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당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닻을 내릴 때

숨겨온 시린 흉터를 깎아 서로를 향한 다리를 놓는 시간

by 아를밤

타인의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내가 세운 성벽의 높이를 실감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 휘둘렀던 날 선 방어들이 누군가의 시린 자리를 관통했음을 뒤늦게 깨닫는 밤.

이제는 도망치는 대신 그 아픈 심연에 가만히 을 내린다. 흉터가 서로를 알아보는 유일한 지도가 되어준다.

‘부끄럽다, 참으로.’

차 안을 메운 것은 비명보다 처절한 남자의 오열이었다. 그것은 울음이라기보다, 오래 참아온 둑이 무너지며 터져 나오는 물줄기 소리 같았다.

핸들에 고개를 파묻고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는 도진을 보며, 이수는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제 안의 서늘하고 못된 마음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안 도진이 보여준 듬직한 어깨와 능청스러운 웃음, 어떤 어려움에도 넉살 좋게 웃어넘기던 그 넉넉함이 그의 전부라 믿었던 건 나의 비겁한 착각이었다.

그는 다 나은 것이 아니라, 새살이 돋지 못한 상처이기에 다만 그 상처를 꾹 누르고 있었을 뿐이었으리라. 나를 품어주기 위해 자신의 아픈 흉터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두었던 그 우직함이 이제야 이수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삶의 풍파를 다 겪어낸 듯한 도인 같은 풍모에 의지한 채 이수는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이 남자 또한 나와 같은,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깊고 커다란 상처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겨우 서 있었다는 것을.

그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피 흘리는 흉터를 제 몸으로 가린 채, 나를 먼저 품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역시 부끄럽다, 참으로.’

이수는 제 손에 쥐어진 차가운 표정과 날카로운 말들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나의 상처를 방패 삼아 성벽을 높이 쌓는 동안, 그는 자신의 상처를 덮어 그 위에 나를 위한 다리를 놓아주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의 끝 모를 바닥에, 기꺼이 단단한 닻이 되어주어야 했다.

이수의 마음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성벽이 일순간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 무너진 자리에는 단단하고 뜨거운 다짐이 차올랐다.

이수는 더 이상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기로 했다. 이 남자가 나를 위해 기꺼이 땀 흘리고 웃어주었듯, 나 역시 그의 가장 시린 역린을 온몸으로 안아주겠노라고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했다.

이수는 떨리는 손을 뻗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도진의 거친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아주 힘주어 감싸 쥐었다. 손 끝으로 전해지는 그의 떨림은 이수의 심장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안해, 자기야."

이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도진이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를 놓지 못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미안해. 나의 이 지독한 차가움이 당신에게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장을 찌르고 있는 줄 몰랐어.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어. 정말 미안해, 도진아."

이수는 도진의 젖은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거친 수염의 느낌과 뜨거운 눈물의 온도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더 이상 덥지 않은 시원한 계절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빈틈없이 꽉 찬 고요보다 더 단단하고 뜨거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로의 가장 아픈 밑바닥을 확인한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진하고도 조용한 온기였다. 그 온기는 애써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애써 달래는 말보다, 그저 가만히 곁을 지키기로 한 마음들이 겹겹이 쌓인 덕분이었다.


도진은 이수의 손바닥에 뺨을 기댄 채, 한참 동안 거친 숨을 골랐다. 아이처럼 쏟아내던 울음이 잦아들자, 그 자리에는 발가벗겨진 듯한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도진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성에가 맺히기 시작한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안의 공조기가 낮게 울렸다. 송풍구에서 흘러나온 바람이 두 사람의 젖은 얼굴을 천천히 말려 주었다.

도진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다 말고, 이수가 여전히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듯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이수는 그 미세한 힘을 느끼고서야,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그의 손을 다시 감싸 쥐었다.

붙잡는 것도, 놓아주는 것도 아닌 애매한 온도로. 지금은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평생을 '듬직한 아빠'로, '능청스러운 천마'로 분장하며 버텨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는 지금 가장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자신의 가장 못난 밑바닥을 들키고 말았다.

"미안해, 이수야... 이런 꼴 보여줘서. 내가 너무 못났지."

도진이 젖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이수의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다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눈가에 여울져 있었다. 하지만 이수는 도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그를 붙잡았다.

"도진아, 나 봐."

이수는 도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 속에, 길을 잃고 떨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이수는 그 아이를 외면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못난 게 아니라, 용감한 거야. 나한테 이만큼 아프다고, 무섭다고 말해준 거잖아. 나는 그동안 당신이 너무 단단해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아. 당신도 나처럼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는 걸."

이수는 도진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눈물 흘리고 무너지는건 아무 상관없어.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해줘. 그렇게 무너지기 전에 아프면 아프다고, 무서우면 무섭다고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줘. 혼자서 그 무거운 제방을 버티고 서 있을 필요 없어. 이제 내가 자기 옆에 같이 서 있을게."

도진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가 평생 기다려온 구원의 밧줄 같았다. 도진은 이수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이수의 어깨가 그의 눈물로 다시 젖어갔지만, 이번 눈물은 아까와는 달랐다.

"고마워, 이수야. 정말... 고마워."

아파트 단지 앞, 가로등 불빛만이 두 사람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밤바람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차 안의 공기는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이수는 도진의 가슴에 귀를 대고 다짐했다. 이 남자가 나를 위해 놓아주었던 그 수많은 다리들을, 이제는 자신이 지켜내겠노라고.

우리의 상처는 여전히 흉터로 남아있겠지만, 이제는 그 흉터조차 서로를 알아보는 눈부신 징표가 될 것이었다.

어지럽게 흩어졌던 마음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밤. 남한산성에서 시작된 시린 폭풍은, 그들의 집 앞 가장 깊은 품 안에서 비로소 따뜻한 봄바람이 되어 잦아들었다.

“집에 갈까.”

이수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위로도 다짐도 아닌, 오늘을 마무리하기 위한 말이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동을 거는 소리가 차 안에 작게 퍼졌다.


차는 아무 말 없이 도로 위로 흘러나갔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떨림, 숨결 속에 묻어난 체온, 서로의 심장 박동이 미세하게 맞닿는 느낌. 말은 없지만, 그 모든 것이 말보다 더 확실하게 말했다.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차 안을 가볍게 스쳤지만, 그 바람조차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흔들리던 마음의 조각들이 고요 속에서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그 순간, 도진의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고 이수의 가슴 속 한 켠에 작고 단단한 닻이 내려앉았다. 닻은 바다 위에서 배를 붙잡듯, 그들을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서로에게 고정시키는 힘이 되어 주었다.

말없이 이어진 심장 박동, 손끝의 온기, 그리고 침묵 속에서 확인한 신뢰.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시린 곳을 함께 품은 채, 세상과 시간을 모두 잊은 듯, 단 하나의 평온 속으로 완전히 잠겼다.



타인의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내가 세운 성벽의 높이를 실감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휘둘렀던 날 선 방어들이 누군가의 시린 자리를 관통했음을 뒤늦게 깨닫는 밤. 이제는 도망치는 대신 그 아픈 심연에 가만히 닻을 내립니다. 흉터가 서로를 알아보는 유일한 지도가 되어줍니다.

"혼자 버틸필요 없어, 이제 내가 당신 곁에 같이 서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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