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에세이_나의 미발표작
소설가에게 미발표작이란 품에 지니고 다니는 칼과 같다. 꺼내자니 다른 사람 눈치가 보이니 망설이고, 없는 척하자니 찔린 양 뜨끔하다. 누군가 물어보면 범인인 양 화들짝 놀라거나 괜한 걸 묻는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혹은 무슨 내용인지 말하려다가 만다. 말하고 싶어 안달하면서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애먼 데로 화두를 돌린다. 그러고는 내심 아쉬워한다.
칼은 한 자루가 아니라 여러 자루일 수도, 아직 칼다운 모양새로 다듬어지지 못했거나 지나치게 갈다 못해 날 끝이 낭창하게 휘어졌을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품고 있는 한 그 칼들은 연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찾아 파고들 테니까. 그 고통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질지언정 누구도 자신이 품은 칼들을 순순히 꺼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 쉬이 내놓지도 못하고, 강물에 내던지지도 않는다.
그저 더 깊이 찔리지 않으려고 몸을 앞으로 수그릴 뿐이다. 주먹 쥐듯이.
4년 전 종로 사거리의 격자식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나도 그랬다. 신호등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독 바람이 찬 날씨였다. 그렇게나 추웠던가?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아마 온몸이 덜덜 떨렸을 것이다. 춥기도 했지만 두려웠다. 두려운 동시에 기뻤다. 기쁜 만큼 무서웠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면서도 신호가 바뀌지 않길 바랐고, 정말로 신호가 바뀌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어 막막했다.
당시 나는 M 출판사 연재 플랫폼에 투고한 장편소설 『국자전』에 대한 긍정적인 답신을 받았고, 편집부와 광화문의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참이었다. 가는 내내 나는 조마조마했다. 혹시 그 메일이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가다가 차에 치인다면, 이 모든 게 꿈이라면.
『국자전』은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미발표작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스무 장 남짓한 중단편 소설이었지만, 친구들의 응원과 조언을 받으면서 조금 더 길게 써보기로 했다. 그 과정이 평탄치는 않았다. 몇몇 동료들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면서 현실적인 글을 쓰라고 했다. 현실은 무엇인가. 단순히 핍진성이나 개연성의 문제일까. 직장에 오래 다닌다고 해서 현실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실적인 것과 현실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다고 믿는 이들은 우물 안 개구리일 확률이 높다. 모든 현실이 늘 예상 가능할 테니까. 그 말인즉슨 예상 불가능한 일은 쉬이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하기 쉽다는 뜻이다. 현실은 종종 우리의 예상과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현실적일수록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은 일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비현실적인 건 허무맹랑한 망상이며 현실적인 것만이 가치가 있다면, 문학은 진작에 종언을 맞다 못해 박물관 소장품이 되었을 것이다. 현자가 현실적인 사람의 준말이 아니듯 현실적이라는 건 특정한 판단 기준이 아니라 인식 범위를 뜻하는 표현에 가깝다. 그리고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을 끊어낸다. 미발표작들, 우리의 품에 들어 있는 칼들이 지닌 힘이다.
물론 그 칼들이 다 제 용도를 다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낙관은 이르다. 아무리 열심히 깎고 다듬더라도 미발표작이 발표작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무 흠결도 없는 작품을 바라며 계속 깎아내다 보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으면 그 무엇도 흠결이 될 수 없으니까. 계속 투고해보라는 독려도 무책임한 대꾸에 불과하다. 거절당하는 건 슬프지만 별수 없다. 문제는 무응답이다. 응답이 없으면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까.
『국자전』 투고 이전에도 나는 다른 미발표작들을 투고해왔다. 그중 몇몇은 정중하게 지면이 부족해서 유감이라는 등 거절을 뜻하는 답장을 보냈지만, 몇몇은 수신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연이은 투고와 실패의 경험이 투고 성공으로 향하는 발판이 되었다고 쓴다면 이 글은 자기계발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한 후 약간의 희망을 암시하면서 끝맺으면 된다.
해피엔딩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은 열린 결말에서도 본능적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날 만한 요소들을 찾아낸다. 애석하게도 난 투고에 무조건 성공하는 법이 뭔지 모른다. 만약 그런 비법이 있었다면 이전의 내가 썼던 담뱃값들을 아꼈을 테고, 어쩌면 그 돈으로 차를 한 대 뽑았을 수도 있다. 농담이다. 나는 자동차 면허도 없다. 담배도 끊었다.
소설을 쓰고 다듬거나 투고하는 이 일련의 활동들은 계발이나 개발처럼 성장이나 발전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그저 계속할 뿐이고 계속될 뿐이다. 쓰고 고치고 투고하고, 또 고쳐서 투고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발표한 글들과 마주치기 마련이다. 읽는 만큼 쓰고, 읽지 못하면 쓰거나 고치지도 못하니 피할 수도 없다. 다만 읽고 난 후 단순히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는 선택받은 글과 선택받지 못한 글에 관한 생각으로 흘러간다는 게 문제다.
저 글은 선택받았는데 왜 내 글은 선택받지 못했는가. 선택한 자들과 선택받은 작품에 대해 비난하면서 합리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결국에는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분홍색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되레 분홍색 코끼리만 주야장천 떠올리듯이 선택의 기준이 뭔지 고심하게 된다. 그러다가 선택받기 위해 선택받은 글들을 모방하기도 한다. 비난하는 한편 모방하고, 모방하면서도 비난한다.
선택받는다는 건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을 쓴다는 건 효율성이 극악한 생산활동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이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려면 창작욕만으로는 부족하다. 소설가는 고행을 자처하는 성인도 아니며 어떤 의심도 없이 맹신하는 제자도 아니다. 현 한국 사회에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건 고용법상 스스로 불안정한 상태에 머무르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글로만 먹고 살 수 있는 소설가는 드물다. 일단 나는 아니다.
사명감이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수입 중 많은 지분을 차지하지도 않는 직종을 본업으로 택한다는 건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가끔 순수한 호기심이랍시고 몇 부나 팔았냐고 물어보는 치들도 있으니 말이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그런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만일 내가 그들의 결핍이나 모순, 트라우마에 관해서 물어본다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대답할 수나 있을까?
미발표작들이 쌓여갈수록 품고 다니는 칼들의 수도 늘어난다. 그 칼들은 무언가를 자르거나 토막 내기 위한 칼이 아니다. 품고 다니는 사람들 역시 누군가를 해치거나 협박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걸 원치 않는다. 그저 독자에게 건넬 순간을 기다리며 품고 다닐 뿐이다. 물론 그 칼들을 품고 다니다 보면 가슴팍이며 배, 허리가 온통 칼에 찔리고 눌린 상처로 뒤덮일 터다. 아무리 커다란 외투를 입고 다녀도 다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그 칼들을 품고 다녀야 하나. 단지 소설가라는 이유로? 언제 저 칼끝이 깊숙이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는데. 만일 그런 순간이 온다면, 지혈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 없을 만큼 지쳐서 천천히 죽어가는 쪽을 택하게 되지 않을까.
난 성실한 신자가 아니고 성화도 그다지 취향은 아니지만, 카라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도마(1601)〉는 좋아한다. 〈의심하는 도마〉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도마의 일화를 담은 작품이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나타났을 때, 제자 대부분은 거의 의심하지 않고 예수를 찬양했다. 그러나 도마는 정말 예수와 닮은 저 사람이 자신이 따르던 스승이 맞는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혹자는 도마의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다고 비난한다. 베드로나 요한처럼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순종이자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그림 속 예수는 도마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도마 또한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 끔찍한 참상을 외면하는 대신 두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을 구부리며 피하는 대신 꼿꼿이 펴서 영영 아물지 않을 상처를 헤집고 있다.
도마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이성적인 제자였다. 같은 식탁에서 함께 빵을 나누던 배신자 유다를, 예수가 눈앞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예수는 죽었다. 남겨진 제자들은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 빈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 모두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소설가란 원체 의심이 많은 족속이다. 말 한마디에서 숨은 뜻을 유추하고,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사건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보면서 놓친 것들을 찾아내려고 한다. 한 번 속아 넘어가면 더 철저하게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덕분에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경우도 거의 없다. 대부분 집에 있거나 돈이 없어 사이비 종교인들의 표적이 되기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이비 종교가 주장하는 세계관을 습관처럼 하나의 서사로 여기고 분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소설가들은 다 의심병 환자고 불신론자인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소설은 쓰기 전부터 퇴고할 때까지 수많은 의심과 불안들을 거친다. 이 소재와 주제, 플롯, 인물의 선택, 전개와 결말, 형식과 구조, 문장 구성부터 부호며 화면으로 봤을 때 미묘하게 거슬리는 몇몇 글자까지 하나하나 스스로 걸고넘어져야 간신히 한 편의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물론 그처럼 치밀하고 끈질긴 의심과 계산에도 빈틈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나는 신학자나 미학자가 아니다. 그저 소설가다. 소설가답게 의심해보겠다. 어째서 도마는 상처를 헤집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손을 잡은 이가 예수라고 확신했던 걸까? 눈으로 높다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봤고, 귀로는 군중들이 조롱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혀는 어제 예수와 나눈 빵과 포도주의 맛을 기억하고, 손은 예수의 차가운 시신에 닿았다. 예수는 죽었다.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의심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믿기 위해서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믿는다. 무조건 믿는다면 순수해 보일지언정 안전할 수는 없다. 도마는 형제 같던 이가 예수를 팔아넘기는 걸 보았다. 희망은 절망이 되었다. 배신당한 사람들은 쉬이 타인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라고 주장하는 이의 말을 끝내 믿었다. 믿기로 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대신 예수의 부활을 말하는 이야기를. 설령 그 이야기가 과장과 비약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소설가에게 미발표작이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그 이야기가 하잘것없다는 평을 남길지 모른다. 백 번을 투고해도 백 번 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다. 소설가들은 미발표작이라는 칼을 깎고, 덧붙이고, 뒤엎고, 울고 웃다가 처음부터 쓰기를 반복한다. 언젠가 밖으로 내놓을 순간을 기다리면서.
내 품에도 아직 내놓지 못한 칼들이 있다. 『국자전』에서 나오는 조연 C의 이야기, 끝내 화해할 수밖에 없는 두 친구, 도망치는 이들, 해묵은 죗값에 대한 청구서, 인간들이 이룬 것과 망친 것들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존재들, 꿈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사람들. 설령 그 이야기들을 기다리는 독자가 없을지라도 나는 그 이야기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계속 품고 있기로 했다.
4년 전 그날, 신호등 색이 바뀌자 나는 횡단보도를 징검다리처럼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디디면서 건넜다. 예상치 못한 물살에 휩쓸릴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갔다. 다행히 메일은 장난이 아니었고, 그 누구도 나를 가로막지 않았다. 나는 무사히 약속 장소였던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는 따뜻했다. 와플 위 아이스크림이 녹아도 우리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계속되었다.
정은우
2019년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국자전』 『포나』, 소설집 『묘비 세우기』 『안녕한 내일』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