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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건 Oct 30. 2024

아버지 이야기

30살의 첫 투표

1959년 출생, 아버지와 할머니

1959년 할아버지는 아직 34살, 너무 젊은 나이이다. 하지만 나의 나이가 서른이 되지 않은 관계로, 가족을 이루고 자식이 생긴 30대를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내 일상과 근현대사 속 연결점을 찾는 과정의 이야기 화자를 바꾸고자 한다. 이야기의 주연은 이제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바뀐다.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로 이어지는 현대사는 굴곡이 많다. 이 짧은 과정에 모여있는 에너지는 그 형태가 크고 요동치기에, 돌아보는 후대 사람들을 빨아드리는 힘이 있다.  




미국과 한국의 시차로, 당시 상황에 대해 듣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짧은 통화에서 조각 조각 들었던 현대사적 사건들과 어성선 개인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감상을 세세히 담을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추측으로 거시적, 미시적 사건간의 공백을 메워보고자 한다. 


1959년, 6.25 휴전 후 몇년이나 지났을까? 아버지가 태어난다. 아버지는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다. 당시 한국은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었고, 왕이 아닌 대통령이 있는 근대국가이고 싶어했지만,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태조 이성계의 18대 손이다.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던 이승만은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다. 아버지는 평생 민주주의 속에서 투표를 하며 살았을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하지만 실상, 내 아버지가 1살 때 한국은 비로서 500년을 넘게 이어진 조선왕정을 벗어냈다. 


아버지 나이 4살이다.

1963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다. 국가 경제를 이끌어갈 이렇다 할 산업이 없었던 한국의 상황. 노동집적 중공업을 국외로 위탁하고 기술 및 자본 산업으로 넘어가던 미국의 상황과 맞물려 포항제철이 생겨난다. 한국은 미국의 산업을 넘겨받으며 해외 생산기지의 역할을 자처하며 경제를 꾸려나간다. 아버지가 커가던 10대, 1970년 대는 박정희가 3번째 임기를 지내고 국내적, 국제적으로 입지가 흔들린다. 반유신운동이 일어난다. 


1978년, 아빠는 대학생이 된다. 19살이다. 

고등학교때 까지 철저히 이념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아버지는 대학에서 새로운 생각을 접한다. "노동운동은 하면 안된다, 아직 나라가 가난하니 열심히 일해야한다" 등의 생각들은 20대 피어나는 젊음을 싹죽이기에 허울 좋을 뿐이었다. 야학과 농어촌연구회등의 활동이 있었다. 밤을 새워 계몽주의 서적과 민주서적을 읽는 것이 야학. 농어촌에 방문해 땀마르랴 일을 해주고 저녁에 계몽교육을 해주는 것이 농어촌연구회 활동. 막걸리 마시며 놀며 불며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이런 시민사회의 "보다 낳은 삶"에 대한 열망이 역사적 사건으로 실체화 된걸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부장인 김재규에게 죽임 당한다. 김재규는 법원에서 "민주화의 반역자인 박정희를 처단했다"고 했다. 제법 선동적이고 극적인 대사이다. 박정희 암살은 굉장히 의외의 사건이라고 했다. 비록 이후 전두환이 들어오며 또 다른 군사정치가 시작되었지만, 시위나 데모를 활발히 할 수 있는 등 시민사회의 참여는, 여전히 간신히 자유로울 망정이지만, 박정희 때보다 활발해 졌다고 한다.  


박정희 치하에서 자라는 유년 시절은 어땠을까. 나라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생기고, 발전소에서 전기가 들어오는 등의 큰 변화와 더불어, 해외교류가 활발해지며 접할 수 있었던 처음 먹어보는 외국과자에 설랬을 것이다. 박정희가 죽었을 땐 어땠을까? 동아리 방이 축제 분위기였을까? 서울의 봄이 올것이라는 기대감이 가슴채우는 벅참을 줬을까?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을까? 한강변이, 종로가, 광화문이,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찼을까? 


아버지 나이 20살이다.

박정희가 죽었지만, 민주주의는 계몽주의 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미 군사정부에 몸살을 앓은 대학생들은 데모에 나간다. 당시 아버지는 탈춤 동아리에 속해있었는데, 데모에 쓴다고 동아리방에 있는 북이고 장구고 다 가지고 나갔다고 한다. 


아버지 나이 21살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다. 데모가 심해진다. 친구들이 감옥에 잡혀간다. 아버지는 데모세력에 합류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군대로 간다. 


1984년 전역을 한다. 

여전히 데모는 계속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업이 파산한다. 생계를 꾸려야 한다. 아버지는 데모세력에 합류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취업을 했다. 


1987년 6월 10일 항쟁이 일어난다. 

"탁치니 억 죽었다"를 발단으로 학생 뿐 아니라 직장인도 데모에 나선다. 아버지는 데모세력에 합류하지 않았다. 현대건설 해외 업무로 파키스탄에 파견된다. 전두환이 내려오고, 그 동료인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를 새 옷 삼아 정권을 이양받는다. 제도적 민주화의 물꼬가 터졌다. 


"이후 나는 기업가가 되었다. 어느정도 직원을 가진 회사를 만들었고, 가족까지 대략 백몇명 정도의 생계가 기반하는 수익 모델을 만든 셈이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부채가 있는데, 사업가로써 가지게 되는 사회적 책임감으로 갚아나간다고 말하려 한다."



아버지가 28살이 다 되어서야 대한민국은 처음 민주주의 투표를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 나이는 나보다 10살 많을 뿐이다. 4.19니, 12.6이니 6.10이니 중요한 날짜들이 헷갈릴 정도로 많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희망하고 이를 실현한 사회는 흔치 않다. 


후대로써 역사를 다시한번 되짚는 과정이 필요할까? 당면한 사회의 모습을 노력에 의해 일궈진 결과물이 아닌 원래부터 당연한 사실로 받아드리면 되는게 아닐까?


현대사의 사실 관계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힘이 든다. 선대가 시대를 관통하며 겪은 감정들은 그들에게 부채가 된다. 슬프지 않아도 될 일에 과하게 슬퍼하게 되고, 기뻐해야 할 일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된다. 시대적 부채는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나보다 10살 많은 뿐인 민주주의는 그 시대성을 배제하고 다루기에 멀리오지 못했기에, 간단히나마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은, 역사에 절박함에 함몰될 것은 아닐지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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