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에세이_나의 미발표작
어느 소설가 선배와 술자리를 가졌다. 그 선배는 문학상도 받고 문학성과 상업성을 인정받았는데, 그가 미발표한 장편소설이 열 편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김에 나오는 허풍이 아닐지 의심했다. 하나하나 줄거리를 읊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도 두 편의 미발표 장편소설이 있다고 슬그머니 말을 꺼내니 피식, 웃었다.
“괜찮아. 미발표작이 너를 구해줄 거야.”
나는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미발표작 따위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그로부터 5년이 더 흘렀고, 나의 미발표작은 좀 더 늘었다. 미발표작에 쏟아부은 시간은 어떻게 보상받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발표하지 않은 네 편의 장편소설이 있고 두 편의 장편 동화도 있다.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짧게 잡아도 3개월, 보통은 1년, 길면 3년 정도 걸리고 그 이상 시간이 드는 것도 있다. 미발표작에 투자한 시간을 더하다 보니 머리가 아득해진다. 만약 그 기간 다른 일, 뭔가 생산적인 일을 했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미발표작을 완성하겠다는 미련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썼다면 어떨까? 그보다 훨씬 나은 작품을 썼을까? 생각은 빙글빙글 돌아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 뭐, 어차피 달라질 건 별로 없었을 거야. 아무렴, 그렇고말고. 만약, 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황한 건지 알면서도 가끔 미발표작에 대해 만약, 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의 미발표작 두 가지만 말해본다. 첫 번째는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후 야심 차게 준비한 장편소설 『뱀파이어 K』다. 부산의 원도심 후미진 지역에 중년의 뱀파이어, K가 살고 있다. 그의 직업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주는 것이다. 의뢰인의 피를 마시면 그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느낄 수가 있어서 사람을 찾기 쉽다. 피도 얻고, 돈도 벌고, 일거양득이다. 어느 날, K에게 젊은 여자가 찾아온다. 치매에 걸린 아빠를 찾아 달라고.
치매 노인을 찾는 쉬운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뢰인의 피를 마시고 K는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K는 의뢰인이 찾는 아빠가 자신의 과거와 깊이 관련된 인물임을 알게 된다. K는 20여 년 전,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잊었고, 나이도 멈춰버렸다. K는 노인을 찾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점점 알게 된다. 노인은 K가 젊은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고, K가 뱀파이어가 되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과연 자신이 누구였는지 아는 게 좋은 일일까?
야심 차게 시작했던 프로젝트는 K가 사건을 해결해 주는 몇 개의 에피소드를 단편 소설로 발표하고 끝이 났다. 전체적으로 문장과 스타일에 대한 욕심이 앞섰고, 에피소드와 주요 사건을 잘 엮어내지 못한 것 같다. 에피소드들이 조금 식상하기도 했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서 곧장 다른 작품을 썼다.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오랜 후, 청소년 소설 ‘마리안느의 마지막 멤버’에서 K는 잠깐 조연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중학생 소년을 뱀파이어로 만들어 버리는 뱀파이어로.
두 번째는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라는 청소년 좀비 SF물이다. 예전부터 청소년 소설과 SF 소설에 관심이 많아 도전해보았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나는 고등학생이고, 우리 반은 좀비로 변해버린 아이들로 가득하다. 반장의 도움으로 위험을 헤쳐 나가던 나는, 이것이 미래의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빠져나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장애물을 넘고, 친구를 죽여도 게임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게임에서 죽으면 다시 다른 수업 시간에서 깨어난다. 자신을 도와주려고 온 건지, 방해하려고 온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무적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가 나의 미래에 대해 힌트를 주지만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이 장편소설은 한 권이 아니라 세 권으로 썼다. 주인공의 시점과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한 권씩 더. 심지어 결말을 여러 번 바꿔서 쓰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던 것 같다. 생각하고 쓰기보다는, 무작정 어떻게 써보면 되겠지, 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본능적으로 줄줄 써 나가면 어떻게든 된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원고를 읽은 지인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여러 방식으로 고쳐보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껏 썼지만 작품에 대한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출간 제안받은 적도 있지만 세 권을 꼭 같이 내겠다는 고집 때문에 무산되었다. 작품에 대한 고집은 좋지만, 작품의 운명이나 흐름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꼭 내 마음대로 움직이겠다는 욕심이 컸다. 자신이 없는 것과 근거 없는 욕심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렇게 그 작품은 세상에 빛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가장 아픈 손가락 같은 작품이다.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가 출간되지 못하자 나는 글쓰기에 흥미가 뚝, 떨어졌다. 세 권을 집필하는 데 에너지를 너무 소진해 버렸다. 소설이란 도대체 뭔지, 나에게 재능이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쓰는 걸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전자 공학을 전공했고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을 꿔 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덜컥, 소설가가 되었는데 아무도 내게 소설가의 길이 힘들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애초에 누가 억지로 소설가가 되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모든 게 내 책임이었다. 하지만 다시 모든 걸 리셋하고 다른 길로 가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그때, 마흔 살이 되었으니까.
기본이 덜 되어 있나 싶어서 이것저것 창작 관련 책도 읽어보곤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핑계 삼아 여행을 많이 다녔고, 호텔 프린스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제주도에 넉 달 정도를 머물다 아예 제주도로 이주해 버렸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은 소설을 쓰지 않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오히려 나는 소설보다 피아노나 작곡 활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미발표작은 하드디스크에서, 클라우드 저장소 어딘가에서 깊이 잠이 들어버려서 다시 깨울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날, 두 작품을 다시 꺼내 끄적거려 보았다. 이리저리 수정도 해 보았지만 계속 써 나갈 힘은 생기지 않았다. 장르를 확, 바꾸어 동화를 써보기로 했다. 대학 시절부터 동화에 관심이 많아서 책도 많이 읽었고, 열네 살의 남자아이의 입장이 되어 글을 쓰는 건 성인으로 쓰는 것보다 자신이 있었다. 원래부터 정신연령이 좀 어리기도 했고 제주도의 바다와 오름, 푸른 하늘이 자연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두 작품에서 나름 훈련된 문장이나 스타일이 첫 동화를 쓸 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재미로 써두었던 짧은 소설 「지구를 지키는 소년」을 미발표작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에서 단련된 문체로 장편동화로 써보았다. 원전 방사선의 피해를 본 소년이 초능력을 얻어, 바다 괴수와 싸운다는 내용으로 ‘아토믹스’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아동문학상을 받으면서 나는 새로운 작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뒤이어 두 편의 장편 동화와 뱀파이어가 나오는 청소년 소설을 출간하게 되었다. 미발표작이 없었다면 절대로 쓸 수 없는 작품이었다. 선배의 말처럼, 미발표작이 나를 구원해준 것일까?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작품 쓸 때, 주변에서 아무리 지적해도 뭔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버린다. 하필이면 왜 뱀파이어나 좀비 소설을 쓰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딱히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엔 어떤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고치면 고칠수록 그걸 쓰기 시작한 이유는 옅어지고 그 이야기를 끝내는 것만이 소설을 쓰는 이유가 되어 버린다. 결말을 바꾸고, 주인공을 바꾸고, 배경을 바꿔본다. 내가 만든 세계를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이렇게 저렇게 바꿔본다. 소설 속에 푹 빠져 지내는 시간은 너무 달콤해서, 심지어 끝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까 훌쩍 삼사 개월, 혹은 일이 년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출판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동안 소설 속에 빠져 지냈던 시간이 즐거웠으니 괜찮다는 마음도 든다. 그게 좀, 씁쓸하기는 해도.
그렇게 쓴 소설을 출판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고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운이 좋아 세상에 나왔다면, 독자의 손에 들어가 공감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족한 채로 세상에 나와서 독자에게 실망을 줬을 수도 있고, 딱히 반응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주로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다음에 필력이 생기면 훨씬 더 좋은 작품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을 주기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필립 K 딕은 SF소설을 쓰기 전에, 일반 장편소설을 열 한편이나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고, 사후에 몇 편이 공개되었다. 독자인 나는, 그가 발표하지 않은 소설을 읽고 싶다. 형편없는 작품이라도 상관없다. 미발표 작품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다른 작품에 영향을 끼쳤는지만 알아도 흥미로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미발표 작품을 어떤 식으로든 발표하고 싶다는 욕망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오래된 작품을 고칠 바에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게 훨씬 낫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는 것. 그리고 깨끗이 잊고 새롭게 도전하는 것. 그런 힘을 주는 게 미발표작이 아닐까? 결국, 그렇게 나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닐까?
서진
2007년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하트브레이크 호텔』 『마리안느의 마지막 멤버』, 동화 『아빠를 주문했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