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은 위탁 수하물입니다.
나는 천재가 분명하다.
뻔하디 뻔한 이공계 천재가 아니라,
어쩌면 매력적이기까지 한 디자인 천재.
그렇지 않고는 내가 지금 하버드로 가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6개월 전만 해도 ‘하버드’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단어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짐칸에 라면을 구겨 넣으며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다. 이 비행기에 타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돌아보자.
대학교 5년 중 2년은 친구들과 술 마시는데 쓰고, 남은 3년은 혼자 건축설계에 한 맺힌 사람처럼 건축 공부를 했다.
원래 천재들은 좀 극단적으로 살아야 되는 법.
점을 찍고 선을 그리고 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쥐어뜯은 머리는, 조형원리의 불확실함 속에서 나름의 답을 끌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건축학부 졸업 작품을 무사히 끝냈고, 자연스레 취업해서 ‘으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덜컥 미국 대학원에 합격했다.
그것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학교인 하버드에.
꿈인가 생시인가를 묻는다면, 꿈이라고 답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는 사건이었다.
2023년 6월에 졸업전시를 끝내고, 포트폴리오와 각종 영어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실무 경력을 강조하기 위해 Local Drive 건축사사무소에서 도시설계 인턴도 병행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서 독서실에서 8시까지 영어공부를 하고, 출근을 하고, 퇴근 후 영어학원을 들렸다가 집에 오기를 몇 개월. 대학원 지원이 끝을 보였다. 미국 건축 대학원의 지원 마감일은 보통 12월 말에서 1월 중순 사이다. 하버드, 예일 같은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들부터, 중서부의 유명 대학들까지, 한 군데만 합격해도 좋다는 심정으로 총 10곳에 지원서를 냈다.
초조하기도, 설레기도 한 기다림 끝에, 코넬이 가장 먼저 장학금을 비롯한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3월이 되자 콜럼비아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등에서도 반가운 메일이 도착했다. 합격과 불합격, 장학금이나 박사 연장 기회 등등 여러 조건이 책상 위에 놓였고, 어떤 걸 선택할지 고민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하버드, 엠아이티, 예일등이 내 마음속에 우선순위였지만, 결과가 안 나오고 있던 터였다.
1월 대학원 지원이 끝나고, 2월부터 정림 건축에서 인턴을 했다. 나는 쉬지 않고 일을 찾아서 하는 게 특기이기 때문에. 3월 4일이었을 것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밤 10시 30분에 예정된 조지아 공대와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지아 공대는 도시설계 대학원이 있는 드문 학교 중에 하나였기에, 내 마음속에 우선순위가 높았다. 또 나에게 대부분의 등록금 지원과 박사 과정 연결까지 암시하며 많은 호의를 보여왔다. 10시부터 꼬까옷을 입고 머리를 정돈하고, 학교와 프로그램에 대한 질문을 점검했다.
"띠링"
10시 15분쯤 메일이 하나 왔다. 하버드에서 왔다. 오호? 이것은 합격 아니면 불합격 소식일 텐데. 메일을 열었다. 하버드 지원 포탈에 결과가 올라왔다고 한다.
"Congratulations!!"
첫 단어가 좋은 단어다. 합격한 건가? A4 한 장 짜리 합격 메일을 읽었지만 이게 합격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영어 단어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축하한다니 좋은 소식 같긴 한데, 최초합이 아니라 대기에 넣는다는 건가? 다시 읽어보려 했지만 10시 30분이 되었고, 조지아 텍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하버드에 놀란 마음, 준비한 질문지로 달랜다.
갑작스러운 소식 따위는 나를 흔들 수 없다. 나는 프로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연락이 와서 흥분되었지만, 차분하게 조지아텍과의 인터뷰를 마쳤다. 다른 학교와 비교했을 때의 장점, 받을 수 있는 지원, 연구하게 될 주제, 산업과 협력하고 있는 정도 등등 꼼꼼하게 질문을 했다. 인터뷰는 한 시간 정도 지속되었고, 빠른 시일 내에 답을 준다고 이야기하고 끝이 났다. 후다닥 하버드 지원 포탈에 다시 들어갔다.
메일을 다시 천천히 읽었다.
"Congratulations! I am delighted to offer you admission to Havard Graduate School of Design's Master of Architecture in Urban Design degree program starting in the 2024-2025 academic year. The Admissions Committee was impressed by your achievements, your portfolio and your intellectual and personal attributes."
합격이다. 고작 두 문장을 문단에 절반을 차지하도록 길게 쓴 것이 괘씸하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소식이 아닌가.
축구 선수 세레모니를 하듯 거실로 뛰쳐나가서, 슬라이딩을 하며 안방으로 들어가 부모님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부적처럼 모셔온 하버드 유리잔에 맥주를 따라 마셨다. 어찌나 긴장이 풀리던지. 어머니 아버지 기뻐하시던 모습은 기억도 안 난다. 내가 너무 기뻤기 때문에.
다음 날 출근하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잿빛 사무실마저도 파랗게 물드는 듯했다.
인턴쉽을 끝내고, 친구들과 와 다다닥 여행을 돌아다니고, 교수님들과 소장님들께 인사드리고, 각종 예방 접종과 치료를 받고, 정신없이 출국일이 다가왔다.
7월 22일 밤 9시. 인천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밟았다. 위탁 수하물은 25kg를 넘으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라면을 너무 많이 넣어서일까, 무게가 10kg 초과되었다. 온갖 종류의 간식과 옷을 빼고 무게를 맞추고, 세관을 들어가며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는, 짐덩이 하나 외국에 나가는구나, 하며 싱글벙글 웃고 계셨다.
가방 하나를 들고 비행기에 탔다. 책과 노트, 외투.
창밖에는 주황색 조명이 비행장을 비추고, 지시등은 활주로를 따라 밤하늘 너머 소멸하고 있었다. 설렘과 불안이 앞 다투며 가슴을 뛰게 했다.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어떤 기회들 만나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불확실성이 클수록 힘을 내고, 가보지 않은 길에 섰을 때 얼굴에 생기가 도는 사람이다. 이런 불안함은 나에게 반가울 따름인 것이다.
라면은 위탁수하물로,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설렘은 기내 반입하고 비행기는 이륙했다.
다음은 합격 통지서 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