 의식은 누웠으나 모든 관절은 눕히지 못하고 긴장한 상태로 시간을 버틴다. 잠이 들지 못하며 못한 대로, 할 일 없는 바른 자세는 의식을 곧추세운 채 표정마저 당혹스럽다.  몸은  푸석푸석, 개운치 못한 얼굴과  밤새 구겨진  옷은 영락없는 패잔병이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야심 차게  떠났다가 열정을 소진하고 새로운 지평 한 조각을 품고 돌아오는 과정이다. 내면은 치밀해지고 인생은 두터워졌겠지.

 벚꽃이 한창인 오늘,  반납한 여름을 그리워하며 줄리아 로버츠를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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