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플라스틱 의자 위에서 나눈 진짜 고백
대부도에서 돌아온 후 며칠간, 이수와 도진의 휴대전화는 여행 사진들로 불이 났다. 아이들이 갯벌에서 뒹구는 모습, 수목원에서 해맑게 웃는 사진들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일상의 틈바구니에서도 여전히 그 주말의 온기 속에 머물렀다.
"자기야, 오늘 저녁에 잠깐 시간 돼? 같이 갈 곳이 있어서."
두 사람은 백운호수의 물결이 저녁빛을 받아 윤슬을 일렁이는 호숫가, 가장 큰 베이커리 카페 앞에 멈춰 섰다.통유리 너머로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그곳은 평일 저녁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 여기는..."
"기억나? 내가 자기 부모님 처음 뵈러 가기 전에, 여기서 단팥빵이랑 소보로빵 샀었잖아. 그때 나 진짜 긴장해서 손에 땀까지 났었는데."
도진이 멋쩍게 웃으며 빵집 문을 열었다. 이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때의 도진은 '이수 부모님의 마음'을 사기 위해 빵집을 홀로 넘었을 것이다.
도진은 그때와 똑같은 빵을 샀다. 하지만 그 빵을 받아 드는 이수의 마음은 그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두 사람은 빵 봉투를 들고 이수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음식 냄새와 함께 어머니의 환한 목소리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아이고, 둘이 같이 왔네! 이수 아빠, 이수랑 도진 씨 왔네."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버선발로 나오듯 두 사람을 반겼다. 주방 쪽에서 손을 씻고 나오던 아버지는 도진을 발견하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거창한 말은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툭 던지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어. 그래. 왔나. 앉아 있다 가."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도진의 방문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는 편안함이 배어 있었다. 도진은 익숙하게 빵 봉투를 내려놓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자리를 잡았다. 대단한 환대는 아니었지만, 이수는 그 '어, 그래'라는 짧은 긍정 속에 도진이 이미 부모님의 일상으로 스며들었음을 느꼈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아파트 단지 편의점으로 향했다.
여러 번의 데이트가 이어졌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으며, 아이들도 서로의 존재를 기분 좋은 소란으로 받아들였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은 완벽한 흐름을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익숙한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이수의 마음 한구석에는 오래된 가시 같은 걱정이 박혀 있었다.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는 여전히 단단했고, 캔커피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다. 이수는 한참을 말하지 못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나... 솔직히 무서웠어.”
도진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이수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애들 상처? 그런 건 아니야. 우리가 어설프게 시작한 거 아니잖아.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건 믿었어.”
숨이 잠깐 막혔다.
“근데 나는...”
이수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나는 이미 끝난 줄 알았어.”
도진의 눈이 흔들렸다.
“여자로 사는 거. 그거 나한테는 끝났다고 생각했어.”
입술이 떨렸다.
“이혼은 내가 선택한 거야. 이유도 분명했고, 도망친 건 아니야. 근데... 아이들한테서 아빠를 없앤 것도 나잖아. 그래서 벌 받는 마음으로 살았어. 엄마로만 살면 된다고. 여자로 사는 시간은 나한텐 자격 없다고 생각했어.”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내 시간은 다 애들 거라고 생각했어. 설레는 거, 기대하는 거... 그런 건 사치라고. 내가 다시 행복해지려고 하는 건 욕심이라고.”
잠깐의 침묵.
“그러다 자기를 만났을 때... 좋았어. 너무 좋았어.”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나 다시 사랑받고 싶었어. 누군가한테 예쁘다고 듣고, 안아달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게 이렇게 행복한 건 줄 알았으면, 진작 포기하지 말 걸 그랬어. 그래서... 자꾸 더 가지고 싶어져."
눈물이 고였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 앞에서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마다... 좋았어. 근데 동시에 겁났어. 혹시 어느 날부터 나를 ‘애들 엄마’로만 보면 어떡하지? 내가 또 사라지면 어떡하지?”
숨이 흔들렸다.
“나 다시 사라지기 싫어.”
그 말은 거의 기도 같았다.
“엄마로 사는 건 괜찮아. 근데... 엄마로만 살고 싶지는 않아.”
잠깐 멈췄다가, 더 낮은 목소리로.
“나 당신 여자야. 그거... 잃고 싶지 않아.”
그 말은 고백이 아니라 결심 같았다.
도진이 천천히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잃게 두지 않아.”
짧고 단단한 한마디. 그리고 이수의 손을 더 꽉 잡는다.
“이수야, 나는 네가 엄마라서 좋은 게 아니야. 네가 그냥 이수라서 좋아.”
이수의 눈물이 조용히 떨어졌다.
도진은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더 꽉 잡았다. 그 힘이 말보다 확실했다. 푸르스름한 편의점 조명 아래에서, 이수는 처음으로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그냥 한 여자로 울고 있었다.
평생을 헌신과 책임이라는 이름표 뒤에 숨어 살다 문든 나 자신을 마주하는 밤이 있다. 타인의 기대를 걷어내고 오직 나로만 남고 싶다는 고백은 때로 이기적인 욕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는 단 한 사람의 온기 앞에서 비로소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