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에세이_미발표작
이메일 제목 : 안녕하세요, 작가님.
작가님, 안녕하세요.
저는 「주인 없는 방」부터 「낀」,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빛의 구역」까지 작가님의 책을 모두 구매해 읽어온 독자입니다.
작가님 글에 스며 있는 우울의 결을 좋아합니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과 「빛의 구역」은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몇몇 문장은 필사해가며 오래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발표되는 작품들을 읽다 보면 예전의 작가님 글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느껴집니다.
(중략)
저는 여전히 그때의 감정을 좋아합니다. 혹시 다시 그와 같은 결의 작품을 쓰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예전에 써두신 미발표 원고를 공개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 이렇게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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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언젠가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왔다. 위 메일을 읽는 동안에도 그 믿음은 그대로였다. 늙어서도, 병들어서도, 생활에 치여서도 아닐 것이다. 건강한 허리, 염증 없는 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 최신형 랩탑과 나를 믿어주는 출판사까지 모두 갖추어진 상태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툭, 글쓰기를 멈출 것만 같았다.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시작된 글쓰기였으니, 멈추는 일 또한 그렇게 찾아올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내가 매일 글을 쓰는 이유였다.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불안과, 쓰지 않으면 애써 잡은 기회들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에 나는 집착하듯, 여행 중 흙바닥 위에서라도 콘센트와 자리를 찾아 노트북을 켰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것들, 사회와 개인의 문제, 관계에서의 실패, 실직과 새로운 만남 같은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며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가장 잘 담아낼 수만 있다면 장르나 형식을 가리지 않았다. SF, 호러, 코미디, 로맨스, 나아가 시나리오, 웹툰, 게임, 드라마 각본까지. 몇몇 사람들은 작가만의 색이 없고 중간 문학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8년 가까이 쓰다 보니 픽션과 논픽션을 포함해 스무 권 남짓의 책을 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발표하지 못하고 묵혀 둔 글들이 많다. 메일을 받은 직후 나는 하나씩 클라우드에 잠들어 있는 글들을 열어본다. 한때는 세상에 내보내려 발버둥치던 원고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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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구성하는 삼 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다.
학교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이야기다. 여러 실험적인 소설들이 이에 대한 반증을 시도해 왔고 지금도 시도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소설이란 결국 이 세 요소 간의 마찰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라고 믿는다.
요약하자면, 소설은 어떤 인물(들)이 주어진 배경 안에서 사건을 겪으며 달라지는 과정이다. 도(道)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소설의 방점은 이 ‘달라지는 과정’에 찍혀 있다. 소설의 끝에서 독자가 마주하게 되는 인물은 더 이상 처음의 인물이 아니다. 이야기 끝에 선 인물이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똑같은 버릇을 보인다고 해도, 심지어 브레히트의 연극처럼 자신들이 겪은 사건이 허구임을 안다고 해도, 소설 속 ‘사건’을 겪은 이상 앞과 뒤에 등장하는 같은 이름의 인물을 전혀 다른 인물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모험 내내 대의를 지킨 용사라 해도 여정 중 잃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반성 없는 악당이라 해도 그가 패배했다는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과업을 완수하고 평온하던 세계로 돌아간 인물도 마찬가지다. 『반지의 제왕』 속 절대반지를 파괴한 프로도는 끝내 중간계를 떠났고, 청새치와 싸웠던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침대에 쓰러져 사자 꿈을 꾼다.
당신도 그렇다. 당신과 직접 관련 없는 사건, 뉴스 한 줄로 스쳐 지나간 일이라 해도 그것을 겪기 ‘전’의 당신과 ‘후’의 당신은 엄연히 다른 존재다. 누군가의 죽음, 사랑, 삶의 궤도를 바꿔버린 순간들을 떠올려본다면, 당신 역시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를 낯설게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한 편의 소설을 쓰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허구라 해도 작가의 내면에서는 이미 사건이 발생해버린 상태니까. 일상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거대한 일들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사랑하고, 다치고, 다시 사랑하고, 때로는 미쳐서 세계를 멸망시키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잔상처럼, 혹은 유령처럼 오래도록 작가 곁을 맴돈다.
이 변화는 출간, 판매량, 문학상 수상 같은 외적인 요소보다 훨씬 깊게 작가의 삶을 옭아맨다. 특히 장편처럼 한 인물의 생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는 경우, 작가는 마치 타인의 삶을 직접 살아낸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그 여파는 오래가며, 작가 자신의 삶과 글쓰기 방식에도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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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충격의 여파는 으레 그렇듯 첫 장편을 쓸 때 가장 강했다.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첫 장편은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이지만, 그전에 「담아낼 수 없는」이라는, 지금은 제목조차 흐릿해진 미발표작이 내가 집필한 실제 첫 장편 소설이다.
줄거리를 짧게 말하면 이렇다. 사진사로 일하는 주인공에게 실종된 선배 작가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찍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주인공은 선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실종의 비밀을 좇고, 동시에 예술, 특히 재현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다가 끝내 그 사진을 찍지 못한 채 소설은 끝난다.
이 작품은 전적으로 내 욕망 때문에 쓰였다. 한국의 문학도들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와 비슷한 결의 작품을 쓰고 싶어 했다. 내면의 허무, 공허, 무력함을 정교하게 담아낸 그 작품의 감정선을 따라가고 싶었다.
쓰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소설 쓰는 근육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인물의 감정에 쉽게 흔들렸고, 챕터를 마무리할 때면 마라톤이라도 뛴 것처럼 탈진해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렵게 소설을 끝냈을 때도 기쁘기보다는 슬펐다. 제목처럼,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허탈감 때문이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모든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했고, 내 클라우드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물론 이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출판사마다 관성적으로 원고를 보냈지만, 거절이 하나둘 쌓이면서 「담아낼 수 없는」은 결국 다른 원고들 아래에 묻히게 되었다.
그때는 쉽게 인정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출판사들의 결정을 납득할 수 있었다. 첫 장편이라 작품에 미숙한 지점이 많았던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지나치게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나와 관련된 특정 기억이라기보다는 비슷한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그 외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영역의 특수한 감정들의 집합체였다.
한마디로 다소 폐쇄적인 감정 상태를 기록해 둔, 일종의 일기에 가까운 글이었다. 그러나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어도 작가인 나에게까지 그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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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면 소설가로서의 나의 삶은 이렇다. 군대에서 글을 쓰기 시작해 독립출판으로 몇 권의 책을 냈고, 그것들을 등에 지고 전국 서점들을 돌아다녔으나 처참한 판매고에 꿈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 덜컥 상을 받았고, 퇴사를 했고, 또 몇 권의 책을 냈고,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었고, 크게 실패했고, 결혼을 했고, 다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겉으로만 보면 나는 여전히 비슷하다. 후드티에 청바지, 나이키 운동화, 부스스한 머리. 매일 글을 쓰고 있고, 잠시 회사를 쉰 적은 있어도 계속 일을 한다. 변한 것이라면 눈이 나빠져 안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 살이 쪄 예전 옷이 맞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위장 장애 때문에 예전처럼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것.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는 ‘작가님’이고, 누군가에게는 직장 동료 ‘준녕 님’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남편이자 아들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 사실을 나는 소설을 쓰면서 더욱 면밀히 깨달았다.
어제 쓸 수 있는 이야기와 오늘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다르다. 군대에서 200자 원고지에 제트스트림 볼펜으로 끄적이던 글과, 수십 권의 책이 든 가방을 메고 전국을 떠돌며 썼던 글은 같을 수 없다. 시작점과 지금의 끝점을 비교하면 더 선명해진다. 이른바 ‘망생’(소설가 지망생)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고, 컵라면을 사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으며, 그에 따라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불만도 예전만 못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글쓰기는 나의 업(業)이고, 나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울분 섞인 소설을 쓰고 나면 며칠을 앓아누워야 했고, 마감을 치르고 나면 한동안 우울에 빠져 지내야 겨우 작품에서 한 발 떨어질 수 있었다. 현실보다 소설에 더 기울어져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가끔 「담아낼 수 없는」을 꺼내 읽는 이유도 그래서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오래된 웨딩 비디오를 보는 기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내가 쓸 수 있던 문장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은 다시 쓸 수 없는 아주 미묘한 세계 속에서 나는 가끔 울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때의 나를 가여워했다.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나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노스텔지아는, 소설에 무심코 돌진하던 그 순간들이다.
이제 나는 「담아낼 수 없는」 같은 작품을 다시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곧 상실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다른 작품들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때의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썼고, 지금의 나는 지금의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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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제목 : RE: 안녕하세요, 작가님.
안녕하세요, 김준녕입니다.
「주인 없는 방」부터 제 책을 읽어주셨다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메일에 담긴 독자님의 마음은 잘 전달되었습니다. 다만 미발표작을 공개한다고 해서, 독자님께서 기억하시는 그때의 작품이 그대로 나오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과거의 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숙한 부분은 많았지만, 그때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쓴 글들이었습니다. 다만 그 작품을 지금 다시 손보는 일은, 그때의 저를 지워버리는 일에 가까워서 그러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동안 소설을 쓰며 많은 일을 겪었고,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어떤 속성들은 평생 저를 규정하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제 태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쓸 수 있는 글로 독자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마음으로, 제 결정도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메일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준녕 드림
김준녕
2022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빛의 구역』 『제: 지워진 이름들』 『경아』 등을 썼고, 소설집으로 『0번 버스는 2번 지구로 향한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