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무심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른들의 걱정을 비웃는 아이들의 투명한 세계

by 아를밤

시간은 어느덧 계절을 뛰어넘어 4월에 닿아 있었다. 벚꽃 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토요일 오후, 이수와 도진은 각자의 보물들과 함께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이수는 모퉁이를 돌기 전 열한 살 다연이와 열 살 다은이의 손을 한 번 더 꼭 잡았다.

"엄마가 말했지? 귀여운 동생들이라고. 그래도 혹시 불편하면 엄마한테 바로 말해줘."

이수의 심장은 기분 좋은 소란을 피웠다. 가족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자신의 세계에 타인이 들어오는 오늘은 낯설 만큼 조심스러운 날이었다.

먼저 도착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서 있던 도진은 멀리서 걸어오는 이수의 가족을 발견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수 역시 아이들과 걸어오며 연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두 걸음. 하지만 그 짧은 거리조차 건너기 힘들 만큼 걱정과 우려가 뒤섞인 어색한 미소가 두 사람의 얼굴에 번졌다.

"오래 기다렸지? 애들이 오늘따라 준비가 좀 늦어서..."

"아니야. 우리도 방금 왔는걸. 자기, 긴장돼서 얼굴 굳은 것 봐."

도진이 짐짓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그의 눈가에도 숨길 수 없는 조바심이 서려 있었다. 이수는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도진의 옆에 선 아홉 살 서윤이와 일곱 살 도윤이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도진 또한 이수의 곁을 지키는 열한 살 다연이와 열 살 다은이를 향해 따뜻하지만 조금은 긴장된 시선을 보냈다.


"도진 삼촌 기억나지? 지난번 눈썰매장에서 우리 진짜 재밌었잖아. 다연아, 다은아. 인사드려야지."

아이들은 지난겨울, 자신들을 위해 땀 흘리며 썰매를 끌어주던 도진의 듬직한 뒷모습을 기억하는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워진 도진의 곁에는 이수가 그의 부모님 댁에서 보았던 보석 같은 아이들, 서윤이와 도윤이가 낯선 풍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수는 환하게 웃으며 도진의 아이들에게 먼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서윤아, 도윤아. 잘 지냈어? 이모 기억나지?"

이수의 다정한 인사에 아이들은 배꼽 인사를 하며 화답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이수의 두 딸과 도진의 남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재혼 가정의 첫 대면'이라는 거창한 이름표가 붙은 비장한 순간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그저 '오늘 같이 조개 잡으러 갈 낯선 친구들'에 불과했다. 어른들은 혹여나 아이들이 어색해할까 봐, 서로를 경계할까 봐 찰나의 표정 하나까지 읽어내려 눈을 바삐 움직였다.


햄버거 가게 안으로 들어선 네 아이가 마주한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굳었다. 하지만 그 비장한 성벽을 무너뜨린 건 역시나 막내 도윤이의 천진함이었다. 도윤이는 자기보다 키가 큰 다연이와 다은이를 번갈아 보더니, 두 누나의 머리에 꽂힌 알록달록한 머리핀에 시선을 뺏긴 채 아빠 도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와, 누나들 머리핀 진짜 예쁘다! 아빠, 저 누나들이 조개 잡는 법 가르쳐주는 거야?"

도윤이의 천진한 말에 다은이가 웃으며 감자튀김 봉투를 열었다. 다은이는 괜히 목소리를 한 톤 높이며 도윤의 손을 잡았다.

“누나만 믿어. 삼촌, 도윤이 이거 먹어도 돼요? 내가 케첩 찍어줄게."

그 곁에서 늘 동생 도윤이를 챙기느라 지쳐있던 서윤이는, 다연이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모, 다연이 언니랑 나랑 옷 색깔 비슷해요! 우리 똑 같아요!"

언니를 갖고 싶었던 서윤이는 기꺼이 동생의 자리로 내려앉았고,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첫째 다연이는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제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 건넸다. 도진과 이수는 멀찍이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쟁반 위의 햄버거는 식어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힘든 울컥함이 차올랐다.

"자기야, 우리 왜 이렇게 긴장했지?"

"그러게... 애들은 벌써 저만큼이나 앞서가고 있는데."

안도와 감사, 그리고 조금의 허탈함이 섞인 짧은 대화였다. 아이들은 이미 서로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고, 어른들은 그 허락을 뒤늦게 받은 사람들처럼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차에 타는 자리 배치도 이미 아이들 마음대로였다. 이수의 큰딸 다연과 도진의 딸 서윤이 한 줄에 앉아 조잘거렸고, 다은과 도윤은 창밖의 풍경을 보며 내기를 하고 있었다. 룸미러로 보이는 네 명의 왁자지껄한 모습에 도진이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이수가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

도진은 대답 대신 깊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섯 명의 하루가,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작되고 있었다. 어른들만 괜히 표정 읽고 눈치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의 투명한 시선 앞에서 도진과 이수는 비로소 서로를 보며 진짜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대부도 갯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도진은 익숙하게 차 뒷문을 열어 산더미 같은 짐을 내렸고, 이수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차례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네 아이가 마당을 뛰어다니는 소란스러운 풍경 속에 펜션 사장님이 열쇠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줄지어 내리는 아이들과 양손에 짐을 가득 든 도진, 그리고 그 곁을 챙기는 이수를 번갈아 보던 사장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애가 넷이나 돼요?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이네! 엄마 아빠가 애들 챙기느라 고생이 아주 많으시겠어."

사장님은 혀를 끌껄 차면서도 기특하다는 듯 허허 웃었다. '엄마 아빠'라는 단어가 봄바람을 타고 두 사람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예전 같았으면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을 이수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수는 도진과 슬쩍 눈을 맞춘 뒤, 번지는 웃음을 참으며 사장님께 가볍게 목례했다. 도진 역시 "그러게요, 쉽지 않네요"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부정하지 않는 것, 그 오해 속에 잠시 머무는 것이 이토록 안온한 일임을 두 사람은 몸소 느끼고 있었다.


짐만 서둘러 펜션에 던져두고 나온 여섯 명은 각자의 장화를 챙기고 호미를 집어 들었다. 도진은 생각보다 능숙했다. 아이들의 장화 끝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이수의 두 딸에게도 능숙하게 조개 바구니를 쥐여주었다. 이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자연스러워도 되나.’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도진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이고, 진흙 묻은 손을 개의치 않으며 아이들의 앞길을 터주는 모습은 이미 그가 이 세계의 일부가 되었음을 시선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햇살은 진흙 위에서 보석처럼 부서졌고, 갯벌 위에서 여섯 명은 묘한 균형을 이루었다. 특히 청일점인 막내 도윤이는 단숨에 세 누나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는 중심점이 되었다. 가장 먼저 진흙 속으로 도윤이를 이끈 건 다은이였다.

"도윤아, 누나만 믿어! 누나가 저번에 조개 이~만큼 잡았거든?"

늘 둘째로 치여 살던 다은이는 처음으로 생긴 남동생의 손을 꽉 잡고는 의기양양하게 대장 노릇을 했다. 7살 남자아이 특유의 엉뚱한 발걸음을 세심하게 챙기는 다은이의 얼굴엔 주도적인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 뒤를 다연이와 서윤이가 따랐다.

"어머, 도윤아! 너 장화에 진흙 묻은 거 봐. 너무 웃기다."

서윤이는 처음 생긴 큰언니 다연이의 팔짱을 낀 채, 재롱을 떠는 남동생 도윤이를 보며 연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늘 먼저 챙겨야 했던 다연이는, 오늘은 이유 없이 웃고 있었다. 자기를 졸졸 따르는 서윤이와 앞서가는 도윤이의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의무'가 아닌 '애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작은 물결이 한 번 크게 들어오며 바닥이 미끄러워지자, 누나들 사이에서 신이 나 뛰어다니던 막내 도윤이가 휘청하며 중심을 잃었다.

"어어!"

도진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도윤의 허리를 낚아챘다. 거의 동시에 이수의 손도 도윤을 향해 뻗어 나갔지만, 찰나의 순간 도진이 조금 더 빨랐다. 진흙투성이가 된 도윤을 안아 든 도진과, 그 곁에서 숨을 몰아쉬던 이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의 안위를 확인하는 그 눈빛. 거기엔 경쟁도, 조심스러운 탐색도 없었다. 아이를 끌어안은 도진의 숨이 거칠게 들렸다. 이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수는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람은 지금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구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함께 두려워하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함께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구나.


사실 오늘 이 여행에서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건 아이들이 아니라 이수였다. 장화를 신고 호미를 든 이수의 눈빛은 평소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고, 눈빛이 유난히 빛났다. 갯벌의 추억을 오래 품고 있던 사람도, 결국 그녀였다. 아이들이 지쳐갈 무렵에도, 이수의 호미질은 멈추지 않았다. 오래전의 바다는, 아직 그녀 안에 남아 있었다.

"얘들아, 여기야! 여기 물구멍 보이지? 여길 깊게 파야 해!"

이수는 아이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것을 넘어, 어느새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무아지경으로 갯벌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다연, 다은, 서윤 세 누나가 도윤이를 챙기며 꺄르르 웃는 사이에도, 이수의 호미질은 멈추지 않았다. 막내 도윤이가 "이모, 여기 또 있어!"라고 외칠 때마다 이수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도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경탄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의 바구니를 비워주고 씻어주는 건 이제 온전히 도진의 몫이었다. 이수가 조개를 캐내면 도진이 나르고, 아이들이 환호하는 완벽한 분업 체계가 완성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개 바구니는 이미 성인 남성인 도진조차 들기 버거울 정도로 묵직하게 차올랐다. 아이들은 이제 슬슬 허기가 지는지 "삼촌, 배고파요!", "아빠, 이제 고기 먹으러 가요!"라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수의 호미질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자기야, 이제 정말 가야 해! 저기 봐, 물 들어오기 시작했어!"

도진이 멀리서 밀려오는 바닷물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제야 이수는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이었다. 만약 밀물이 밀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이수는 아마 펜션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채 갯벌의 조개를 전부 캐내려 했을지도 모른다. 펜션 사장님이 불러준 '엄마'라는 이름 아래, 그리고 조개를 잡는 즐거운 몰입 아래, 가장 건강하고 생생한 '서이수'만 존재했을 뿐이다.

여섯 명의 발자국이 남은 갯벌 위로 바닷물이 천천히 차올랐다. 파도는 아무렇지 않게 흔적을 지워갔지만, 오늘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까지 데려가지는 못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작된 하루가, 아무 일 없이 잘 흘러갔다. 그리고 그 평범함이, 이상하리만큼 고마웠다.



단단하게 굳혔던 긴장이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 섞인 인사 한마디에 속절없이 맥을 놓는다. 낯선 이가 건넨 오해 섞인 축복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정답처럼 가슴에 고인다. 서로의 그림자를 나란히 포개어 걷는 이 평범한 보폭이, 오늘은 참 눈물겹게 무사하다.

“아무 일 없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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