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의 듣기 여행-87일 차(호주 시드니)
또 길을 잃었다. 구글맵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안이한 생각은 쉽게 어긋났다.
하루를 시작할 땐 호기로웠다. 밀슨스 포인트 역에서 내려 하버브릿지를 건너 오페라하우스에 다다랐다. 하버브리지 위에선 시드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고, 방향을 찾기가 좋았다. 피시 앤 칩스를 사들고 이번엔 오페라 하우스 쪽에서 하버브릿지를 바라보았다. 시드니에 왔다는 감각이 물씬 들었다. 오페라하우스를 한 바퀴 도니 보타닉 가든이 나왔다. 갑작스레 마주한 도시여서 분주했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바다가 건너다 보이고, 널찍한 잔디밭에 각종 풀과 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었다.
보타닉 가든을 거니는 중에 아트갤러리로 향하는 표지가 나왔고, 마침 비가 올듯하여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크고 웅장한 건물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많이 걸려있었다. 전시실로 들어가자마자 이건 밀포드 사운드 같다고 생각했던 작품이 있었는데, 액자 아래 밀포드 사운드라 적혀 있어 은근히 뿌듯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들도 수시로 걸린다고 하더니, 모딜리아니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유의 나른한 표정의 여인의 모습이었다. 점을 찍어 표현한 작품들은 아마도 선주민들의 표현 양식인 듯했다.
보이는 대로 쏘다니다가 보인 뾰족한 첨탑 두 개를 가진 성당에도 가보았다. 성 메리 대성당이었다. 성당 안에는 작은 상점이 있었는데, 독특한 모양의 십자가들이 있었다. 멕시코에서 유리 조각과 흙으로 만든 십자가를 사서 선물했더니 좋아하던 이가 생각나서 찬찬히 둘러보았다. 알록달록한 색깔로 안쪽에 그림을 그려 넣은 십자가가 익숙해서 뒤집어보았다. 엘살바도르 산. 기념품을 사려할 때 그 나락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든 표시가 있으면 다시 내려놓게 된다. 아까 보아던 점묘 기법을 활용하여 만든 십자가가 있어 하나 골랐다.
해는 금세 졌다. 비까지 내려 거리가 더 어둑해져 서둘러 발을 돌렸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동네에 이르렀을 때 휴대폰 배터리가 꺼져버렸다. 지인의 집에서 에어비앤비로 옮기면서 짐을 내려놓느라 한번 들르긴 했지만 차를 타고 와기에 거의 초행인 셈이었다. 밤, 비, 초행, 꺼진 핸드폰! 아, 이건 뉴질랜드에 도착한 첫날과 같지 않은가! 왜 나는 그때 교훈을 얻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그때보다 나은 점은 길에 사람이 다닌다는 것이고, 불행한 건 그때와 달리 주소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비를 쫄딱 맞으며 빠른 걸음으로 가다가 되돌아와서 표지판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개를 산책하던 한 여인이 묻는다. 내게 너무 익숙한 질문. "아유 오케이?" 길을 잃었는데, 주소를 모른다고, 핸드폰에 주소가 있는데 꺼졌다고 말하니 자기가 어떻게 도울지를 모르겠단다. 구글맵이라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길이름을 보면 기억할까 싶어서. 길이름은 떠오르지 않았고 병원 근처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병원 위치를 물어 찾아갔다.
일단 병원까지는 왔으나 다음이 문제. 마침 동전을 넣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었다. 에어비앤비 사이트를 들어가 봐야지! 그러나 켜지질 않았다. 하! 잘 모를 것 같았지만 리셉션에 물었다. 역시 몰랐다. 그래도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딘가와 십오 분쯤 통화를 하곤 컴퓨터를 끄고 켠다. 반응 없음. 친절한 수납직원은 다시 나에게 다른 도울 일이 없느냐 묻는다. 사정을 듣고 충전기를 빌려주었다. 찾고 보니 바로 앞 3분 거리였다. 게다가 아까 병원을 찾아오던 길에 지나친 집이었다.
편리한 세상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길을 몰라도, 언어를 못해도 어디서든 잘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계가 사라졌을 때 바보가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그렇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다면 길 이름 정도는 외우고 있었을 것을. 역에서 집까지 오는 길 정도는 익히고 있었을 것을. 기억, 방향감각, 순발력 등. 기계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의 역할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이 사람들의 친절과 도움이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