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먼저 도착한 허락
문을 열고 들어온 청년은 말이 많지도, 눈치를 과하게 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그게 먼저 보였다. 보통은 고개를 숙이거나, 괜히 웃음을 붙이거나, 아니면 말로 자신을 증명하려 드는데, 이 청년은 그냥 서 있었다. 빵 봉투를 두 손으로 들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아버지는 왜 그 얼굴을 한 번 더 보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딸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오래전 자신이 잃어버린 어떤 태도를 이 청년이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붙잡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사람. 그 태도가 싫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주 짧게 대답했다.
“어. 그래.”
그 말 속에 담긴 것들을, 그는 굳이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수에게는 그 한마디가 세상 무엇보다 커다란 용기가 되었다. 말보다 태도로 허락받았다는 느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번졌다. 문을 열어젖히지는 않았지만, 더는 밀어내지 않는다는 신호. 그걸로 충분했다. 이수는 비로소 굳은 믿음을 얻었다. 이제는 자신이 도진의 곁에 서서 그의 세계를 마주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 용기 뒤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한 사실, 한 번의 결혼과 두 아이의 엄마라는 이력은 이수에게 늘 먼저 사과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이수는 도진과 함께 그의 부모님을 뵙기 위해 길을 나섰다. 도진의 손을 잡고 약속 장소인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도진의 부모님과 두 아이가 보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긴장감 속에 서 있을 때였다.
“아빠!”
여덟 살 딸아이와 여섯 살 아들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이수와 나란히 서 있는 도진을 향해 발을 구르며 뛰어오는 그 맑은 모습. 자신에게 뛰어오는 게 아닌데도, 그 아이들의 해맑은 달리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수의 팽팽했던 긴장은 툭, 하고 끊어졌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겨울바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처음 마주하는 낯선 어른 앞에서 아이들이 기죽지는 않을까, 혹여나 자신을 밀어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이수의 마음은 아이들의 해맑은 인사 한마디에 눈 녹듯 사라졌다. 아이들은 낯가림도 없이 이수를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반겨주었다.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북적임이 가득한 고깃집. 식당 안에서의 시간은 이수가 걱정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쭈뼛거리며 낯을 가릴 거라 생각했던 이수는, 예상치도 못한 도진의 첫째 딸에 의해 기분 좋게 무너졌다.
“이모, 여기 앉아도 돼요?”
이수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이수의 옆에 앉았다. 여덟 살 서윤이는 밥을 먹는 내내 이수의 옆자리에 딱 붙어 앉았다. 처음 본 사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스스럼이 없었다. 이수는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긴장하고 있었지만, 제 옆에서 조잘대며 반찬을 올리는 아이의 온기에 서서히 마음이 풀어졌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이수의 옆에 앉았다. 그 자연스러움이, 이수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서글픈 모자람들이 서로를 맞대자, 포근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이수는 아이의 곁에서 비로소 따뜻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낯선 이를 이토록 쉽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너그러움이, 사실은 그만큼 깊었던 엄마라는 빈자리의 크기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기댈 곳이 간절했던 아이의 작은 어깨가 팔을 타고 전해질수록, 이수는 아이를 감싸 안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도진의 부모님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말없이 미소 지었고, 도진은 그런 이수의 눈빛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아이의 무게는 생각보다 묵직했고, 그 온기는 이수의 가슴속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기어이 뜨거운 무언가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도진의 부모님과도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매서운 눈초리 대신 따뜻한 배려로 이수를 맞아준 그들의 넉살은 도진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나누며 따뜻한 한때를 보낸 뒤, 어느덧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카페 문을 나서는데, 첫째 서윤이와 둘째 도윤이가 이수의 손을 꽉 붙잡았다.
떠나지 말라는 듯, 혹은 다시 꼭 오라는 듯 이수의 손가락을 감싸 쥐는 아이들의 작은 손끝에서 이수는 참았던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눈앞의 서윤이와 도윤이가 눈에 밟혀서이기도 했지만, 그 아이의 손에서 집에 두고 온 자신의 아이들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누군가의 손을 먼저 잡고 있을까.’
단순히 도진의 아이가 가여워서가 아니라, 그 빈자리가 자신의 아이들과도 너무나 닮아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이수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 삼키며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수의 눈물은 도진의 아이를 향한 가여움이자, 자신의 아이들을 향한 미안함, 그리고 그 모든 빈자리를 채우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뜨거운 숨이었다.
어떤 허락은 굳이 문장을 빌리지 않고도 공기 중에 먼저 도착합니다. 아이들의 서툰 보폭과 그 작은 손의 온기를 건네받을 때, 나를 지탱하던 팽팽한 긴장은 비로소 맥을 놓습니다. 텅 빈 자리를 서로의 숨결로 메우며,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서로의 세계로 걸어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