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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희 Aug 14. 2021

작은 대화

 비가 촉촉이 내린다.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붉게 물든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구른다.  길게 고인 웅덩이,  떨어지는 빗방울 수에  맞춰  파랑이 동글동글 줄지어 일어났다 사라진다. 우리의 일상도 수없이 피었다가 사라지고 또 피어난다.  이서진을 입은 버스가 떠나간다.  못다 읽은 광고판에서 벗어난 시선을 집안으로 거둬들이고 거실을 둘러본다.

 정갈하게 닦은 테이블에 레이스를 펼친다.  오늘을 《마담 보바리 》의 엠마,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초대한다.

 엠마에게 어울리는  찻잔을 고른다. 엠마와  한 번쯤 만났을 하빌랜드 티팟과 찻잔을 꺼내고  스트레이너와 애플 티를 준비한다.  이단 트레이에는 마카롱과 스콘을 올려놓았다. 화려한 상류사회와  뜨거운 사랑을 꿈꿨던 엠마에게 따뜻한 차를 권한다. 그녀는 자신이 되고 싶은 상상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라 착각해 상상 속으로 도피했다.  이런 심리상태를 보봐리즘이라 부르며 비웃지만, 우리의 모습도 투영되어 있다. 사과향이 따뜻하게 번지고 음악이 흐른다. 엠마는 샤프란 색의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단정히 앉아있으나 눈길은 불안하다.  뭔가 변명하고 싶지만, 각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듯 도발적인 시선으로 시크하게 쳐다본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소박한 로열 알버트 쁘띠 포인트 찻잔에 얼그레이를 담아낸다.  그녀는 엠마와 함께  자신을 초대한 이 자리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엠마의 욕망이 빚어낸  비극적 결말을 알기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려 노력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오늘 저녁  파티를 위해 꽃을 준비하고 런던 시내를 산책하다 막 들어오는 길이다.  하이드파크에서 전쟁 후유증으로 환청에 시달리는  군인부부를 보고 온 후라 자신의 신경불안  증세가 도지려  한다. 따뜻한 차로 마음을 추스르고 싶다.

 엘리자베스의 시선에서는 위안을, 엠마에게는 결이 다른 동질감을 느낀다. 자신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풀어내고 있지만,  엠마는 삼류 연애소설에서 본 헛된 사랑과 열망을 꿈꾸다 인생을 망가뜨렸다.  그녀의 미숙함과 연약함, 자기만의 삶과  방을 갖지 못한 채 비극을 맞은 그녀에게 연민과 비난이 섞인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엠마는 마카롱을 잡는다.  당 데르빌 리에 후작 댁에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접했던 상류사회의 상징물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좋아했던 마카롱.  후작의 장인인 노공작이 앙투아네트 왕비의 애인이기도 했다. 엠마의 열망하는 표정에  엘리자베스와 댈러웨이 부인의 차가운 시선이 엇갈린다.

 엠마가 사교성을 발휘해 침묵을 깬다.

 "삶을 뒤엎고 마음을 온통 심연 속으로 몰고 가는 폭풍을 느껴보신 적 있으세요?"

 "사랑이 온통 그럴 것이라는 건 편견이에요." 엘리자베스가 싸늘하게 말한다.

 "... ..." 생각에 잠겨있던 댈러웨이  부인의 시선이 엠마를 향한다.

 인성이 바뀌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다.  엠마가 자신을 자각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려면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  순수한 그녀에게 자신이 읽었던 책을 소개하면  어떨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엠마의 삶을 낱낱이 해체하여 그녀에게 보여줄까.  댈러웨이 부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긴다.


 그녀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엠마의 보봐리즘 약간, 엘리자베스의 편견 등 여러 마음이 한데 어울려 나를 이룬다. 그중 어느 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면 어떤 인생이 되어 있을까.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못하도록  적당히 당겨주는 줄을 느낀다. 체코 프라하에서 본 인형이 생각난다. 삼백 년 전통을 자랑하며  정교하게 움직이는 인형들.  나에게 얽혀있는 수많은 줄을 움직이며 균형을 잡는 주체는 누구일까.  오늘 초대한 세 여인보다 나이가 많음에서 오는 성숙함일까,  운명일까, 절대자일까.

   개성이 강하지 않은 본성에 조금 닦여진 인성, 그리고 인연들이 어우러져 부드러운 움직임을 선사하고 있다.  자존감에 눈은 선해지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세 여인과 눈을 맞추고 따뜻한 포옹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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