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예 소설가] 잘못 끼운 첫 단추도 단추

소설가의 에세이_초고를 쓰는 일

by ARKOMUN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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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프린스 소설가의 방 사업에 선정됐을 당시 다듬고 있던 소설은 『오렌지와 빵칼』이었다. 배정받은 방에는 두 개의 싱글 침대가 있었다. 운 좋게 두 침대를 독점하게 된 사각의 공간에서 나는 창가 쪽에 위치한 침대에다 짐을 풀었고 줄곧 그 침대에서만 생활했다.

초고를 허블 편집부에 넘긴 후 수정까지 약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소란한 명동을 코앞에 둔 호텔 프린스는 마치 소음의 DMZ 같아서 심야에도 평온했던 반면 도보로 1분만 걸어 나가도 흡사 동남아시아의 야시장을 연상케 하는 활력이 펼쳐졌다. 소란과 평온의 경계에서 하얗고 바스락거리는 침구에 온몸을 묻은 채로 『오렌지와 빵칼』의 초고를 읽고, 또 읽었다. 그때 나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충분히 괜찮은데 어디를 고치란 말이지?’

해당 소설에 별 3개 미만의 혹평을 준 사람이라면 나의 자평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다 못해 불쾌하겠지만, 당시 내게는 그 글이 정말로 재미있었다. 오전 8시에 기상하여 컵라면까지 곁들인 푸짐한 조식을 먹고 침대에 곧장 누웠음에도, 혈당 스파이크마저 쫓을 정도로 『오렌지와 빵칼』 초고는 이전에 내가 썼던 글들과 달라 신선했다. 초고에 그 정도로 애정이 갔던 소설은 많지 않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고, 시작이 반이다. 그렇다면 초고는 완고의 품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이며 완성도의 절반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초고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내가 만족했던 『오렌지와 빵칼』의 초고는 과연 완고와 유사할까?

그렇지 않다. 『오렌지와 빵칼』 초고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모두 없었다. 군데군데 위험하기만 하고 별로 작품주의적이지 못한 문단들, 예컨대 이야기의 주인인 나의 신념을 보여주지도 않는데 그냥 웃기다는 이유만으로 갖다 쓴 정치적 유머 같은 것, 심지어 재미마저 없는 문장들이 한 무더기 있었다. 혜안을 가진 박소연 편집자님(지금은 부팀장님이다)의 진두지휘 아래 어떤 내용들이 삭제되고 새로이 편입됐다. 몸통 없는 뱀이었던 초고는 머리와 꼬리를 얻어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됐다. 호텔 프린스를 떠난 후 해당 원고는 생애 첫 영미권 및 중국 계약작이 됐다.

이 과정에서 나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을 했다. 바로 ‘고치기의 즐거움’이다. 대체로 나는 작가적 지조 때문이 아니라 관성적 게으름으로 인하여 초고를 대폭 수정하는 일을 꺼리는 편이다. 집필도 노동의 일부라 창작을 향한 거룩한 의지만으로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 때로는 지치고, 귀찮기도 하다. 편집자님들이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 이상 지금의 작품이 곧 나의 색깔이랍니다,라는 안일한 변명에 기대어 피드백이 들어온 문장을 더러 남기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경우는 초고 단계에서부터 만족스럽지 못하곤 했다. 무슨 말이냐면, 초고에 정이 가지 않으면 그 초고의 품질과 무관하게 고칠 의지가 낮아진다. 반면 초고에 정이 붙으면, 설령 편집부로부터 가혹한 피드백을 받는다 하더라도 끝까지 애를 써볼 열정이 생긴다. 결국 퇴고의 즐거움은 내가 초고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더라.

작품에 대의적인 명분이 있어서, 최근의 출판 시장 동향을 귀신같이 적용해서, 기발한 소재와 주제를 담고 있어서, 기깔나는 문장으로 도배를 해놔서. 여타의 요인들이 작가로 하여금 작품에 정을 붙이게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초고에 정이 가는가? 간단하다. ‘내 마음대로 쓴 초고’에 정이 간다. 쓰는 이가 초고를 쓸 때 칼춤을 췄다면, 그 칼춤이 얼마나 형편없는 퍼포먼스였든 간에 그 초고는 하나의 사랑스러운 세리머니가 된다.

불변의 원칙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써야 한다. 시대가 쓰라는 글 말고. 사회가 쓰라는 글도 말고. 엄마 아빠가 쓰라는 글도 안 된다. 그냥 방구석 노트북 앞에 앉은 순간에 당신에게 문학적 활력을 불어넣는 글을 써야만 한다. 우리는 오직 그런 초고 위에서만 칼춤을 출 수 있다. 신명 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순간마다 애정이 쌓여 그 초고 안에 온갖 비문과 오탈자가 가득하더라도 포기를 마다하겠다는 집념이 생긴다. 호텔 프린스에 투숙하는 동안 외국인을 타겟 삼아 개발된 명동 스트리트 푸드들의 이국적 정취를 느끼며 나의 실수를 감상했다. 내게 도착한 것들을 정성스레 씹어 소화했는데, 그 과정이 상당히 티가 나는 작품이 됐다. 세기의 걸작이라 자꾸 언급하는 게 아니다. 걸출한 작품들과 비교하면 초라하겠으나 그럼에도 내가 너무 즐거웠다.

잘되든 말든 상관없이 반드시 책을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지극히 사적이고 무모한 용기로 점철된 초고에는 저질스러운 실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러ㅎ게 말햇다’ 수준의 오타가 그 예시다(이런 허무맹랑한 오탈자는 편집자님에게 보내드리기 전에 고쳤다). 엄연히 작가를 직업으로 영위하는 사람의 초고에 저런 문장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우스워할까. 내 안의 것을 쏟아내는 일에 몰입한 나머지 타건하는 손가락의 압력을 섬세히 조절하지 않아 발생한 실수다. 말하자면 해당 작품의 초고는 앞뒤좌우 결함 없이 완벽히 끼운 단추가 아니었단 셈이다. 집필욕 하나로 엉성하게 단추를 끼워, 결국 다음 단추까지 차례차례 밀려버린 옷이 됐으나 원고는 충분히 좋은 궤도로 돌아갔다. 수정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나에게 정신적 부하를 많이 주지도 않았다. 글 속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오는 순간까지 적당한 괴로움으로 개운했던 작업이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서둘러 시작이라도 하라고 북돋는 반면, 누군가에겐 시작에 신중하지 않으면 절반을 날리리란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진 이들은 후자에 속하고, 글을 쓰는 사람 중엔 완벽주의자들이 정말 많다. 문학 또한 부정하지 못할 예술의 영역 안에 있으니 으레 고상함, 완전함, 숭고함, 무거움 등의 볼륨 있는 단어들과 결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할 테다. 그럼에도 본인이 사랑하지 못하는 초고를 낳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워드 파일을 200페이지까지 꽉 채워도 수정하는 일이 고역스러워, 그토록 사랑했던 글쓰기를 진행하는 와중에 ‘어쩌면 나는 글을 싫어하는 걸지도 몰라!’하는 허무한 탄식이나 할지도 모른다.

허술하게 단추를 끼우고 엉망진창으로 시작하는 게 차라리 낫다. 다음 단추까지 실컷 밀려 끼우고, 절반을 송두리째 날려도 보자. 대신에 그 단추는 내가 직접 고른, 좋아하는 색과 모양의 단추여야 하고, 가장 좋아하는 옷에 달려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완벽한 초고가 아닌, 애정을 담은 초고는 어떻게 쓴단 말인가? 이 질문에는 복잡한 답이 필요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내 안에서 공회전하는 욕망들에 스피커를 달아줄 의지가 없다면 글 같은 건 애초에 쓰지도 않을 테니까. 그 스피커에 담겨 나오는 첫 문장으로 초고를 시작하자. 『오렌지와 빵칼』의 첫 문장은 ‘자유가 우릴 추하게 만든다’이다. 그 문장이 내가 초고를 쓰던 수 년전에 정말로 외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말의 전부다. 바랐던 표현으로 초고가 시작되는 이상 그 초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교활한 이야기로 채워지든 간에.

잘 쓴 초고 같은 건 없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괜찮아도 편집자님들과 머리 맞대고 살피면 고칠 게 한 트럭이다. 초고는 다 허접하고, 구멍투성이고, 볼품없다. 어차피 나체로 쫓겨나야 한다면 당당한 자세로 쫓겨나는 게 본새라도 나지 않겠나. 내가 좋아하는 말을 잔뜩 채운 초고라면 퇴고를 하는 와중에도 두세 번쯤은 나를 웃게 만든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부산에서 인천으로 올라가는 KTX에서 이 에세이를 쓰고 있다. ‘초고’라는 키워드 아래에서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할지 심사숙고했다. 처음에는 ‘좋은 초고를 쓰는 5가지 규칙’ 같은, ChatGPT에게 물어보는 게 차라리 더 나을 듯한 장광설을 쓰려 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내 어찌나 재미가 없던지 두통까지 몰려와 잠시 노트북을 덮었다. 결국 살아남은 초고가 이것이다.

나는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만, 작가의 개별적 시선이나 작품이 변화를 이끈다고 믿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문학은 총체다. 유명한 작가가 아니고, 유명한 작품도 아니고, 잠깐 뜨겁고 말 시대정신도 아니다. 누군가의 심장에서 갓 튀어나온 신선한 이야기들의 총집합이 곧 사람이고 사회이며 결국 문학이다. 그러니 모두가 의무감을 가지고 ‘가장 심장이 뛰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변태부터 수도승까지 구분 없이 뛰어들 수 있는 활짝 열린 문이 바로 문학이니 이야기에 경계를 둘 필요는 없다. 작가의 손이 의지대로 움직였다면 이미 좋은 작품이다. 멋진 초고 말고 사랑스러운 초고를 쓰자. 형편없지만 귀여운 첫 단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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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

제1, 2회 K 스토리공모전 최우수상

제9회 교보문고스토리공모전 우수상

근간 『일억 번째 여름』 외 『오렌지와 빵칼』, 『낭만 사랑니』, 『수호신』 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