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추위가 다정한 인사가 될 때

가장 시린 방의 문을 열어, 당신이라는 온기를 들이다

by 아를밤

계절은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고, 가을의 시작에서 쏟아냈던 뜨겁고도 시린 눈물은 어느덧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남한산성에서의 그 폭풍 같던 밤 이후로도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다. 그날 이후, 그는 이상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도진이라는 바다 깊숙한 곳에 더욱 깊게 박혀 들어갔다.

초겨울의 찬 공기는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 안쪽을 시큰하게 했다. 이수는 목도리를 한 번 더 끌어올리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딸랑. 편의점의 문을 열 때마다 들리는 맑은 소리는 이제 이수에게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곳으로 들어서는 신호음이 되었다. 매장 안은 한결 짙어진 겨울 냄새로 가득했다. 얼음 컵이 가득하던 냉동고 대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빵 찜기와 온기 가득한 캔 음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삭막하고 차가웠지만, 이 작은 편의점 안의 공기는 달콤하고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기야, 오늘은 진짜 춥다. 손 얼었네."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까지 칭칭 감고 들어온 이수를 보며, 테이블 옆에 서 있던 도진이 넉살 좋게 웃었다. 그는 익숙하게 제 두 손을 비벼 온기를 만든 뒤, 이수의 차가워진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남한산성의 그 처절했던 오열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겹겹이 쌓인 눈처럼 두터운 믿음과, 서로의 온도를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볼을 타고 전해지는 도진의 온기에 이수는 비로소 팽팽했던 하루의 긴장을 내려놓았다.

"그러게. 그래도 여기 오니까 살 것 같네."

이수가 도진의 가슴에 얼굴을 살짝 묻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밖은 살점이 떨어져 나갈 듯한 추위가 금방이라도 올 듯했지만, 적어도 이 품 안에서만큼은 겨울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편의점 유리창 너머로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칠수록, 매장 안의 노란 조명은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이수는 도진이 건네준 따뜻한 캔커피를 양손으로 감싸 쥐며, 스마트폰 화면을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어때? 겨울엔 역시 공기는 차고 몸은 따뜻한 게 최고잖아."

화면 속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숲을 배경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천 스파가 딸린 펜션이 담겨 있었다. 도진은 이수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화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어깨에서 배어 나오는 묵직한 온기가 이수의 팔에 닿았다.

"우와, 진짜 예쁘다. 이수 너랑 이런 데 앉아 있으면 세상 시름 다 잊어버리겠는데? 그런데 여기, 꽤 멀지 않아?"

"응. 좀 멀어. 그래도 꼭 여기가 가고 싶어서."

이수가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며 덧붙였다. 사실 이곳은 이수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들고, 세상의 문을 모두 걸어 잠갔던 겨울들. 친구들의 안부 전화조차 날 선 가시처럼 느껴져 전원을 꺼버리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때, 유일하게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던 건 가족이었다. 특히 동생 서이연은 매년 겨울마다 이수를 차에 태워 이곳으로 데려오곤 했다.

"언니, 울더라도 뜨거운 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나서 울어. 그럼 혹시 알아? 그 눈물도 뜨거운 물에 같이 녹을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초라한 밑바닥을 동생과 함께 씻어내던 곳. 이수에게 이 공간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어들던 '마지막 요새'와도 같았다. 그곳에서 이수는 그동안의 상처도 혼자 감당해야 했던 두 딸들도, 잠시나마 모두 내려놓았다.

누구에게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아니 공유할 수 없었던 그 숨구멍 속으로 이제는 도진과 함께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눈 덮인 산길을 달려 예약해 둔 그곳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자마자 달려드는 알싸한 산 공기가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도진은 익숙하게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짜 고요하다. 이수야, 네가 왜 여길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아."

짐을 풀고 들어선 방은 예전 그대로였다. 테라스 너머로 하얀 옷을 입은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야외 스파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수는 익숙한 듯 테라스 난간을 잡고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여기, 사실 내 동생 이연이랑만 오던 곳이야. 내가 제일 힘들 때, 세상 모든 사람이 싫어질 때, 이연이가 나를 여기다 데려다 놓고 억지로 밥 먹이고 물에 집어넣었거든. 그럼 나는 어떤 날은 엉엉 울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설산만 쳐다보고... 내 못난 꼴을 다 아는 곳이지."

테라스 난간을 잡고 서서 이수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도진은 이수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 위로 두툼한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이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연이가 아니라 자기랑 오고 싶었어. 나의 가장 은밀한 안식처를 자기한테도 보여주고 싶어서. 이제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당신이랑 같이 여기 머물고 싶어서."

도진은 담요 위로 이수를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등 뒤에서 전해지는 도진의 묵직한 심장 박동 덕분에 이수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이수가 내렸던 그 단단한 닻은, 이제 이 고요한 산속의 물결 아래 더욱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어, 이수가 들려준 이야기의 무게를 가슴으로 가늠해 볼 뿐이었다. 테라스 너머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사이로 도진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이수야."

도진이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수를 돌려세워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찬 바람에 발그레해진 이수의 뺨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는 도진의 손길은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정성스러웠다.

"나는 내가 그냥 예쁜 펜션에 놀러 온 줄 알았어. 그런데 방금 네 말을 듣고 나니까, 내가 지금 너의 가장 소중하고 깊은 방에 초대받았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나."

도진의 목소리는 깊고 단단했다. 그 깊은 진심이 이수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이연이가 너를 여기 데려다 놓고 억지로 밥을 먹였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때의 너를 내가 미리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할 만큼. 그리고 고마워. 그동안 혼자 웅크리고 있던 이 방의 문을 열고, 나를 기꺼이 들여보내 줘서."

도진은 이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맞댔다. 서로의 숨결이 하얀 입김이 되어 섞여 들었다.

"이제 여기는 너 혼자 숨어드는 곳이 아니야. 우리가 같이 쉬어가는 곳이지. 밖이 아무리 시려도, 내가 네 곁을 든든하게 지켜줄게."

이수는 도진의 가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도진의 두꺼운 코트에서 배어 나오는 묵직한 온기가 코끝을 스쳤다.

"응. 이제는 혼자 오지 않을 거야. 도진이랑 같이 올 거야."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를 붙잡고 서 있었다. 산속의 고요한 공기조차 두 사람의 온기에 데워져 부드럽게 흐르는 듯했다. 이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야외 스파가, 두 사람의 못다 한 이야기들을 품어줄 차례였다.


"아이고, 사장님. 저 지금 딱 알맞게 익은 것 같은데, 이대로 꺼내면 문어 숙회 되는 거 아닙니까?"

김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스파 안, 도진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물속에서 손을 휘저을 때마다 하얀 물보라가 이수의 무릎가에 닿았다. 도진은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이수를 웃게 하려 애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억지로 집어넣은 줄 알겠네. 자기가 먼저 들어오자며."

"그거야 자기가 추워 보이니까 그랬지. 근데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좋네. 밖은 얼음장인데 몸은 뜨끈한 게, 이게 진짜 어른들의 놀이터지."

도진은 웃으며 이수의 어깨 위로 따뜻한 물을 끼얹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머리 위로 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슬며시 등을 돌려 앉았다.

"와, 이수야. 저기 봐. 진짜 눈 온다."

도진이 테라스 너머 눈 덮인 숲을 보기 위해 몸을 틀었다.


이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면 위로, 도진의 넓고 단단한 어깨가 듬직하게 솟아 있었다. 이수는 멍하니 그 등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송이가 도진의 젖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 묵직하고 넓은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에서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뒷모습과 닮아 있었다. 온 세상이 검은 옷으로 가득했고, 외동딸이던 이수의 어머니 그리고 이수와 이연. 세 여자가 기댈 곳은 오직 아버지의 뒷모습뿐이었던 그날. 상주 자리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이하던 아버지의 등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바람을 혼자 다 막아줄 것처럼 거대하고 단단했다.

지금 제 앞에 앉아 있는 도진의 어깨가, 그때 보았던 아버지의 그 깊은 등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타인의 아픔을 묵묵히 짊어지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넉살 좋게 웃어넘기는 그 우직함까지도.

이수는 홀린 듯 물속으로 손을 뻗어, 그의 곁에 놓인 도진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문득 손끝에 닿는 도진의 묵직한 감촉 위로, 어릴 적 잡았던 아버지의 손이 겹쳐졌다. 평생 가죽을 만지느라 거칠어지고 굳은살이 박여 있던 아버지의 커다란 손. 시장통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그 투박한 손마디를 꽉 쥐었을 때 전해지던 안도감이, 지금 도진의 손을 통해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아, 이 사람이라면…….’

그 찰나의 확신 위로,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수면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겨울 공기에 노출된 뺨 위로 흐르는 그 온기는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것은 지난 세월 홀로 겨울을 견디며 억지로 삼켜왔던 외로움의 찌꺼기들이, 도진이라는 듬직한 등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녹아내린 것이었다.

이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 하나가 가슴 한쪽에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 사람의 등은, 슬픔 앞에 서는 법을 아는 사람의 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거칠고 묵직했던 손을 처음 붙잡았을 때와 비슷한 안도감이, 도진의 손을 통해 조용히 전해졌다.

지금은 한없이 가볍게 장난을 치고 있지만, 저 어깨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까지 기꺼이 짊어질 우직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수는 말없이 도진의 등에 이마를 가만히 기댔다. 도진은 갑작스러운 이수의 온기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응, 이수야. 나 여기 있어."

눈앞의 설경은 차갑고 시렸지만, 이수가 붙잡은 도진의 손과 기대어 있는 그의 등은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삶의 버팀목이었다.


도진은 아무 말 없이 이수의 손을 더 깊이 감싸 쥐었다.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로 뜨거운 물이 스며들었고, 그 온기가 천천히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수는 그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다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멀리서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소리가 마치 세상이 아주 느리게 숨을 고르는 것처럼 들렸다. 이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이 겨울을 더 이상 견뎌내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건너고 있다는 사실을.

도진의 등은 여전히 말없이 이수의 앞을 지키고 있었고, 그 등 뒤에서 이수는 처음으로 겨울이 끝나는 방향을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혼자 벼랑 끝을 견디던 계절이 누군가의 곁에서는 비로소 함께 건너야 할 풍경이 됩니다. 가장 깊이 숨겨온 방의 문을 열어 타인의 온기를 들여놓을 때, 얼어붙었던 고립은 다정한 인사가 되어 녹아내립니다. 묵직한 등 뒤에 기어이 마음을 기댈 때, 겨울은 더 이상 끝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축복이 됩니다.

ChatGPT Image 2026년 2월 14일 오후 07_27_42.png "나의 슬픔도 기댈 수 있는 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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