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바위가 웃음을 보일 때, 비로소 열린 새로운 문
산속에서의 꿈 같은 겨울밤을 뒤로하고 돌아온 일상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수의 마음만큼은 따뜻하게 달궈져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편의점의 시계는 바깥세상의 시간보다 조금 더 따뜻하게 흘렀다. 이곳은 서로의 계절을 확인하고, 무너졌던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두 사람만의 ‘안식처’였다.
두 사람의 전용 시계가 흐르는 곳, 편의점 테이블 너머로 마주 본 도진의 눈빛은 산속에서의 그 밤보다 더 깊어져 있었다. 도진은 이수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미뤄두었던 숙제를 꺼내듯 나직하게 말했다.
"나, 자기네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싶어."
도진이 건넨 따뜻한 캔커피의 온기보다 더 뜨거운 말이었다. 계산대 위에 나란히 놓인 두 사람의 손 위로 겨울 햇살이 비껴들었다. 남한산성의 눈물도, 산속 스파에서의 고백도 모두 지나온 지금, 도진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이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으로 이 남자를 당당히 초대하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이수의 그 결심은 그 날 저녁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말을 전하고 엄마의 반응에 금세 움츠러들었다. 이수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진에게 확신이 생긴 건 사실이었지만, 현실의 아버지는 따뜻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아유, 뭘 벌써 보냐. 그냥 너희끼리 예쁘게 잘 만나면 됐지. 엄마는 나중에, 한참 나중에 천천히 봐도 돼."
엄마의 목소리에는 짙은 우려와 당혹감이 깔려 있었다. 엄마가 만남을 미루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거대한 바위처럼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수의 아버지. 아버지는 가족 밖의 사람에게 웃음을 보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무뚝뚝함을 넘어, 타인과는 아예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이었다. 이수의 첫 번째 결혼.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버지가 그 남자를 본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결혼식을 반대해 식도 올리지 못했을 때도, 남자가 집으로 찾아오면 아버지는 신발을 채 신기도 전에 집을 나가버렸고, 그 남자가 무슨 말을 붙여도 벽 보고 선 사람처럼 대꾸 한마디 없던 아버지였다.
투명 인간 취급을 당했던 지난날의 상처가 이수의 가슴을 다시 시큰하게 찔렀다. 그런 아버지에게 도진을 데려가는 것. 그것은 이수에게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도진이마저 그런 취급을 당하면 어쩌지?'
그 서늘한 거절을 도진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진은 이수의 걱정 섞인 눈빛을 특유의 넉살로 받아쳐 냈다.
며칠 뒤, 도진은 이수의 고민을 눈치챈 듯, 넉살 좋게 웃으며 물었다.
"이수야, 저기 백운호수 앞에 유명한 빵집 있잖아. 거기 줄 서서 사는 빵이라는데, 우리 부모님 드리고 싶어서 좀 샀거든. 그리고 이수 부모님 드릴 것도 하나 더 샀어. 근데 내가 직접 갖다 드리는 건 좀 오버일까? 식당 위치만 알려줘. 그냥 빵만 드리고 올게."
도진은 이수의 걱정을 뚫고 홀로 부모님의 식당 문을 열었다.
딸랑.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들어서자, 안쪽에서 앞치마를 두른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타인에게는 웃음기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수를 만나고 있는 강도진입니다. 근처에 왔다가 빵집이 유명하다고 해서 조금 사 왔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시간 되실 때 드셔보세요."
도진은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손끝엔 정성이 듬뿍 담겨 있었다. 무거운 고기 세트도, 비싼 술도 아니었다. 그저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소박한 빵 봉투였다.
아버지는 도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쳐다봤다. 그때였다. 아버지의 무거운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그때, 주방 안쪽에서 인기척을 들은 엄마가 급히 나왔다. 혹시나 아버지가 또 무뚝뚝하게 굴지는 않을지, 괜히 도진이 무안해질까 하는 마음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식당으로 나온 순간, 엄마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한마디였지만, 아버지는 도진을 향해 분명하고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엄마는 쥐고 있던 행주를 떨어뜨릴 뻔했다. 남들에게는 그리 차갑게 굴던 아버지가, 처음 보는 청년의 넉살 앞에 무장해제 된 모습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평생 가족 외에는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그 얼굴이, 고작 빵 한 봉투와 도진 앞에서,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풀려 있었다.
엄마는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도진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미소 하나로, 식당 안의 공기가 아주 잠시 달라진 것을 엄마는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진은 이수에게 전화를 했다.
“어, 이수야. 빵 잘 드렸어. 아버지, 어머니 다 계시더라. 아버님은 웃으면서 받으셨고, 어머님은 주방에 계시다 급히 나오셔서 인사해주셨어.”
도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도진은 그 침묵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듯 말을 이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왔어. 괜히 더 오래 있으면 부담되실 것 같아서, 나도 좀 조심스러워지더라.
이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손에 쥔 휴대전화가 미세하게 미끄러졌다.
아버지가, 낯선 남자 앞에서 얼굴을 들고 있었을 장면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빠는 늘 사람을 마주할 때 시선을 피했고, 말보다 침묵으로 먼저 벽을 쌓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고마워.”
이수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심장은 한 박자 늦게 뛰고 있었다. 도진의 목소리가 여전히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동안, 이수는 알 수 없는 예감 하나를 조용히 가슴 안에 눌러 담았다.
그날 밤, 이수가 퇴근하고 돌아온 시간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현관 불을 켜자마자 느껴지는 집 안의 공기는 낮보다 한 톤 낮아져 있었다. 이수는 코트를 벗어 걸고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그때 안방 쪽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왔어?”
엄마는 잠옷 차림 위에 가디건을 걸친 채였다. 아무 일 없다는 듯한 얼굴로 이수와 엄마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응. 엄마 아직 안 잤어?”
“응... 잠이 안 와서.”
엄마는 잠시 말없이 이수를 바라보다가, 이야기를 꺼내었다.
“도진이라는 그 사람 있잖아.”
이수의 손이 미세하게 멈췄다. 엄마는 그 반응을 못 본 척, 최대한 평소처럼 말을 이었다.
“오늘 식당에 다녀갔어.”
“...응. 아까 전화로 말해줬어.”
“그래?”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잠깐의 침묵. 그 사이 주방의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수야.”
엄마는 이수의 이름을 부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가만히 포개었다.
“엄마가 주방에 있다가, 인사 소리 듣고 급하게 나왔거든.”
엄마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네 아빠가 또 괜히 자리 피할까 봐. 인사도 안 받아주고 서 있을까 봐.”
엄마는 짧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근데 말이야.”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네 아빠가 그 사람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웃더라.”
이수의 눈동자가 천천히 커졌다.
“진짜로. 입꼬리를 이만큼, 올리면서.”
엄마는 손으로 그 미묘한 움직임을 흉내 냈다. 그러고는 이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는 네 아빠 그런 얼굴, 처음 봤어. 너 낳고, 키우고, 지키면서도 한 번도 못 봤던 얼굴이었어.”
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의 “별일 없었어”라는 말이 이제야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혔다.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음에도 자신을 안심시키려 덧칠한 배려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이 수식 없는 진실 그 자체로 들려 비로소 안도했다.
“그래서 엄마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어. 괜히 놀란 티 내면, 네 아빠가 다시 문 닫을까 봐.”
엄마는 이수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따뜻하지만, 오래 붙들지는 않았다.
엄마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아빠는 그 사람이 정말 좋은가보더라.”
그 말은 허락이 아니라, 처음으로 건네는 안심에 가까웠다.
이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겨울밤 공기처럼 차갑고도 맑은 숨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장 단단한 문 하나를 이미 조용히 통과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누군가 억지로 허문 벽이 아니라, 스스로 문이 되어 열려버린 것이었다.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굳게 닫힌 마음이 낯선 온기 하나에 속절없이 허물어집니다. 무거운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비로소 따뜻한 안도가 고이고, 두려움으로 서성이던 문턱 너머의 환한 빛을 마주합니다. 오랫동안 얼어붙었던 경계가 녹아내리며, 비로소 온전한 축복 아래 숨을 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