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2월의 설원, 너의 세계를 짊어지는 일

혼자서는 넘지 못했던 일상의 산

by 아를밤

2월의 끝자락, 최강 한파와 폭설 예보가 세상을 꽁꽁 얼려버린 밤이었다. 하지만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 위로 흐르는 온기만큼은 어느 때보다 밀도가 높았다.

"자기야, 나 오늘 병원 다녀왔어."

이수가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며 툭 던진 말에 도진의 눈길이 머물렀다.

"의사 선생님이 이제 약 좀 줄여봐도 되겠대. 공황기 올 때만 먹는 비상약 말고, 매일 먹던 건 절반으로 줄이기로 했어. 나, 정말 많이 좋아졌나 봐."

이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주일이나 약을 잊고 지냈음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기적 같은 변화를 고백했다. 도진은 한참 동안 이수의 눈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자기가 약을 잊을 만큼, 마음속에 다른 풍경이 많이 들어왔다는 뜻 아닐까? 자연스럽게 밀려난 거라면, 그건 자기가 정말 단단해졌다는 증거야. 고생 많았어, 우리 자기가 정말 대단해."

도진의 깊은 수긍에 이수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내 아픔을 병명이 아닌 '성장'으로 봐주는 사람. 이수는 그를 보며 '기대고 싶다'는 마음을 선명하게 품었다. 도진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주말에 다연이랑 다은이 데리고 눈썰매 있는 글램핑장 가자. 사실 혼자 애들 챙겨서 눈썰매 태워주기 정말 힘들잖아. 내가 다 해줄게. 고기도 구워 먹고, 애들 원 없이 뛰어놀게 해주자."

도진의 제안은 단순히 놀러 가자는 말이 아니었다. 혼자서 짊어지기엔 너무 가팔랐던 육아라는 눈썰매장, 그 미끄러운 길 위에서 휘청이는 이수의 어깨를 대신 받쳐주겠다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이수는 맥주 캔의 차가운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아주 오래 묵혀둔 속마음을 꺼냈다.

"나 사실... 애들이 눈썰매장 가자고 할 때마다 속으로 겁부터 났거든. 그래서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이수의 시선이 테이블 모서리에 머물렀다.

"남들한테는 그냥 쉬운 나들이일지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그게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어. 애들 챙기고, 무거운 썰매 끌어주다 보면 내 마음이 바닥날 것 같아서... 감당하지 못할까 봐 매번 다음에 가자고 미루기만 했어. 그게 내내 미안했는데, 자기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정말 가보고 싶다."

도진은 말없이 이수의 손을 조금 더 세게 맞잡았다.

그 묵직한 손의 압력이 "이제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보다 더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가족이 전부이고 거짓을 혐오하는 이수는, 다음 날 아침 열한 살 다연이와 열 살 다은이를 정직하게 마주했다.

"엄마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 생겼어. 너희와 함께 눈썰매를 타러 가고 싶어 하는 따뜻한 분이야. 우리 이번 주말에 그 삼촌이랑 같이 여행 갈까?"

아이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이수의 솔직한 고백은 아이들에게 불안이 아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로 다가갔다. 엄마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

아이들은 엄마의 정직한 눈빛에서 이미 안도감을 찾은 듯했다.


약속 당일, 도진의 차가 아파트 정문에 도착했다. 차에 올라탄 아이들은 낯선 공기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도진은 특유의 듬직하고 편안한 미소로 아이들을 맞이했다. 네 사람이 향한 첫 행선지는 대형마트였다.

카트를 밀며 시식 코너를 돌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고르는 일. 도진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장난을 치며 웃음을 끌어냈다. 북적이는 마트 안, 묵묵히 카트를 밀며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귀 기울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수는 걸음을 늦추었다.

혼자 장바구니의 무게를 감당해왔던 시간들 위로, 아주 평범한 하루가 조용히 겹쳐지고 있었다. 그제야 이수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은 ‘완벽한 가족’이 아니라, 이런 일상의 온기였다는 것을.


폭설이 쏟아진 글램핑장은 온통 하얀 소음으로 가득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보며 다연이와 다은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수는 그동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눈썰매장으로 향하며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걱정은 이내 하얀 눈 위로 흩어졌다.

도진이 두 딸의 썰매를 끌어주며 설원을 누비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듬직한 아빠처럼 아이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장난스럽게 눈싸움을 걸며 아이들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도진의 뒷모습. 그 뒷모습 위로 이수가 홀로 짊어왔던 고단한 시간들이 눈 녹듯 씻겨 내려갔다.

“아이고, 따님들이 아빠를 참 잘 따르네요! 젊은 아빠라서 그런가 애들하고도 잘 놀아주고, 엄마 아빠 인상이 참 좋으셔서 애들도 밝네요.”

낯선 호칭에 아이들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이수는 무의식처럼 아이들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혹시라도, 그 말이 작은 균열이 되지는 않을지. ‘엄마 아빠’라는 이름으로 묶여 불리는 순간, 귓불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부정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도진은 괜히 아이의 모자를 고쳐 씌워주었고, 이수는 그런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처럼 보였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마음을 깊게 건드렸다.

잠시, 한 번 실패한 이름을 다시 갖는다는 게 과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아이들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찾는 것을 보고, 그 의문은 금세 힘을 잃었다.

하얀 설원 위에 겹쳐진 네 개의 그림자는 바람에 흩어지지 않았다..

어느덧 설원 너머로 어둠이 짙게 깔리고, 도진이 피워 올린 화로의 숯불만이 텐트 앞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도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연기 자욱한 불판 앞에서 빨개진 코끝을 비비면서도, 그는 아이들의 접시에 잘 익은 고기를 먼저 올려주느라 바빴다. 잘 구워진 고기와 따뜻한 찌개로 배를 채운 다은이는 어느새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지만, 큰딸 다연이는 평소와 달랐다.

평소라면 밥을 먹자마자 제 방이나 다름없는 구석 자리로 자리를 옮겼을 아이였다. 하지만 오늘 다연이는 빈 밥그릇을 앞에 두고도 가만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화로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튀는 불꽃을 응시하는 듯했지만, 아이의 귀는 줄곧 도진과 이수의 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 자기야. 썰매 끌어주느라 내일 몸살 나는 거 아냐?"

이수가 걱정스러운 듯 건넨 말에 도진은 빨개진 손을 불에 쬐며 호탕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애들 웃는 소리 들으니까 힘든 줄도 모르겠던데."

화로의 불꽃이 이수의 눈동자 속에서 타닥거리며 춤을 추었다. 도진은 석쇠 위의 고기를 정성스레 뒤집으며, 이수가 무심코 흘렸던 소중한 기억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자기 예전에 그랬잖아. 어릴 때 갯벌에서 조개 잡던 게 너무 재밌었다고.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던 거, 날 풀리면 우리 꼭 같이 가자. 이번엔 내가 조개 담을 바구니 든든하게 들어줄게."

도진의 말에 이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이 지나가듯 했던 말을 이토록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몽글하게 피어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풍경, 내가 행복했던 기억 속으로 이제는 그와 그의 아이들까지 모두 초대하고 싶다는 열망이 차올랐다.

"아! 맞다. 그럼 자기야, 다음엔 우리 서윤이랑 도윤이까지 다 같이 가자! 내가 좋아하는 그 바다에 우리 여섯 명이서 갯벌 체험 가는 거야. 어때?"

'우리'라는 말 뒤에 붙은 '여섯 명'이라는 숫자가 밤공기 속에 묵직하고도 따뜻하게 퍼져 나갔다. 이수는 말을 내뱉고는 슬며시 곁에 앉아 대화를 듣고 있던 다연이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가 혹여나 낯선 아이들과 섞이는 것을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었다. 하지만 다연이는 화로의 불빛을 받으며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수의 걱정을 단번에 씻어주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엄마. 나도 좋아. 동생들이랑 같이 가면 더 재밌을 것 같아. 엄마가 좋아하는 거니까 나도 같이 하고 싶어."

다연이의 입가에 어린 희미한 미소를 확인한 순간, 이수의 가슴 속에 고요가 차올랐다. 도진은 흐뭇한 얼굴로 다연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다연아. 삼촌이 서윤이랑 도윤이한테도 잘 말해둘게. 우리 여섯 명,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조개잡이하러 같이 가자."

화로의 불빛이 네 사람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밤, 여섯 명의 이름이 2월의 공기 속에 조용히 머물렀다.



혼자서는 결코 오르지 못했을 시린 언덕을, 이제 누군가의 단단한 보폭에 기대어 함께 넘는다. 내 몫의 고단함을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는 그 온기 앞에서, 오랫동안 팽팽했던 마음의 긴장이 하얀 눈 위로 부드럽게 흩어진다. 낯선 이들이 던진 평범한 호칭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밤, 타닥이는 불꽃 속에 우리가 함께 건너갈 내일이 조용히 여문다.

ChatGPT Image 2026년 2월 14일 오후 07_56_36.png “하얀 설원 위에 겹쳐진 네 개의 그림자는, 더 이상 외로운 섬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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