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졸업한 해인 여름 어느 날
친구 태일이가 조카를 데리고 집에 왔다. 초등학교 아니 그때는 국민학교라고 했지. 5학년 여자아이가 KBS 어린이 합창단 단복을 입고 바이올린을 들고 화장도 해서 특이하게 생각했다. 술상을 준비하여 친구와 마루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잔 기울였다. 경미는 어른들의 따분한 대화에도 지겹지 않은지 옆에 앉아 생글생글 웃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이 되었는데 태일이는 볼 일이 있어서 간다고 우리 집에 조카를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누나와 여동생이 있으니 잠은 재우지만 경미가 집에 안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경미는 엄마에게 삼촌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해서 괜찮다고 한다. 별생각 없이 그 후로 며칠간 경미는 우리 집에서 묵었다. 낮에는 엄마를 만났다고 하고, 어느 날은 집에 다녀온다고 하며 올 때에 옷 가방을 들고 수박도 사 왔다. 워낙 우리 집이 군식구가 많았던 터라 모두들 각자의 생활을 하며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여름 끝 무렵 저녁에 누나가 나와 형을 불렀다. 낮에 경미를 데리고 동대문 스케이트장에 갔는데 경미는 스케이트를 타지 않고 관중석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길래 지켜보았는데 경미가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겁에 질려 말도 못 하고 집으로 와서 우리를 부른 것이다. 내용을 듣고 형이 경미를 불렀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동안 이상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문책을 했다. 가족들 중에서 이상하게 여기면 돌아가면서 친밀감을 유지하며 가족들의 환심을 산 일, 낮에는 나가서 놀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일, 바이올린 연주를 부탁했는데 조율도 못하던 일...
아무튼 경미는 이상한 일이 많은 아이였다. 형은 무서운 얼굴로 경미를 야단치며 손가방을 열어보라고 하였다. 경미는 난처해 했지만 결국은 손가방을 열었다. 순간 우리는 얼음이 되었다. 그 안에는 정리되지 않은 돈과 화장품, 액세서리 그리고 신분증, 학생증이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요에 잠겼다. 하지만 화랑도 유단자에 검도, 수영에 능한 만능 스포츠맨인 형은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바른대로 말해"
경미는 한참 동안 울다가 진정을 하고 지난 일들을 말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친오빠는 권투선수인데 집에만 오면 구타를 일삼아서 집을 나왔고 결국에는 소매치기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내 친구인 태일이도 열차에서 만나서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태일이가 경미의 신분을 숨긴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가족은 의논하여 경미 어머니에게 연락하고 동대문에서 만났다. 경미 어머니의 이야기는 경미와 같았다. 이런 세상에 가족이 가족을 못 지키고 밖으로 몰다니 경미 어머니의 부탁과 동의로 그 후에도 경미는 우리 집에서 생활을 했다. 내가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는...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내무반에서 여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집 안부를 묻고 경미는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여동생의 답장이 왔다. '오빠 경미는 갔어. 이제는 잊어.' 45년이 지난 지금 창밖에 부는 바람을 보니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우리들의 가정은 가족을 지켜주는가? 아니면 내쫓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